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
떠오른 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포인트 획득 방법이 뭔지 한참을 고민했는데, 이런 데서 갑자기 해결 방법이 나오다니.
최악의 경우, 포인트 획득 방법이 없을 거라는 가정까지 했었다. 몬스터를 잡아도, 눈에 띄는 활약을 해도 포인트 획득은 없었으니까.
라이놀과 다린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포인트 획득은 없었는데. 그 정도로 주요 인물이 아니어서인지, 직접 행동을 해야 획득 가능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타냐 스트라우드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순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했다.
포인트 획득 창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17살 될 때까지 같이 다니자 했던가?
……경계심 가질 만도 하군. 나 같아도 처음 보는 놈이 그런 얘기하면 의심부터 하고 보겠다.
저 녀석 상황이나 이 도시가 레이튼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 이건 내 잘못이다. 너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난 21세기 현대인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지만, 엎질러진 물을 빨아들이는 청소기 정도는 사용 가능한 현대인.
“이상하게 듣진 말고. 내가 동대륙에서 관상을 좀 익혔는데, 너 올해 사주팔자에 살(煞)이 껴 있어.”
“엄청 이상하게 들려.”
그렇겠지.
“그게 사실이라 해도 네가 나랑 같이 다닐 이유가 뭐 있는데?”
“그냥 내가 또라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 좀.”
귀찮아져서 인상을 찌푸렸더니 타냐 스트라우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시X, 내가 애 데리고 뭐 하는 거냐. 요즘 나잇값 너무 못 한다 진짜.
나는 한숨 쉬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너 데리고 뭘 하겠냐? 뭐 24시간 붙어 있자는 것도 아니야. 그냥 짬 될 때 같이 다니자고.”
“…….”
“너도 어차피 대가로 내놓을 거 없잖아.”
타냐가 푹.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좋아.”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걸을 순 있겠냐?”
“……어떻게든.”
그녀가 일어서려다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부축하러 다가가니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혼자 일어설 수 있어.”
“……그래라. 서두르진 말고.”
타냐 스트라우드는 몇 번씩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자신의 힘으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 쉰 다음 옆에서 보폭을 맞춰 같이 걸었다. 스스로 서고자 하는 사람을 도울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고집 센 게 다루려면 고생 좀 하겠다.
* * *
“저기 좀 누워 있어 봐.”
“…….”
거실의 소파를 가리키자 타냐가 아무 말 없이 다가가 누웠다. 아니, 쓰러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그러게 고집 좀 작작 부리지.
“치료해 줄 사람 불러올 테니까 좀 기다려.”
대답을 듣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라이놀은 아무래도 나간 것 같지만, 다린……은 내가 이 집에 온 이후로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늘도 당연히 있겠지.
“다린! 있어요?”
“리안? 벌써 다녀왔어?”
아니나 다를까 금세 다린이 튀어나왔다. 양반은 못되겠네.
“죄송한데 힐링 포션 남는 거 있어요?”
“무슨 일인데? 다쳤어? 어디 봐봐.”
황급히 다가오는 다린을 손사래 쳐 막았다.
“아뇨, 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다친 애를 데리고 와서…… 포션 값은 나중에 갚을게요.”
“……뭐? 다친 애는 어딨는데?”
“밑에요.”
다린이 작게 한숨 쉬더니 나를 흘겨본다.
“너도 오빠 과였어?”
“라이놀이 왜요?”
“오빠도 이럴 때 자주 있거든. 리안, 너는 그런 성격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간다. 라이놀 설정을 보나 성격을 보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 레이튼에서 애들 불쌍하다고 하염없이 돕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할 거다. 그걸 중간에서 조절하던 게 다린일 테고. 하지만 내가 타냐를 데려온 건,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한 번만요.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일단 내려가서 보자.”
“네.”
다린을 뒤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밑으로 내려와 보니 녀석이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몸이 한계에 도달했나 보다.
다린이 녀석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누가 애를 이렇게 때린 거야? 성한 데가 없네. 업고 왔어?”
“아뇨, 자기 혼자 걸어왔어요.”
“뭐? 저 몸으로?”
“부축해 준다 해도 끝까지 혼자 걷겠다고 하더라고요.”
다린이 이마를 짚었다.
아마 속으로 ‘요즘 꼬맹이들은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건 포션으로 될 문제가 아니야. 정확히는, 너무 많이 들어. 안 다친 곳이 없어서 고치려면 포션으로 목욕이라도 해야 되겠다.”
“그냥 마시는 거 아니었어요?”
“……리안, 너는 이상하게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이런 상식 부분을 모르더라. 외상에는 발라서 치료해야지.”
게임에서는 그냥 ‘사용 키’ 누르면 끝인데 알 수가 있나. 딱히 외상에는 발라야 한다든가 그런 복잡한 설정을 넣은 기억도 없다.
그딴 설정 있으면 귀찮아서 누가 게임을 해?
“어쨌든, 이렇게 다쳤으면 포션보다는 신전에 가서 신관 불러오는 게 낫겠다.”
“신전이라…….”
나도 신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문제는 돈이지. 신관을 부르려면 돈이 든다.
다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거야?”
“1골드만 빌려주세요.”
“…….”
다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 나한테 돈 맡겨 놨니?”
“그럼 설마 애를 저렇게 놔둘 생각이에요? 저는 다린이 성품이 거기까지 떨어지진 않았다고 믿어요.”
“저 정도면 다 컸지! 칼잡이들이나 애 취급하지 원래는 성인이야!”
“라이놀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윽…….”
간결하고 간접적인 협박.
라이놀한테 말하면 일이 커지면 커졌지, 1골드론 안 끝날 거다. 진짜로 포션 목욕을 시킬지도 모르는 일.
“그냥 1골드 주세요.”
“……여, 연구할 때 써야 하는데.”
“나중에 갚을게요.”
“……언제?”
대답하지 않고 다린이 떨리는 손으로 건넨 골드를 쥐어 잡았다.
“전 신관 불러올 테니까 쟤 일어나면 씻으라고 좀 해요. 저래선 없던 병도 생기겠네.”
“언제 갚을 거냐니까!”
끼이익. 쿵.
다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방금 뭔가 데자뷰 같은 게 느껴졌는데, 착각이겠지.
그보다 문제는 신전이다.
설정상 레이튼에 있는 신전은 최소 10개가 넘는다. 지금에야 망해서 빌빌거리지만, 명색이 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숫자라 할 수 있다.
그 많은 신전 중 최고는 벨리아 대륙의 주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종족 신 ‘키탄’의 신전.
“…….”
키탄. 게임 엔딩에서 ‘미안.’이니 뭐니 하던 그놈이다.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볼 거야 많았지만, 지금은 꿈도 못 꿀 일.
이 시기 키탄의 신전에는 ‘황금 십자가’ 아리나도 있을 테니 언젠가 가야 하긴 하지만…… 지금은 무리다. 1골드로 출장까지 나올 놈들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다친 곳은 많지만 하나같이 심한 상처는 아니다. 아무 신전이나 상관없겠지.
* * *
신관과 동행해 돌아오자 다린이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뭐지.
“왜 그래요?”
“쟤, 쟤, 쟤가…….”
다린이 울상을 지으며 구석을 가리켰다.
“쟤가 씻기는 중간에 깨어나더니 날 물어 버리잖아!”
“허어…….”
구석을 보자 타냐 스트라우드가 웅크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색빛 머리카락.
씻기 전에는 검은 머리카락이었는데, 일부러 숨긴 건가? 드문 색의 머리이긴 하다.
남장에 염색까지.
신분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나이를 생각하면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애잖아요. 다린이 이해해요.”
“성인이라고! 치료하라고 돈도 주고, 씻겨 주기까지 했는데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그러게 왜 정신 잃은 애를 맘대로 씻겨요? 나 같아도 일어났는데 모르는 사람이 씻기고 있으면 깜짝 놀라겠네.”
“네, 네가 시켰잖아!”
이게 무슨 소리야.
“일어나면 씻으라 전해 달라고 했지, 씻기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어…… 그, 그랬나?”
“애초에 누가 저만한 애를 씻겨요? 지가 알아서 해야지.”
“그, 그건 그런데…… 보통은 욕탕이 뭔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자애들 씻기는 건 내 담당이었는데…….”
본인도 황당한지 말이 늘어진다. 하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제국 멸망 전, 집에 욕실이 있던 건 귀족뿐. 대다수가 평민 출신인 고아들은 씻는 법도 모르는 일이 많았을 거다. 설마 라이놀이 여자애들까지 씻기진 않았을 테고, 그쪽은 다린이 맡았었겠지.
타냐 스트라우드는 황족 출신이니 필요 없는 참견이었지만, 다린이 그런 사실까지 알진 못했을 거다.
그보다, 꽤 완벽한 남장이었는데 바로 눈치챘다는 건가?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씻었으면 됐지 뭐.
굳이 대꾸하지 않고 구석에 있는 타냐 스트라우드에게 손짓했다.
“너 치료하러 오신 신관분이니 치료 받아.”
“신관?”
타냐 스트라우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 온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눈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황궁 나온 후로는 뒤통수만 맞고 지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라 해야 하나. 사실 그런 거 아니더라도 의심할 만하다. 신관은 돈이 많이 드니까.
“나한테 말하지 말고 저기, 다린한테 얘기해. 돈 낸 건 저쪽이니까.”
아직도 울상 짓고 있는 다린을 가리켰다.
타냐 스트라우드가 그 모습을 보고 망설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단 손을 문 거는 미안해.”
“왜 사과받는 기분이 안 들지? 꼬마야, 존댓말은?”
언제는 성인이라더니 이제는 꼬마란다. 기준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난 평생 존댓말 해 본 적 없어. 부모님 빼고.”
“그럼 지금 해!”
“왜 애랑 말싸움을 해요?”
“말싸움 아니야! 정당한 권리지!”
“너도 제대로 고맙다 하고.”
“고마워.”
시원스런 반말에 다린이 어이없는 기색으로 주저앉았다.
어느 쪽이든 조용해진 건 다행이다. 옆에서 머쓱하게 있는 신관의 눈치가 보이던 참이니까.
“죄송합니다, 신관님. 조금 지체됐지만, 저 녀석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예. 물론이죠. 어머니 가이아의 은혜는 모두에게 평등하니까요.”
지랄. 1골드나 받아 처먹은 주제에.
어머니 가이아의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지 몰라도 신관들은 사람을 가렸다. 돈이라는 기준으로. 먹고살기 위해 그런다기엔 너무 많이 받아 처먹는다.
그런 내 감상과 별개로 확실히 받은 돈값은 했다. 신관의 치료 한 번에 타냐 스트라우드의 상처가 깔끔히 사라졌으니까.
“일단 외상은 거의 치료됐습니다만…… 내부에 가해진 충격도 있으니 당분간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야, 너도 인사드려.”
내 말에 타냐 스트라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돈 내고 치료받은 건데 왜 인사를 해?”
“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다니, 대견하다!
속은 시원했지만, 사회생활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칭찬하는 대신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신관을 가리켰다.
얘가 뭔 잘못이겠니.
“어쨌든 널 위해서 와 주신 분이야. 인사드려.”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가 한참 입술을 비죽이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래도 꼬박꼬박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보면 다루기 쉬운 거 같기도 하고.
“하하,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가는 신관을 배웅하고 돌아섰다.
어쨌든 신관은 마법사보다도 고급 인력이다. 잘 보여 두면 나쁠 일은 없다.
끼이익. 턱.
그때. 뒤돌아서 들어가는데 닫히던 문이 잡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라이놀이 문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놀, 어디 다녀와요?”
내 질문에도 라이놀은 대답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무슨 문제 있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라이놀이 곧 입을 열었다.
“……보물고가 털렸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