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
[AE-192-N] > [AE-192-Y]
[코드 변경에 5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
똑같은 코드를 바꾸는데 나는 2,000포인트, 라이놀은 500포인트. 무려 4배의 차이가 난다.
이 4배의 차이가 어디서 온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연관성이다.
이 던전은 라이놀의 가문에서 만든 것. 지금은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원래는 던전 출입이 허락된 사람이다. 반면 나는 이 던전과 아무 연관성 없는 사람.
지금 당장 명확하게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다.
개인의 강함과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뜬금없지만 나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섣불리 판단하긴 힘들다.
비교군이 부족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린과 타냐도 데려와서 확인해 볼 걸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라이놀이 가까이 다가왔다.
“리안, 생각 안 나면 무리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 나는 괜찮으니까.”
이 자식. 진짜 왜 이렇게 성격이 좋지?
어떤 놈이 방법 있다며 이 먼 곳까지 끌고 와 놓고 생각 안 난다고 지껄이면 난 줘 팬다 진짜.
“잠깐, 진짜 잠깐만요.”
안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고. 라이놀도 이곳의 내용물은 모른다고 했으니 의외로 텅 비어 있을 가능성까지 있다.
게임에서도 랜덤 인카운트로 보상 없는 던전이 있었으니까.
욕 처먹고 바꾸긴 했지만.
보물고에는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르지만, 포인트는 확실하게 소멸된다.
500포인트면 미묘한 숫자지만, 사실 이게 적은 건지 많은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애초에 얻은 포인트 전부이기도 하고.
이걸 소비할 가치가 있나 싶었지만, 여기까지 따라오고 불평 하나 없는 라이놀을 봐서라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경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대로 돌아가면 쪽팔려 뒤질지도 모른다.
“음…… 죄송해요.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내 무책임한 말에도 라이놀은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돌아갈까?”
“아, 잠시만요. 혹시 인식이 잘못된 걸 수도 있으니 한 번만 더 해 보고 가지 않을래요?”
“가문에서도 엄청나게 공들여 만든 던전이야. 인식이 잘못될 일은 없어.”
그러더니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러면 나가린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란 말도 있잖아요.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돼요?”
“음…….”
라이놀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니, 그냥 한 번 더 앞에 서면 되는 걸 왜 저렇게 고민하지? 혹시라도 나한테 화났다고 저럴 사람도 아니다. 뭔가 다른 게 있나?
“다시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네 말대로 만에 하나란 말도 있으니까.”
그가 짐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 동상, 자격 없는 사람이 세 번 검사를 받으면 공격하거든. 두 번은 상관없겠지만…… 어차피 안 될 거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잖아?”
“아…….”
삼세번 룰이었나.
이 세계에선 꽤 드문 방식이다. 라이놀의 망설임도 이해가 갔다.
“안 될 게 확실하지만…… 리안 네가 그렇게 미련이 남는다면 한 번 더 못 할 것도 없지. 대신, 세 번은 안 돼.”
“당연하죠. 고집 들어줘서 고마워요.”
휴. 다행이다.
시간 낭비에 포인트 낭비까지 할 뻔했네. 동상에 그런 제약이 걸려 있는 줄은 몰랐다.
아까 한 번 더 검사를 받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면 나부터 포기하고 돌아갔을 거다. 코드를 바꾼 게 진짜 통할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으차.”
짐을 내려놓은 라이놀이 다시 동상 앞에 섰다.
일단 다시 서기는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인식이 틀릴 리가 없으니까.
동상의 눈이 뜨여지며 하얀빛이 그를 관통했다.
잠시 후, 동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자격을 확인. 출입이 허가됩니다.]
“……뭐?”
쿠구궁.
보물고의 문이 열렸다.
* * *
“와, 무단으로 들어왔으면 벌집 났겠는데요.”
정면의 화살 함정을 보며 말했다. 사실, 벌집이 날 정도는 아니다. 구멍은 끽해야 3개였으니까. 그런데도 과장되게 말한 건, 아까부터 분위기가 존나 어색했기 때문이다.
“…….”
입을 다물고 있는 라이놀을 힐끗 쳐다봤다.
아까 보물고 문이 열린 이후로 계속 저 상태다.
……역시 과했나?
의심 갈 만한 상황이긴 했다. 분명 자격이 없다던 동상이, 내 억지로 다시 검사를 받자마자 통과를 시켜 준 격이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인트까지 쓴 채 그냥 돌아갈 수도 없잖은가.
문제는 변명할 말이 궁색하다는 건데.
솔직히 말해서, 라이놀이라면 그냥 넘어갈 거라는 계산적인 속내도 있었다.
“으음…….”
어색한 분위기에 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니, 사실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잖아. 당당해지자. 난 꿀릴 거 하나 없다!
“리안.”
“넵.”
시X, 깜짝이야. 갑자기 부르면 놀라잖아요…….
“아까 그 동상은 7성급 마법사가 만든 거야. 사람의 마력 패턴을 측정하고, 인식하지.”
라이놀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사람의 고유 마력 패턴이 바뀌는 경우도, 7성급 마법사가 만든 보안 시스템이 뚫리는 경우도 ‘해방 왕’ 이후 500년의 기간 동안 기록된 바 없어. ‘공백의 시대’에는 또 모르겠지만.”
“…….”
과한 게 맞았나 보다.
저런 설정은 알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개발자 입장에선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설정 아닌가.
개발자로서 게임 설정을 쓰는 것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지인 관점에서 느끼는 것. 거기서 발생한 차이다.
게임 설정이 ‘천 년 전 마족이 쳐들어왔고, 그동안 아무도 마족을 막은 자가 없었다.’ 란들 관심 가지는 플레이어는 없다.
개발자도 다를 거 없다. 꿰고는 있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냥 설정이니까.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항상 이해가 안 가긴 했어. 인간이 아무리 몸을 단련한다 해도 마력 없이 그렇게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 심지어 너 같이 어린 나이에.”
“…….”
“입구의 동상. 네가 했다는 거 알아.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라이놀이 말을 끊고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너는, 대체 뭐지?”
* * *
“씨X 찾기도 존X게 힘드네.”
지도를 들고 있던 흑색 두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B등급의 모험가로 나름 이름을 알린 사내였다.
“아, 글쎄 난 영 느낌이 안 좋다니까.”
그 옆에 있던 쥐새끼를 닮은 남자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퍽!
흑색 두건이 쥐새끼의 뒤통수를 쳤다.
“이 새끼가 여기까지 와서도 지랄이네, 부정 타게. 일단 시작했으면 아가리는 처닫는다. 모험가 규칙 모르냐?”
“씨X. 이 짓 십 년 하면서 그딴 규칙 있다는 건 또 처음 들어 보네.”
쥐새끼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모험가에게 규칙이 어딨나? 많이 벌면 장땡이지.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안 되오? 진짜 찝찝해서 그래.”
그는 본인의 감에 자신이 있었다.
다른 모험가들보다 나이도 많고, 실력도 딸리는데 이 짓을 십 년이나 할 수 있던 건 오직 감. 그거 하나 덕분이었으니까.
흑색 두건도 쥐새끼의 감 덕분에 살아남은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저놈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저 감 때문일 정도.
하지만 이번 건은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적중률이 높을 뿐, 항상 맞는 건 아니니까. 항상 맞으면 그게 감이냐? 예지 능력이지.
“입구까지만 가 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갈 거라니까. 나 못 믿어?”
“믿기야 믿지. 그래도 감이 영 안 좋은데…….”
흑색 두건이 모험가 등급을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니다. 그만큼 경험도 많고, 실력도 있었다.
감 하나밖에 없는 쥐새끼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러니 결국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그만 투덜거리고 대충 어디 있을 거 같은지나 찍어 봐.”
흑색 두건이 지도를 내밀며 말했다. 쥐새끼가 지도를 보다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대충 저기로 가면 나올 거 같은디?”
“좋아. 왼쪽이군.”
쥐새끼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니, 난 오른쪽이라 했는데 왜 왼쪽이오?”
“전부터 말했지만 넌 진짜 표정에 다 드러난다니까. 일부러 반대로 얘기한 게 빤히 보여.”
“씨X.”
누가 B등급 아니랄까 봐 눈치도 존X 빠르네.
“그보다 물건들은 어디로 보냈냐?”
“그런 거 안 묻는 게 모험가 규칙에 있지 않던가? 2조 3항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지랄. 모험가한테 규칙이 어딨어?”
X새끼. 지가 먼저 규칙 운운했으면서, 쥐새끼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아르곤으로 보냈소.”
“아르곤? 거긴 기사들이랑 기간트 제작자만 대우해 주잖아. 거길 왜?”
“칼페온이나 겔리안은 뭐 다른가? 마법사만 대우해 주고 이종족만 대우해 주는 건 똑같지.”
“그래도 분위기란 게 있잖냐. 그 삭막한 곳을 왜 가?”
쥐새끼가 퉁명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든 돈 있으면 사는 거야 비슷비슷하지. 댁은 어디로 보냈길래?”
“당연히 겔리안이지. 이번 일 끝나면 은퇴하고 엘프 하나 꼬셔서 결혼할 거야.”
일하기 전에 저런 얘기 하는 사람치고 살아남은 사람 별로 못 봤는데. 느낌이 더 안 좋아졌다.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부터 빨리 레이튼을 떠야지 않소? ‘사자검’이랑 ‘바람의 마도사’가 라이언 가문 생존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 생존자였으면 보물고부터 챙기지 우리가 털 때까지 남아 있었겠냐? 그냥 소문이야.”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흑색 두건이 한숨 쉬었다.
원래 걱정이 많은 놈이긴 했는데, 오늘따라 과하다.
“걱정 마. 여기만 가 보고 바로 이 도시 뜰 거니까. 물건보다 우리가 더 일찍 도착할걸?”
“그럼 다행이오만…….”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의 쥐새끼를 보고 흑색 두건이 혀를 차다 앞을 보고 소리쳤다.
“저기! 저 동상 있는 곳 같은데?”
쥐새끼가 앞을 보자 돌문이 달린 동굴과 그 앞을 지키듯 서 있는 동상이 보였다. 지도에 나온 보물고가 맞는 것 같았다.
흑색 두건이 동상 가까이 다가갔다.
“꽤 수준이 높은데…… 최소 5성급 마법사가 만든 거야.”
“그 라이언 가문의 숨겨진 보물고인데, 6성급은 되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마법사 혐오하는 걸로 유명한 가문이었잖아. 그냥 5성급 마법사로 때웠을 수도 있지.”
흑색 두건이 동상 앞으로 가 섰다.
곧이어 동상의 눈에서 하얀빛이 나와 그를 관통했다.
[자격이 없습니다.]
“흠…… 마력 패턴을 인식하는 쪽인가. 조금 번거롭겠는데.”
“그럼 6성급이란 소리 아니오.”
쥐새끼가 눈살을 찌푸렸다.
“헛걸음만 했군.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차라리 잘됐다. 이 정도로 끝난 게 어디냐.
쥐새끼가 몸을 돌리는데 흑색 두건이 입을 열었다.
“잠깐. 마침 내가 딱 좋은 걸 가지고 있거든.”
“뭐 말이오?”
흑색 두건이 씨익 웃었다.
“마법사의 황혼.”
쥐새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마, 마법사의 황혼? 6성급 마법까지 무효화한다는 그거 맞소?”
“맞아. 암시장에서 100골드나 주고 구매한 물건이지.”
쥐새끼가 혀를 내둘렀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투자를 해 왔을 줄은 몰랐다. 100골드짜리 일회용 소모품을 사다니.
“이건 온전히 내 사비로 산 거 알지?”
“물론. 그 물건 가격만큼의 지분은 더 가져가야지. 불만 없소.”
모험가들의 불문율이다. 많이 투자하는 놈이 더 많이 가져간다. 당연한 얘기다.
흑색 두건이 씨익 웃고는 가루가 든 병을 꺼냈다.
쥐새끼가 그걸 보고 감탄했다.
“내 평생 100골드짜리 소모품을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나도 처음이야. 이번에 라이언 가문 턴 김에 전 재산 쏟아부었지.”
흑색 두건이 마개를 따서 안에 있던 가루를 동상에 뿌렸다.
“좋아. 이제 동상은 무효화 됐어.”
“그럼 이제 문만 따면 되겠구려.”
쥐새끼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준비해 왔을지는 몰랐다.
“문 따는 거야 쉽지. 기다려 봐.”
흑색 두건이 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동상의 눈이 떠지며 하얀빛을 내뿜었다.
[자격이 없습니다.]
“뭐, 뭐야?”
흑색 두건이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섰다.
“……사기당한 거 아니오?”
“그럴 리 없어! 누굴 병신으로 아나!”
흑색 두건이 이를 갈았다.
“마탑에서 인증까지 받았단 말이다! 마탑 새끼들이 돈은 존X 밝혀도 사기를 치지는 않아!”
쥐새끼가 씩씩거리는 흑색 두건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일단 거기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소.”
“닥쳐! 씨X 내가 여기 투자한 게 얼만데…….”
흑색 두건이 그렇게 외친 순간. 다시 동상의 눈에서 나온 하얀빛이 그를 관통했다.
[자격이 없습니다.]
[세 번의 검사 모두 불통과.]
[침입자로 판정.]
[격퇴합니다.]
동상의 눈에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