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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0화 (10/225)

너의 코드가 보여 (10)

타냐는 여름이 싫다. 날씨 탓만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불행한 일은 모두 여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8살이 되는 해의 여름에 그녀는 불타는 황궁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가 9살이 되는 해의 여름에는 그녀를 데리고 나온 대부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16살이 된 지금.

상납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죽도록 맞고 있는 지금도 여름이다.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본인을 포함해서 전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이게 전부 그 빌어먹을 저주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푸른 혈맥의 저주.

제국을 침략한 세 왕국이 싫다.

황가의 희생을 모르는 인간들이 밉다.

아버지를 죽인 대부가 증오스럽다.

세계가 곧 멸망할 것도 모른 채 멍청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혐오스럽다.

그렇게 마음 놓고 원망하고 싶다가도 이 빌어먹을 저주 때문에 이해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세 왕국이 침략한 것은 제국이 마석을 독점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국이 마석을 모으는 이유를 모르는 건 그들이 숨겼기 때문이다. 대부가 아버지를 죽인 건 수백만의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멸망 앞에 절망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황가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주는 것도 없는 이 빌어먹을 푸른 혈맥의 저주는 그녀의 마음을 파먹고 있었다.

“이런! 씨X! 놈이! 상납금을 안내?”

퍽! 퍽!

올라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상대를 바라봤다. 흔하디흔한 양아치다.

검술도 모르고, 마법도 모르는 일반인.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그런 일반인도 이길 수 없는 무능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싫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저주가, 본인에겐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상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죽여.”

“뭐?”

“살아 있으면 반드시 너 죽여 버릴 거니까 지금 죽이라고.”

“이, 이놈이……?”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기백에 눌린 것이다. 꼬맹이 상대로 잠깐이지만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남자가 흥분했다.

“이 고아 새끼가…… 그래, 소원이면 죽여 주마!”

남자가 발길질을 하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걷어차려는 순간.

턱.

“그만하지?”

언젠가 본 꼬맹이가 그의 발을 막고 있었다.

* * *

[타냐 스트라우드]

성별: 여

나이: 16

설명: 제국 카디안의 황녀. 1부 주인공 ‘미친개’ 아이언의 수양딸이기도 하다. ‘푸른 혈맥’을 타고났으나, 두드러지는 능력은 없다. 바이론에게 ‘푸른 혈맥’이 들통나 살해당한다.

내가 만들었던 캐릭터 시트의 내용이다.

멸망한 제국의 황녀, 주인공의 수양딸, ‘푸른 혈맥’을 타고났다는 설정까지.

사실, 주연급 캐릭터가 당연할 정도의 포지션이다. 2부에서 제일 중요한 ‘이계의 침공’ 떡밥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고.

문제는 게임 2부 시작 시점 훨씬 이전에 이미 사망한 캐릭터라는 것.

라이놀과 다린을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이 반가움이고, 자이어 테르베로츠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 무덤덤함이라면, 타냐 스트라우드를 보고 느낀 감정은 약간의 죄책감이다.

지금까지 만난 캐릭터들은 최후가 비참할지는 몰라도, 게임에 등장해 활약한 캐릭터. 반면, 타냐 스트라우드는 온갖 고생을 하다 바이론에게 살해당했다는 서술 한마디가 끝.

제작자로서 아픈 손가락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능력 부족으로 써먹지 못한 캐릭터.

타냐 스트라우드는 바이론에게 죽는다. 지금 죽을 것 같이 맞고 있지만, 죽지는 않는단 소리다.

그러니 다른 일처럼 외면해도 무방하지만.

턱.

“그만하지?”

“뭐야?”

그럼에도 참견한 이유는 그녀가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내 1차 목표는 강해지는 것. 이건 수단이다.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든, 찾지 못하고 벨리아 대륙에 남든 최소한의 조건이란 소리다.

둘 중 하나를 정하라면 당연히 지구로 돌아가는 쪽이다. 벨리아 대륙보다 지구가 좋다든가 하는 1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엔딩대로라면, 벨리아 대륙은 멸망하니까. 원래 스토리대로 흘러간다면 나도 막을 자신 없다.

그래서 혹시나의 보험. 즉, 변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타냐 스트라우드는 좋은 변수가 되기 딱 어울리는 인물이다. 일단 제국 황녀에다 미친개 아이언, 1부 주인공의 수양딸 아닌가.

게다가 황제가 동대륙으로 보내 둔 기사들.

게임에선 뿔뿔이 흩어져 하나씩 죽어 간 그들을 하나로 뭉칠 수도 있을 테고, 주인공 그 또라이 새끼도 어느 정도 제어가 되겠지.

……되겠지?

정신이 외장형인 인간이기는 하지만 인성이 그른 건 아니니까. 수양딸 구해 준 인간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 거다. 않을 거라 믿는다.

그때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너 이 새끼…… 뒤진 줄 알았더니, 어디 숨어 있었냐?”

“……아재도 나 알아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생각나는 구석이 없었다. 숲이나 훈련장 쪽에서 본 용병이면 대충 알아봤을 텐데.

이 세계 온 지 끽해야 열흘 정도 됐는데 이 큰 도시에서 나 알아보는 인간은 왜 이리 많은지,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만.

혹시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뭐? 아재?”

남자가 발을 빼며 헛웃음을 지었다.

“상납일도 무시하고 도망치더니, 간을 어디다 빼 놓고 왔나?”

“상납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알던 사이인가? 가만 보니 어디서 본 얼굴 같기도 하고…….

“어딜 모른 척이야? 이 새끼 마침 잘 만났다. 너도 같이 좀 처맞자.”

남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이 새끼 왜 지랄이지 황당해서 쳐다보는데 그 발 각도가 좀 익숙했다.

언젠가 처맞아 본 것 같은 각도.

훈련장이나 숲에서 만난 놈이라면 나한테 저럴 순 없다. 마탑에서 만났던 아재같이 숨기 바쁘겠지.

생각해 보니 상황도 언젠가 본 거 같이 익숙했다. 상납일, 상납금, 맞고 있는 고아…… 시X, 이거 기억난다.

“지금 보니 내 첫날 아침을 상쾌하게 선물해 준 새끼구나?”

“뭐? 첫날? 그건 뭔 개소리냐?”

“알 건 없고 일단 좀 처맞자.”

찾기는 내가 더 애타게 찾았다, 시X새끼.

* * *

“그래서, 내 이름도 모른다고?”

“……네. 얼굴은 외워도 이름은 굳이 안 물어봅니다.”

“흐음…….”

내가 들어오기 전의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 새끼.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꽤 오래전부터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 말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상납금은 어디서 얻는지 꼬박꼬박 냈다는 것.

그 외에는 이름, 나이 등등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 내 성별이라도 아느냐 물었는데 ‘……혹시 여자였습니까?’ 묻는 거 아닌가. 쓸모없는 새끼.

“일어나.”

“네!”

남자가 순식간에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또 이런 광경 보이면 진짜 뒤진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러더니 스리슬쩍 몸을 뺀다.

이 새끼가 어딜 가려고.

“어디 가냐?”

“예? 저, 저는 정말 더 아는 게…….”

“아니, 질문은 됐고. 아는 것도 없는 새끼가.”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상납일이잖아.”

“예?”

“상납일. 상납금.”

“…….”

남자가 눈치를 보며 주머니에서 10실버를 꺼냈다.

“이게 다야?”

“네…… 네. 정말 그게 답니다. 믿어 주십쇼!”

“이런 거지새끼가.”

“죄, 죄송합니다.”

돈이라도 좀 많이 들고 있었으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10실버에 넘어가기에는 나에게 가해진 정신적 충격이 너무도 컸으니까. 합의금은 원래 피해자가 정해야 하는 거다.

“저기 ‘용병의 거리’에 가면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있는데 본 적 있어?”

“그…… ‘사자검’과 ‘바람의 마도사’가 사는 곳 말씀이십니까?”

“오, 잘 아네. 그래 거기. 오늘부터 2주에 한 번 거기로 20실버 상납하러 와.”

“……네?”

“못 들은 척하면 죽는다.”

남자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20실버는 무립니다. 저도 5실버밖에 안 받았는데…….”

“애들 코 묻은 돈 뺏는 거랑 같나? 어른이면 두 배는 들고 와야지.”

“……5실버 두 배면 10실버인데요.”

이 새끼 또 정신 못 차리고 말대꾸하네.

한 대 더 때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내일부터 열심히 돈 벌어야 하는데 몸이라도 성해야지.

대신 나는 아직 쓰러진 채로 하늘만 보고 있는 타냐 스트라우드를 가리켰다.

“애를 저렇게 패 놓고 책임은 안 지게? 쟤 몫까지 줘야지.”

“근데 그걸 왜 선생님께서…….”

“쓰읍. 말이 많다.”

남자가 울상을 지었다. 왜 이렇게 내 앞에서 우는 남자가 많은 걸까.

“그래도 20실버는 정말 무리입니다…… 솔직히, 제가 그 돈 있으면 왜 애들 삥이나 뜯고 다니겠습니까?”

“그건 알아서 해야지. 귀부인한테 몸을 팔든, 구걸을 하든. 상납일까지 돈 안 가져오거나 내 눈에 거슬리는 일 하다 걸리면 뒤진다고만 알아두고.”

“……눈에 거슬리는 일이라는 건 뭡니까?”

“항상 그게 뭘까 유념해 가며 살았으면 좋겠어.”

남자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그래도 별로 불쌍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게 누가 애들 삥이나 뜯고 다니래?

“이제 가 봐. 혹시 숨을 자신 있으면 숨어도 되고. 걸리면 두 번째 기회는 없겠지만.”

“…….”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쓰러져 있던 타냐 스트라우드 근처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냐?”

“…….”

타냐 스트라우드는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려는 것 같다. 나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타냐 스트라우드는 입을 열었다.

“도와준 건 고마워. 근데, 노렸다면 미안하지만 난 줄 수 있는 게 없어.”

“걱정 마라. 어딜 봐도 받아 낼 거 없어 보이니까.”

“……그럼 왜 도와줬는데?”

이유야 많다. 제국의 황녀라는 거, 주인공이 대부라는 것, 푸른 혈맥의 소유자 등등. 그중에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냥?”

“그래.”

타냐 스트라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튼에 그냥은 없어.”

“그럼 네 꼬라지가 하도 불쌍해 보였다고 해 두지 뭐.”

“제대로 말해.”

타냐 스트라우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제 딴엔 위협이라 한 거 같은데, 맹수보다는 유기견 같다.

“대가 없는 호의는 받을 생각 없어.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너 지금 몇 살이냐?”

“……16살이야.”

별로 안 좋은데.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타냐 스트라우드는 16세의 나이에 바이론에게 살해당한다.

즉, 몇 개월 안 남았다는 소리다.

“대가 생각났어.”

“……뭐야?”

“17살 될 때까지만 같이 다니자.”

“뭐?”

띠링!

그 순간 경쾌한 알림 소리가 들렸다.

[스토리 분기! / 제국의 마지막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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