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
“네? 보물고가 털리다뇨?”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라이놀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다 타냐 스트라우드를 발견했다.
“저 애는 누구야?”
“음…… 제 친구예요.”
“친구?”
할 말이 궁해서 대충 둘러대자 라이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그 옆에 있던 타냐 스트라우드의 어이없는 눈동자는 덤이다.
왜? 뭐? 나이 비슷하면 친구지. 속 나이야 어떤지 몰라도. 자이어 테르베로츠 제외.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다린은 왜 저래?”
라이놀이 주저앉아 있는 다린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었단 말이야?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보물고가 털렸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음…….”
라이놀이 타냐 스트라우드 쪽을 살짝 살폈다.
“조금 비밀스런 얘기가 될 텐데, 미안하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야?”
“어떤 얘기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은데요. 제가 짐작하는 내용이 맞다면, 괜찮을 거예요.”
비밀 스케일로 치면 저쪽이 몇 수는 위거든. 일개 귀족 가문 보물고가 털린 거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라이놀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이 얘기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까. 다린, 이상한 짓 그만하고 여기 앉아 봐.”
“이상한 짓이라니! 이 상처 안 보여?”
“침이나 발라. 지금 내 얘기 들으면 그런 건 신경도 안 쓰일 테니까.”
“어떤 내용이어도 내 손가락에 난 피에 비할 수는…….”
“보물고가 털렸어.”
“뭐!”
다린이 벌떡 일어났다.
“내 돈!”
“네 돈은 아니지만…… 뭐 어쨌든 그래.”
라이놀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행히 털린 쪽은 가문에서 표면적으로 운영하던 보물고야. 금액으로 치자면 크지만, 정말 중요한 물건들은 따로 있지.”
“어쨌든 우리 돈이잖아! 범인은?”
“아마 모험가들 같은데…… 확신은 못 해.”
다린이 방방 뛰었다.
“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 이젠 주인 있는 물건도 탐낸단 말이야?”
“생존자가 없는 줄 알았을 수도 있지. 실제로 우린 가문에서 제명된 지 오래니까.”
“지금! 여기! 살아 있잖아!”
“제명되었으니 사실 가문의 생존자라 주장하기 힘들기도 하고.”
“왜 계속 걔네 편들어!”
라이놀이 한숨 쉬었다.
“편드는 게 아니고 사실을 얘기하자는 거지. 그런 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어.”
“어떻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
“털린 보물고에 중요한 물건들 숨겨 둔 보물고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가 있었어.”
“흐어억…….”
다린이 기괴한 신음 소리를 냈다.
리액션 좋은데. 저 정도면 대화할 맛 나겠다.
게임에서는 저렇게 리액션이 좋은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이것도 자이어 테르베로츠 같은 예외 상황인 걸까. 아니면 내가 끼어들면서 성격이 변한 걸까. 그냥 예외 상황으로 치자.
“어, 얼른 지키러 가야지!”
“진정해. 그쪽은 자격 없는 사람은 격퇴하는 던전 형식의 보물고니까, 그리 쉽게 털리진 않을 거야.”
“그건 다행인데…….”
“문제가 있긴 하지만.”
“또 무슨 문제?!”
다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 말한 것과 같아. 우린 가문에서 제명당한 지 오래니까, 아마 동시에 보물고에 접근할 자격도 박탈당하지 않았을까?”
“내 돈을 터는데 함정까지 뚫어야 한다는 말이야?”
“일단 내 돈을 ‘턴다’는 표현부터 잘못됐지만…… 그런 소리야.”
저 둘의 가문은 검술로 이름 높은 백작가.
그런 가문에서 만든 던전 형태의 보물고라면 추정 등급 B는 될 거다. 최소 3등급 기사는 필요한 수준. 둘의 실력으론 무리다.
“…….”
사실, 둘을 만나고 계속해서 든 의문이 있다.
라이놀과 다린.
너무 약하다.
물론, 저 나이에 B등급 용병에 오를 수준이면 대단한 재능인 건 맞다. 하지만 이 세계관에서 용병이란 건, 생각처럼 강자가 아니다.
그 드물다는 A등급 용병이라 해 봤자 4등급 기사 수준. 그것도 제대로 붙는다 치면 대부분 4등급 기사의 손을 들어 줄 거다. 마력 수준은 비슷할지 몰라도 검술에서 상대가 안 되니까.
그러면 B등급 용병은 어떤가?
5등급 기사 수준이다. 기사 끝자락. 그 정도로도 대단한 건 맞지만, 사실 둘과 비슷한 나이에 5등급 기사가 되는 귀족가 자녀들은 생각보다 흔하다.
2부 본편 시점의 둘의 모습과 너무 큰 차이가 난다.
7년밖에 안 남았는데도.
이유가 뭘까? 나는 그 7년 사이의 둘의 행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설정에 나오는 정보도 아니라는 소리다.
설정의 공백기.
그 순간 라이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력 심법……?’
후견인이 되겠다며 했던 말. 분명 마력 심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었다.
후견인 얘기에 정신이 팔려 생각 못 했지만, 마력 심법도 익히지 않은 채 저 나이에 B등급 용병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미친 재능.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마력 심법도 없이 저절로 쌓이는 마력만으로 B등급 용병이 되었다면, 제대로 된 마력 심법을 익히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7년간의 설정 공백기.
그 기간 동안 가문의 보물고에서 마력 심법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익혔다면?
가능하다.
3년. 아니, 2년만 있어도 본편 시점의 무력을 달성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동방의 마지막 용’에 버금가는 재능 아닌가?
“모험가 놈들도 던전을 통과할 실력은 안 돼. 그 전에 자격을 얻을 방법을 찾는 수밖에.”
“그, 그럼 내 실험실은……?”
“포기해야지.”
“아, 진짜!”
다린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야 현장직 탈출하고 우아하게 연구 집중할 수 있을까 했는데! 모험가, 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 다 조져 버릴 거야!”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래. 레이튼에 있는 모험가들 전부 족쳐 보자. 그중 하나는 보물고 턴 놈이겠지!”
“잠깐만요.”
라이놀이 다린을 진정시키려는 순간, 내 목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보물고……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 *
[자격이 없습니다.]
“…….”
“리안. 해결법은?”
몰라. 묻지 마. 스트레스받아.
숨겨진 보물고가 위치한 안데스산맥.
다린과 타냐는 집에 남겨 두고 라이놀과 둘만 온 참이다. 거리가 꽤 멀기도 했고, 보물고가 열릴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길 정말 다행이다.
방금 입구 컷 당한 참이니까.
……너무 쉽게 생각했나?
솔직히, 따로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게 아니었다. 단순히 가문에선 제명당했어도, 보물고의 자격은 유지됐을 거라 생각했다.
“…….”
이게 진짜 단순한 생각 같아 보이지만, 사실 라이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라이놀이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자격도 안 되는 보물고를 억지로 털 성격이 아니니까.
그나마 타협하고 나에게 밀어주기로 한 것도 이미 털린 표면적인 보물고 쪽이다.
거기에 있던 건 금화, 영초, 조금 좋은 무구 정도.
거기가 타협의 마지노선.
사실 이 정도로도 대단한 거다. 다린도 그 이후로 항상 얘기하지 않았던가. 털자고 그렇게 조를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나 한 번 보더니 눈 돌아가 버렸다고.
“리안?”
“잠시만요. 이상하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천천히 생각해.”
라이놀이 기대치 않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씨X, 민망한데.
괜히 여기까지 오자고 해서 망신살만 뻗쳤다. 라이놀한테는 미안하지만, 대충 생각하는 척하다 돌아가야겠다.
아니, 그럼 대체 게임에서는 어떻게 강해진 거야? 어디서 기연이라도 받았나? 젠장, 그런 거라면 내가 끼어든 탓에 꼬였을 수도 있겠는데.
라이놀이 강해지는 계기가 이 보물고가 아니라면 기연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나 때문에 스토리가 꼬여서 기연을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채워 줘야 하는데, 뭐가 있지? 일단 지금 시점에서 얻기 쉬운 건 없었다.
“하아…….”
후회막심이다.
레이튼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라 돌아가는 데도 한참 걸린다. 며칠은 야영해야 한다는 소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해 본 경험에 따르면, 그건 진짜 웬만해서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초인’ 특성 덕분에 땅바닥에서 자든, 날씨가 얼마나 춥든, 덥든 불편함은 못 느끼지만, 그냥 야영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X같음이 있다. 지구에서 하는 캠핑 같은 것과는 다른 종류.
일단 벌레 우는 소리, 고블린 놈들 떡 치는 소리, 별에 별소리가 다 들린다. ‘초인’ 특성 덕에 더 잘 들린다. 마치 입체 서라운드 같다.
고블린 떡 치는 소리를 입체 서라운드로 듣고 있자면 깊은 현타가 몰아치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벨리아 대륙 전기는 이런 게 아닌데…….
“씨X. 뭘 꼬라봐?”
입구에 저 돌덩이.
저 새끼도 마음에 안 든다. 지가 뭔데 사람을 판단해? 멍청한 덤덤새끼.
“…….”
스트레스받으려니 온갖 걸로 다 받는다. 대충 시간도 때웠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해야겠다.
라이놀을 부르려는 순간.
돌덩이에 떠 있는 코드에 눈길이 갔다.
[MON-3-B]
몬스터 3번 유적 방어형 몬스터. B타입.
마법사가 만든 제작물로, 사실 몬스터보단 사역마에 가까운 존재다. B타입이면 싸워서 1분 안에 박살 날 자신이 있다. 내가.
입구 몬스터가 이 정도면 내 예상보다 등급이 높을 수도 있겠다.
진짜 아까운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제대로 한번 생각해 보자.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코드 능력으로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UNLOCK.'
[현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
닫힌 문을 여는 치트 코드.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는 처음 봤다. 코드 능력도 만능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던 남자의 성별 코드를 여성으로 바꾸는 것도 실패했었다. 그땐 그냥 포인트 부족이겠거니 여겼는데…….
기준을 모르겠네.
나한테만 적용이 가능한 건가? 아니다. 육포를 고기 수프로 바꾸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으니까.
치트 코드 사용과 생명체 코드의 수정이 불가능한 건가? 아니다. 사실, ‘초인’ 특성을 얻은 것도 치트 코드에 가깝다. 생명체는 애매하지만, 수정 가능한 것도 있었으니까.
현재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거는 나중엔 사용 가능하다는 소린가?
모르겠다.
기준이 워낙 제멋대로라.
“머리 터지겠네.”
코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문을 열 방법부터 고민하자.
치트 코드를 제외하면 문을 열 방법이 뭐가 있지?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
“AE 코드!”
입장 자격 코드.
나중에 코드를 정리하면서 안 쓰게 된 코드 중 하나다. 워낙 오래된 코드다 보니 이제야 떠올랐다.
‘AE 코드를 출력.’
속으로 생각하자 나와 라이놀의 위에 코드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AE-192-N]
192번 문 입장 거부 상태.
저 N을 Y로 바꾸면 게임 끝이다.
‘코드 N을 Y로 변경.’
[AE-192-N] > [AE-192-Y]
[코드 변경에 2,0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내가 가진 포인트는 총 1,500포인트.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포인트가 길을 막는다.
얼마 전에야 겨우 얻은 포인트가 500점.
안의 보물이 탐나긴 해도 2,000점은 망설여진다. ‘초인’ 특성 얻는 데도 4,000포인트로 충분했는데.
역시 포기하는 수밖에 없나?
그냥 돌아가려는 찰나,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라이놀을 바라봤다.
[AE-192-N] > [AE-192-Y]
[코드 변경에 50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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