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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5화 (1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5)

“그런 사정이라면 당연히 돌려줘야지. 평민. 우린 친우가 아닌가?”

“……흔쾌히 부탁 들어주는 건 고마운데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가 됐냐?”

이 새끼는 볼 때마다 어이 터지게 하네.

내 나이가 몇인데 맞먹으려 들어?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친우가 아니면 내가 왜 그런 부탁을 들어줘야 한단 말인가?”

“당연히 우린 친구지. 그걸 꼭 말로 해야겠냐? 원래 친구란 게 어느샌가 돼 있고 그런 거지.”

이 자식, 사람 다룰 줄 아네.

돈만 아니었으면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리는 건데. 지구나 여기나 물질만능주의로 돌아가는 건 똑같다. 더러운 자본주의.

“영광으로 아는 게 좋다. 내가 평민을 친우로 삼은 건 이번이 처음이니 말이다.”

“영광스러운 나머지 돌아버릴 거 같다.”

“사실 평민이 친우가 아니더라도 돌려주는 것이 맞다. 가문의 물건을 빼앗고, 본인의 것인 양 태연히 맡기기까지 하다니! 노블레스의 긍지를 위해서라도 용납할 수 없군.”

“그럼 친구 안 해도 되는 거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럴 거면서 뭐 그리 장황하게 얘기해?

“어쨌든 너만 믿으면 된다는 거지?”

“물론이다, 평민. 노블레스의 명예를 걸고 물건들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지.”

* * *

“인장이 없으면 물건은 돌려줄 수 없다.”

“아, 아빠!”

이럴 줄 알았다. 리안이 내심 한숨 쉬며 생각했다.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에서도 손꼽던 가문의 물건.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지 않나. 꼬맹이 하나가 돕는다고 그 큰 액수를 그냥 돌려줄 거라곤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않았다. 권한도 없을 테고.

리안은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아버지, 노블레스의 수장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명성 높은 테르베로츠 가문의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안이라고 합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을 빛냈다.

저 소년에 대해선 아들에게 들은 바 있다. 예의 없고 무례한 평민. 가문까지 욕보였지만 재밌는 녀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과하지도,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인사.

오히려 외모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품이 어우러져 저쪽이 진짜 귀족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살짝 웃음 지었다.

“나도 아들에게 얘기는 전해 들었네. 무식하게 몸을 단련하고, 가문의 명예를 모르며, 예의는 밥 말아 먹은 자라 하더군.”

리안도 마주 웃음 지었다.

이 아저씨가 꼬맹이 상대로 도발을 시전하네.

“아드님의 안목이 정확합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는 가릴 줄 알지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비겁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지 못하는 걸 천지 분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라 하였는데 노블레스는 다른가 봅니다.”

“하하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크게 웃었다.

“이거 한 방 먹었군. 무례는 사과하지. 테이어 테르베로츠라 하네.”

“저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리안입니다.”

“거기 앉게. 차분히 얘기하는 게 좋겠군.”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리안이 의자에 앉자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새끼.

“고약한 습관이라 욕을 많이 먹긴 하지만, 나는 첫 만남 때 도발을 해 상대의 반응을 보는 걸 즐기지. 반응하는 걸 보면 상대가 얼추 보이거든.”

“정말 고약한 습관이시네요.”

“정면에서 얘기하는 건 자네가 처음일세.”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는 때와 장소를 가린다고 했지만, 나는 사람을 가리지. 어중이떠중이와는 대화하고 싶지가 않아. 내가 사람을 보는 기준이 뭔지 아나?”

“당당한 사람을 좋아하시나 보죠?”

“아닐세.”

리안의 대답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개를 저었다.

“태도는 아무래도 좋아. 화를 내든, 웃어넘기든, 당당히 반박하든. 정말 아무래도 좋지.”

“그럼 대체 뭘 본다는 겁니까?”

“여유.”

리안의 아리송한 표정을 바라보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레이튼 최고의 권력자인 내 앞에서 화를 낼 수 있는 여유. 모욕을 당하고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 당황하지 않고 당당히 반박하는 여유.”

“……그거 통과 기준이 너무 널널한 거 아닙니까?”

사실상 뭘 해도 좋다는 수준 아닌가.

“아닐세. 똑같이 화를 내도 여유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지. 믿는 구석이 있는 자는 눈빛부터 다르거든.”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태까지 내 기준을 통과한 자가 10명이 안 되는데 그중에서도 10대 소년은 처음이군.”

“영광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네의 카드가 뭔지 기대가 크네. 단순히 내 아들놈 믿고 물건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그때 옆에서 얼이 빠져 있던 자이어가 소리쳤다.

“아버지!”

아빤지 아버진지 하나만 해라. 리안이 어이없는 눈으로 자이어 테르베로츠를 바라봤다. 하지만 테이어 테르베로츠에게는 익숙한 일인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거라.”

“그 물건은 모험가 놈들이 라이언 가문의 물건을 훔친 겁니다! 당연히 가문의 생존자에게 돌려주는 게 마땅합니다!”

“증거는?”

“예?”

“라이언 가문의 생존자라는 증거, 그 물건이 라이언 가문의 보물고에서 훔친 거라는 증거. 둘 중 하나라도 있느냐?”

“그건…….”

없다.

리안의 말을 듣고 따라왔을 뿐이다.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눈이 떨렸다.

“친우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증거. 오직 증거만을 믿어라.”

“……하지만 확인증은 진짜입니다!”

“확인증만으론 부족하지. 인장도 필요하다는 걸 알지 않느냐.”

“확인증만으로 물건을 돌려주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액수가 적을 때의 얘기다. 이런 금액을 그렇게 처리할 순 없어.”

“…….”

“인장은 단순히 귀찮게 만들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지.”

자이어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전부 맞는 말 같기도 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민하는 표정의 아들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떤 결론을 낼지는 몰라도 고민을 한다는 건 좋은 징조다.

“이야기가 지체됐군. 그래서, 자네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뭔가?”

리안은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얼굴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윌포드 셰링턴에 대해서 아십니까?”

“알지. 내 밑에 있는 자 중 하나일세.”

“어떤 자입니까?”

“어중이떠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답했다.

“돈 많은 부모를 타고났을 뿐인 녀석. 그 부모와의 인연을 봐서 쓰고는 있지만 별로 쓰고 싶은 인재는 아니지.”

“그자가 가주님의 독살을 꾀하고 있습니다.”

“흐음…….”

윌포드 셰링턴이 독살을?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항상 제 주제도 모르고 더 높은 자리를 원하던 녀석이니까.

“증거는? 앞서 말했지만, 나는 증거만을 믿는 사람일세.”

“그가 최근 구매한 물건들을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가주님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하겠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거래에 어울릴 만한 카드인지는 모르겠군. 나는 평생 위험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네. 독살 정도는 충분히 대비해 놨지.”

“이번에는 대비가 힘들 겁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

“가주님께서 어중이떠중이에 능력이 없다고 무시한 윌포드 셰링턴이 독에 관해선 천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윌포드가?”

윌포드 셰링턴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처진 어깨, 비굴한 표정. 어느 쪽으로든 재능을 펼칠 만한 인재는 아니다.

윌포드 셰링턴이 독살을 꾀하는 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대비를 뚫을 정도의 독을 만들어 낸다? 이건 믿을 수 없다.

리안은 그런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데스산맥에서만 자라는 자생초가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풀이지만, 레이튼의 시민들이 많이 먹는 풀이니 찾기 힘들진 않겠지요.”

“그게 어쨌다는 건가?”

독살에 관해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자생초 타령이란 말인가?

“그 풀만 먹었을 땐 아무 문제 없지만, 몇 가지 재료를 섞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전부 흔한 재료인 데다 윌포드만 아는 레시피라 가주님도 눈치챌 수 없으실 겁니다.”

“……윌포드만 안다는 걸 자네는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건 사업 비밀로 해 두지요.”

리안은 최대한 신비로워 보이게 웃음 지었다. 떡고물 하나라도 더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제가 그 레시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독약을 제조한 후 짐승이나 몬스터에게 먹여 보시면 증거가 되겠지요.”

“…….”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설득할 필요가 있겠다.

“주제넘지만 충고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뭔가?”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겉보기에 볼품없어 보이는 녹슨 검이어도 검은 검입니다. 찌르면 들어가고 힘껏 베면 베이지요. 심지어 파상풍에 걸리기까지 합니다.”

리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게 어떤 한 모습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어도 볼품없고, 여유 없어 보일 수 있고 혹은 정말 되지도 않는 걸 믿으면서 자신에 차 있을 수도 있죠.”

리안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마주 보고 있는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상대가 들고 있는 게 녹슨 검으로 보여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검으로도 사람 하나 베는 건 거뜬한 수준의 검사일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 * *

혼자 남은 방 안에서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미소 지었다. 그에게 충고를 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 적어도 10년 내에는 없었다.

“제리스.”

테이어가 이름을 부르자 아무도 없던 구석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네.”

“직접 보니 어떤가? 정말 용병 열 명을 상대로 이겼다고 보나?”

“불가능합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신체도, 마력도 전혀 보잘것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소년입니다.”

“하지만 정보가 틀릴 리 없다.”

애초에 피해자 중 하나는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 조건에서 정보가 틀렸다면 당장 조직을 뒤엎어야 할 판이다.

그는 자신의 정보 조직을 믿었다.

‘사자검’과 ‘바람의 마도사’가 라이언 가문의 생존자란 것도, 얼마 전 바이론의 스캐빈져들이 그들에게 당했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을 정도니까.

“저는 단지 보이는 대로 말할 뿐입니다.”

“흐음…….”

하지만 제리스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안다. 무려 3급 기사에 달하는 실력자 아닌가.

정보 조직의 능력도, 제리스의 안목도 믿는다. 한데 내놓은 결과는 둘이 상충하여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힘이군.’

오랜 상인의 경험상, 겉으로 보이지 않는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테이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어떤가? 소년의 충고가 맞다면, 겉모습을 보고 무시했던 윌포드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겨우 5년의 귀족 놀이로 이렇게 무뎌지다니.’

테이어가 손에 쥔 종이를 제리스에게 건넸다.

“여기 적힌 재료들을 모아 윌포드에게 먹이게. 그리고 놈이 죽으면 라이언 가문의 물건은 그 소년에게 보내고.”

“네.”

“아, 잠깐.”

테이어가 발길을 돌리는 제리스를 붙잡았다.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물건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남에게 빚을 진 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바이론을 조심하라고 일러두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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