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4)
“이건 또 뭐야?”
밖으로 나와 보니 시체 두 구가 생겨 있었다.
개 뜬금없네, 진짜.
뒤따라 나온 라이놀이 시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복장을 보니 모험가들 같은데. 보물고를 턴 녀석들인가?”
“아, 그러고 보니 그쪽도 있었죠.”
보물고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모험가에게 털린 지도 탓이었다. 이래저래 생각할 게 많아서 깜빡했네. 근데 얘넨 왜 지들끼리 뒤져 있냐?
시체 위에 떠오른 코드를 바라봤다.
[NPC-1-AV-B]
[NPC-1-AV-C]
모험가(Adventurer) B등급. 무력으론 용병보다 한 수 떨어지지만, B등급 정도 되면 자체 무력만으로도 우습게 볼 수준은 아니다.
그런 실력자가 안에 있던 우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사망했다.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주변에 있는 것은 덤덤, 그 멍청한 동상뿐. 지들끼리 자살한 게 아니라면 범인은 덤덤이겠지. 7성급 마법사가 만든 동상이다. B등급은커녕 A등급이 와도 못 이긴다.
시체를 살핀 라이놀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사를 세 번 실패한 건가? 욕심이 과했어. 모험가라면 욕심은 금물이라는 걸 제일 잘 알 텐데.”
그러더니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어떻게 보면 자기 물건을 털려고 온 놈들이다. 그런 상대를 저렇게 동정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 사람을 잘 믿는 건 흠이지만, 그런 성격이면서도 결단을 내릴 땐 망설이지 않는다.
솔직히 성격만 보면 이쪽이 더 주인공 포지션에 어울리는 거 같은데. 미친개 그 새끼는 워낙 또라이라.
“그럼 털린 보물고에 있던 물건들도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글세…… 봐야 알겠는데?”
라이놀이 시체의 품속을 뒤져 종이 몇 장을 찾아냈다.
“노블레스 확인증이네. 아르곤과 겔리안으로 물건을 보낸다는 내용이야. 일자가 어제이니 물건은 아직 레이튼에 있겠다.”
“노블레스라…….”
귀족인 척하는 상인 새끼들. 그 단어를 들으니 괜히 잊고 있던 놈 하나가 생각났다.
“문제는 확인 인장이 없어. 모험가답긴 하네. 죽어서도 자기 재산 빼앗기는 꼴은 못 본다는 거지. 본인만 아는 곳에 숨겨 뒀을 거야.”
“그거, 죽은 사람 무덤 파헤치는 놈들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에요?”
“모험가들이 그렇지 뭐.”
어째 레이튼엔 인식 제대로 박힌 직업이 없냐. 물들기 전에 빨리 떠야 하는데 망할 놈의 도시.
“그럼 방법이 없는 거예요?”
“확인증만으로 물건을 돌려주는 일도 있긴 한데…… 이번 경우엔 안 해 주려 할 거야. 금액이 적으면 돌려주고 말지만, 금액이 많으면 인장이 없다는 핑계라도 대겠지.”
“신용 없는 새끼들이네요.”
“일단 원칙상 인장도 필요한 게 맞으니 뭐라 따지기도 어려워.”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뜻인가.
사실 나야 영초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실험실을 원하던 다린에게는 슬픈 소식이겠다. 어쩔 수 있나, 세상사 다 그런 법이지 뭐.
그 순간, 라이놀의 중얼거림이 귀에 박힌다.
“노블레스 쪽에 인맥이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쪽엔 아는 사람이 없어서.”
“…….”
내키진 않지만, 인맥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잠깐 한숨 쉬고 입을 열었다.
“노블레스 쪽이라면 제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탁해 볼게요.”
“아는 사람?”
라이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나를 믿고 넘어가 주기로 했지만, 굳이 의심을 사는 건 사양이다.
말할 수 있는 건 얘기해야지.
“전에 마력 측정 갔을 때 만난 사람이에요. 그냥 얼굴만 본 사이니 너무 기댄 마시고요.”
“그 정도 사이면 물건을 돌려줄 거 같진 않지만…… 가능성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지.”
보물고에서 챙긴 물건들을 들어 올리며 라이놀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리안, 정말 그 장갑 하나로 괜찮아?”
“네. 저한테 제일 필요하던 물건이에요.”
손에 낀 장갑을 문질렀다.
닿은 물체의 무게를 조절할 수 있는 장갑.
실력이 올라갈수록 무게에 의한 물리력은 영향을 미치기 힘들지만, 지금 수준에선 충분히 도움 될 거다.
운동할 때 중량 치기도 좋겠고.
“어차피 또 안 듣겠지만…… 정말 마력 심법도 필요 없어?”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나중에 배운다는 거예요. 배우기 전에 몸 좀 만들게요. 마력 생기면 몸만들기 힘들잖아요.”
“대체 거기서 뭘 더 만든다는 건지…….”
라이놀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뭐,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말해. 사실 네 지분도 상당하니까.”
“네.”
“그리고…….”
라이놀이 시체 두 구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저기 근처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주자. 저 사람들도 이런 데서 죽을 거란 생각은 못 했을 테니까.”
* * *
“보물고는! 털었어?”
“털었니 뭐니 그런 표현은 좀 자제하자. 도둑질이라도 한 거 같잖아.”
라이놀이 한숨 쉬었다.
어째 요즘따라 한숨만 늘어 가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
안 그래도 그는 도둑질한 거 같은 죄책감에 양심이 찔렸다.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다.
‘원래는 거부당했으니까…….’
티는 안 냈지만, 처음 거부당했을 때는 꽤 충격이었다. 정말 가문과의 연이 완전히 끊긴 거 같아서.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남았었나 보다.
가문에서 다린을 마녀로 몰고, 추방하고, 죽게 내버려 두려 했을 때. 그는 이미 가문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있었다고 생각했다.
‘겁쟁이 새끼.’
라이놀은 쓰게 웃었다.
결국 그는 두려웠을 뿐이다. 관계가 끊어진 걸 확인하는 게. 사실 두 번째 검사를 오래 망설인 이유는 그게 컸다.
끊어진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 같아서.
“일단 숨겨진 쪽은 해결됐어. 보물고 턴 모험가들도 찾았고.”
“와! 실험실!”
다린이 방방 뛰었다. 라이놀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실험실은 좀 두고 봐야겠는데.”
“뭐? 왜!”
라이놀이 재촉하는 다린을 보고 다시 한숨 쉬었다.
이렇게까지 실험실을 원하는 걸 보니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촐랑대는 게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지.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숨겨진 쪽에 있던 것들은 현금화하기 힘든 것뿐이고. 털린 쪽의 물건들은 노블레스에 맡겨져 있어.”
“노블레스? 확인증은? 인장은?”
“확인증은 있지만, 인장은 없어. 리안이 그쪽에 인맥이 있다 해서 찾으러 간 상태야.”
“이, 인맥? 어떤 사인데?”
“그냥 얼굴 한 번 본 사이라던데.”
“악! 망했어!”
다린이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얼굴 한 번 본 사인데 그 많은 물건을 돌려준다고? 그냥 조용히 있으면 자기들이 꿀꺽하는걸? 끝났어……. 나는 앞으로 평생 실험실을 가지지 못할 거야. 용병으로 구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 가겠지.”
라이놀이 황당한 표정으로 다린을 쳐다봤다.
“나중에 돈 모으면 실험실부터 차려 줄 테니 걱정 마라. 그렇게까지 원하는지는 몰랐는데.”
“돈을 어떻게 모아? 저 애가 불쌍하니, 저 사람 사정이 딱하니, 온갖 이유로 돈 쓰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
할 말이 없어진 라이놀이 잠시 입을 멈췄다.
일단 눈에 밟히면 계속 보이는 걸 어쩌나? 그리고 다린의 돈까지 손댄 기억은 없다.
“너도 많이 도왔잖아.”
“옆에서 착한 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나만 나쁜 년 되는 거 같잖아. 설마 오빠 돈만으로 그게 감당될 거라 생각한 거야?”
“…….”
전혀 몰랐다. 돈 계산 같은 건 다린이 전부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리안 친구라는 애는 어디 갔어?”
말 돌리려는 수작이 빤히 보였지만, 다린은 그냥 한숨 쉬며 넘어갔다. 사실 본인도 라이놀의 그 ‘착한 짓’ 덕분에 살아남은 입장이니까.
“나가려고 하길래 일단 내 방에 가둬 놨어. 그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큰일 날 거 같아서.”
보통 사람들은 잘생기고, 예뻐지는 걸 꿈꾸지만 레이튼에선 달랐다. 이곳에서 힘없는 외모는 독이 되어 노리는 사람만 많아질 뿐이다.
타냐를 씻긴 다린은 두 가지 의미로 놀랐다.
첫째는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더럽던 아이가 나름 외모에 자신이 있던 다린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예쁘다는 것과.
‘황녀님을 닮았어.’
그녀가 어릴 때 잠깐 봤던 제국의 황녀.
그때 겨우 세, 네 살이던 황녀와 비교하는 건 우습지만, 정말 닮았다.
‘그럴 리 없지.’
세 왕국에서 제국의 핏줄을 살려 뒀을 리가 없다. 혹여, 정말 만약에 탈출을 했다고 해도 제국의 황녀가 왜 저렇게 살고 있겠는가? 꼭꼭 숨겨 두고 신줏단지 모시듯 해도 모자랄 판에.
“리안이 돌아오면 떠넘기려 했는데…… 언제 오는 거야?”
“글쎄, 모르지. 그것보단 할 말이 있어.”
“뭔데 또? 무섭게…….”
다린이 몸을 떨었다.
보물고 털렸다는 얘기도 저런 표정으로 얘기하진 않았는데.
“보물고에 입장할 자격이 박탈돼 있었어.”
그 말에 다린이 잠시 라이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가문에 정말 조금도 남은 미련이 없지만, 라이놀은 아니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 가기 전부터 예상하고 간 거잖아. 리안이 방법이 있다고 했고.”
“그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
“뭐 대충 입구 때려 부수고 들어갔겠지.”
“…….”
마법사가 한 대답이라기엔 너무 단순 무식하지만, 라이놀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넘겼다.
“너한텐 말 안 했지만 거기 입구는 7성급 마법사가 만든 동상이 지키고 있어.”
“7성급?”
다린이 놀라 소리쳤다.
7성급이면 이제 겨우 4성급인 그녀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마법사 세계에서 7성급이라는 건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다.
“사실, 리안의 방법보다는 확인 차원에서 간 거야. 아직 자격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그걸 어떻게 뚫었는데? 그 정도면 오빠도 못 이길 텐데…… 설마 리안이?”
동상과 싸워 이겼냐는 뜻이다.
라이놀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차라리 안 놀랬지.”
“……어떻게 그것보다 놀랄 일이 있어?”
7성급 마법사가 만든 동상과 싸워 이긴 10대 소년.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다.
그것보다 놀랄 일이 대체 뭐가 있지?
“동상을 조작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보물고 출입 자격을 부여했다는 말이야.”
다린이 입을 벌렸다.
“지금, 7성급 마법사의 창조물을 조작했다고 하는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맞아.”
“착각한 거야.”
단호한 표정으로 다린이 말했다.
“오빠가 마법을 잘 모르니까 착각한 거지. 그건 불가능해.”
“처음에는 자격이 없다던 동상이 리안의 말대로 다시 측정하니 말을 바꿨어.”
“그건…… 처음에는 옆에 있던 리안을 잘못 측정한 거겠지. 두 번째는 오빠가 받은 거고.”
“두 번 다 확실하게 나를 측정했어.”
“…….”
라이놀의 표정이 너무도 확고했기 때문에 다린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7성급 마법이 뚫렸을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착각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다린이 입을 열었다.
“리안은? 리안한텐 물어봤어?”
“물어봤지. 인정하던데.”
“……인정했다고?”
“애초에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물었으니까.”
라이놀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체도 같이 물었어. 조금 망설이긴 했는데, 대답해 주더라고.”
“정체?”
“확실하게 얘기해 줄 순 없지만, 이 세계의 ‘제작’과 관련이 있다더군.”
“……그건 또 무슨 거창한 소리야? 자기가 주신 ‘키탄’이라도 된다는 거야?”
너무 황당한 소리에 다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라이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키탄은 아닐지라도 키탄과 관련이 있을 순 있지.”
“……설마 키탄의 사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라이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린이 경악했다.
신의 사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힘을 권능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자들.
교황이 신의 말을 대변하고 성녀가 신의 역할을 대변한다면, 사도는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
신의 입, 신의 육신, 신의 검.
보통의 신전은 교황, 성녀, 사도 셋의 지도 아래 굴러간다. 문제는…….
“키탄은 성녀와 사도를 선택한 적이 없잖아.”
500년 역사상 키탄은 신들 중 유일하게 성녀와 사도를 내리지 않은 걸로 유명했다. 따라서, 주신 키탄의 신전만은 예외적으로 교황 혼자서 이끌고 있던 것이다.
라이놀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주신 키탄의 사도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돼. 말도 안 되는 육체 능력, 7성급 마법을 수정하는 능력, 거기에 이 세계 제작과 관련이 있다는 말까지.”
잠시 숨을 고른 라이놀이 말을 이었다.
“우린 500년 역사상 처음 탄생한 키탄의 사도를 보고 있는 걸 수도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