너의 코드가 보여 (16)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이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럼 친구 안 해도 되지?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저 녀석 표정이 진짜 침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나잇값 하자.
실제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저 녀석 아니면 내가 어떻게 노블레스 수장씩이나 만나겠나.
“충분히 도움 됐어. 덕분에 물건도 돌려받을 수 있을 거 같고. 오히려 고맙지.”
“…….”
내 말에도 자이어는 침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애 다루는 게 이리도 힘들다.
새삼 온 세상의 부모들에게 존경심이 든다. 나는 애 다뤄 본 적 없어서 여기서 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어깨 한 번 툭 치고 걸어가는데, 자이어가 곧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맙다.”
“뭐가?”
“평민의 말대로라면 아빠 목숨을 구해 준 셈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걸 믿냐?”
아버지한테 사람 말고 증거 믿으라는 소리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애초에 고아 하나가 노블레스에서도 모르는 정보를 알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다.
테이어에게 레시피까지 알려 준 이유도 그거다.
이야기만으론 설득할 수 없으니까. 그 말마따나 증거를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아직 증거 확인도 못 한 마당에 미리 감사하는 건 이르다.
자이어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하지만 확고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믿지 말라 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친우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
이 새끼 감성 터졌나? 왜 이러지. 부담스럽게.
동시에 양심도 조금 찔렸다.
거짓말한 적은 없다. 없지만, 사실 라이놀과 다린이 호적에서 파인 상태라고 말하진 않았다.
피는 잉크보다 진하다지 않나. 한낱 호적에 쓰인 잉크 따위가 가문의 피를 부정할 순 없을 터.
“적어도 나는 증거보다는 친우를 믿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응원한다. 진짜로.
* * *
“저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라이놀과 다린이 이쪽을 쳐다봤다.
타냐는 어디 갔지? 설마 나갔나?
잠깐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린한테 보호해 달라고 얘기해야 했는데.
“타냐는 어딨어요?”
“내, 내 방에 있어!”
다린이 호들갑을 떨며 답했다.
……뭐지? 갑자기 내 눈치라도 보는 모양샌데. 그러고 보니 집에 오자마자 물건은 어떻게 됐냐고 들들 볶을 줄 알았는데 그런 낌새도 없다. 그동안 실험실에 보였던 집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
“무슨 일 있었어요?”
“이, 이, 이, 일은 무슨. 아무 일 없었어……요.”
“…….”
무슨 일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추궁하려는 순간. 라이놀이 입을 열었다.
“물건은? 어떻게 됐어?”
“음…….”
말을 돌리려는 수작이 빤히 보였지만, 그냥 넘어갔다.
나한테 해 될 일이었으면 얘기했겠지.
“일단 얘기는 끝내고 왔어요. 별일 없으면 돌려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뭐? 정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둘이 놀랐다.
나도 큰 기대는 없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얼굴만 본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대화도 조금 하긴 했죠.”
“……대체 누굴 만났길래.”
“테이어 테르베로츠요. 거기 아들이랑 안면이 좀 있어서.”
“……노블레스 수장?”
“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다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역시 사도…….”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요.”
“…….”
아까부터 계속 어색한 티를 내는데, 모른 척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아마 라이놀이 뭔가 얘기한 탓이겠지.
그냥 거짓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아무리 그래도 저 둘한테 거짓말하긴 양심이 많이 찔렸다. 둘 아니었으면 아직도 구멍 뚫린 천장을 바라보며 자고 있을 텐데. 얼버무리자니 게임 제작하던 것밖에 생각 안 났다.
뭐, 금방 나아지겠지. 딱히 멀리하는 기색을 비치는 것도 아니니 무시하자. 생각해 보면 호들갑 떠는 건 별 차이도 없다.
“근데 타냐는 왜 다린 방에 있는 거예요?”
“리안…… 님이 하루 지나도 안 돌아오니까 나가려고 하길래 가둬 놨어……요.”
“아니, 그렇다고 가둘 것까지야…….”
지켜 달란 말도 없이 갔는데 보호해 준 건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계속 나가려고 발버둥 쳐서 어쩔 수 없었어……요.”
“…….”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너무 답답해서 안 되겠다. 존댓말 할 거면 똑바로라도 하든가.
“라이놀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편하게 해요. 부담스러워 죽겠네.”
“정말 그래도 돼……요?”
“아, 제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내가 부탁할게요.”
“……그럼 그러지 뭐!”
다린이 환하게 웃었다.
“나도 불편하던 참이고. 무르기 없기다?”
“무르긴 뭘 물러요. 그런 거 가지고.”
“나중에 종교재판에 회부 한다든가, 그런 거 아니지?”
웬 뜬금없는 종교재판. 물어볼까 하다가, 이미 충분히 골 아파서 넘겼다. 어차피 시답잖은 얘기겠지.
“그럴 일 없어요.”
“휴. 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어…….”
그러더니 다린이 흐물흐물, 바닥에 누워 버렸다.
가끔 세상을 살다 보면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싶은 사람이 있다. 다린이 그중 하나다. 저런 건 이해하려 들 필요가 없다. 그냥 그런갑다 넘어가야지.
“그럼 전 잠깐 타냐 좀 보고 올게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머리만 아파져서 둘을 내버려 둔 채 다린의 방으로 향했다.
2층에 올라와 다린의 방문을 바라보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
아니, 가둬 놨다는 게 진짜 말 그대로의 의미였어?
이거 아동학대 아닌가 싶었는데, 레이튼에 나가느니 이게 훨씬 낫지 않나 생각도 들었다. 그 정도로 인권이 발달한 세계가 아니기도 하고. 다린이 이유도 없이 이랬을 리도 없다.
슬쩍 보니 바로 옆에 열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자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타냐의 모습이 보였다.
“음…….”
얘는 그래도 황녀까지 했던 앤데 왜 볼 때마다 짠하냐. 하긴 8살에 쫓겨 나왔으니 누린 것도 없긴 하겠다만.
생각해 보니 짠할 만했다.
앞까지 다가가 앉았다.
“미안.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
“…….”
타냐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내보내 줘.”
누가 보면 진짜 감금이라도 한 줄 알겠네. 아니, 진짜 다를 거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잠깐 한숨 쉰 다음 입을 열었다.
“아무 때나 나가도 상관없어. 단, 나랑 동행한다는 조건하에.”
라이놀과 다린도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바이론이 직접 나선다면 큰일 난다.
그쪽은 상성 문제라서.
타냐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같이 다닌다는 조건이었지 같이 산다는 말은 없었어.”
“그럼 그쪽은 신관비로 달아 둬.”
타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을 어떻게 좀 쓸 만하게 만들긴 해야겠는데.
“넌 일단 내일부터 훈련 좀 하자.”
푸른 혈맥인데 무슨 재능이라도 있겠지.
이것저것 해 보면서 알아봐야겠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녀석은 정말 아무 재능도 없었다.
검술을 가르치던 라이놀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몸치였고. 마법을 가르치던 다린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마나치였다. 대기 중의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
자존심 때문인지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혼자 있을 땐 어김없이 구석에 가서 쪼그라들어 있는 게 보기 짠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닥까지 낮아진 자존감에 의한 ‘자기 불구화’ 전략이다.
실패가 두려워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 두는 것으로, 시험 날 ‘나 어제 공부 안 했어.’ 온 사방에 광고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그게 좀 심해져서, 아예 도전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푸른 혈맥’의 기본 조건은 ‘해방 왕’의 피.
그건 기본 조건으로, 어느 분야든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만 발현된다.
그런데 몸치에, 마나치? 뭐지? 치어리더라도 될 생각인가?
무려 황녀가 노래하고 춤추며 응원하면 힘이 나긴 하겠다. 문제는 노래마저 꽝이었다는 거다. 하다못해 요리도, 청소도 못 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속이 시원해진다.
“리안, 거기서는 오히려 힘을 좀 빼는 게 나아. 다음 동작과 연결이 수월해지거든.”
“알겠어요.”
라이놀이 말하는 대로 몸에 힘을 빼자 확실히 다음 동작이 매끄럽게 연결됐다.
좋은 선생이다.
가르치는 것도 잘할 줄은 몰랐다. 재능충이라 ‘대충 이런 느낌으로 하면 되는데?’ 같은 전개를 상상했는데…… 가르치는 데도 재능이 있을 줄이야.
이런 라이놀도 두 손 들고 포기한 인재가 타냐다. 뭐 하나 봤더니 나무에 기대 무릎 사이에 고개 처박고 있다.
저거 또 짠하게 만드네.
한참 시간이 지나 수련이 끝났을 때도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였다.
“하아…….”
잠깐 한숨 쉬고 라이놀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전 저 녀석이랑 같이 들어갈게요.”
“괜찮겠어?”
“네. 요즘 마력 수련하느라 바쁘잖아요.”
보물고에서 얻은 마력 심법 수련, 내 검술 지도, 타냐 적성 탐색까지. 요즘 라이놀은 몸이 두 개는 돼야 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꼬맹이 멘탈 케어까지 부탁할 순 없지.
라이놀도 타냐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래. 내가 위로한다고 도움 될 것 같지도 않고…… 이런 건 나이 비슷한 친구가 곁에 있는 게 낫겠지.”
사춘기 꼬맹이랑 나이 비슷하단 소리를 들으면 조금 암담해지는데. 게다가, 위로 방법은 나도 모른다.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가는 라이놀을 바라봤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여전히 고개 처박고 있는 타냐에게 다가갔다.
“……돌아갈래?”
분위기 존X 어색하네 진짜.
다른 세계 와서 꼬맹이 눈치까지 보며 살아야 하나? 다시 깊은 현타가 찾아오려는 찰나, 타냐가 입을 열었다.
“알아서 돌아갈 거야. 먼저 가.”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리 봐도 울고 있던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자존심 강한 애한테 ‘너 울었냐?’ 묻는 건 너무 섬세함이 부족한 거 같았다.
내가 진짜 중고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할 말도 마땅찮았던 터라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럴 땐 혼자 놔두는 게 최고일 거 같긴 한데, 내버려 두기엔 워낙 레이튼이 거지 같은 동네라.
녀석은 내가 옆에 앉을 때 잠깐 움찔거리고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싶을 때쯤 내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느 쪽이든 재능이 있을 거야. 그건 내가 확언할 수 있어. 일단 기운 좀 내라.”
“무슨 재능?”
타냐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확언을 해? 검술도, 마법도, 하다못해 하녀들이나 하는 요리나 청소까지 아무것도 못 했어! 나는…… 난……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그러고는 울먹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저거 진짜 자존감이 바닥을 쳤구나. 그렇게 신분 숨기려고 노력하더니, 하녀니 뭐니 귀하게 자란 티 팍팍 내고 있고. 보통 요리나 청소는 본인이 직접 하지 하녀를 쓰진 않는단다.
“하아.”
이 세계 오고 느는 건 한숨뿐이다.
일단 난 저 녀석 생각보단 녀석을 잘 아는 데다, 푸른 혈맥까지 생각하면 지금 이 세계에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푸른 혈맥을 타고난 이상, 재능이 없을 리 없다.
“남은 건 동대륙 기술뿐인가.”
지금 당장 준비하기엔 어렵지만, 구하기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다. 라이언 가문의 물건을 돌려받으면 그쪽부터 준비해 봐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