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9화 (9/225)

너의 코드가 보여 (9)

끼이익.

꼬마가 나가는 모습을 본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올라가 보게.”

“네.”

조수는 이미 몇 번씩이나 올라갔지만, 귀찮은 기색 없이 신발을 벗고 측정기로 올라갔다.

사안의 중요성을 아는 탓이다.

혹시라도 기계 고장이면 그녀는 X된 거다.

[64]

“……다시 묻는 게 되지만, 자네 작년 측정 결과가 몇이었다고?”

“72요. 많이 줄었네요.”

“그래도 허용 가능한 오차지. 운동했나?”

“……교수님 연구실까지 오르내리다 보니…….”

“크흠. 건강한 건 좋은 거지. 마력만 장땡은 아닐세. 엘프도 그리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도 신체 능력 허접해서 빌빌대지 않나? 정도가 중요한 걸세 정도가.”

“…….”

그 말에 조수가 차갑게 쏘아보자 노인이 눈을 피했다. 그가 생각해도 요즘 조수를 너무 부려먹기는 했다.

“그건 그렇고, 저런 체질이 있다는 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론 처음 보는군.”

“저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요, 측정기가 안 받는 체질도 있나요?”

조수의 말에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흔한 얘기는 아니지만, 측정실을 담당한 그의 조수로서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노인은 화를 내는 대신 친절히 입을 열었다. 조수의 측정값이 1년 만에 8이나 떨어질 정도로 부려먹었다는 게 생각난 것이다.

“숫자가 높게 나오는 건 처음일세, 숫자가 안 나온다거나, 숫자가 계속 바뀌는 경우는 가끔 있다더군.”

“그래도 고장은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고장이었으면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하기도 싫거든요.”

조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부터 고장이 난 건지 확인하고, 고장 난 이후의 측정자들 불러서 재측정 시키고…… 그러고도 원래 측정 결과보다 낮게 나온 사람에게 욕을 바가지로 처먹었으리라.

안 그래도 일거리 천진데 기계까지 고장이었으면 그녀의 머리는 터져 버렸을 거다.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 실체의 의미로.

그녀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숫자가 높게 나오는 경우는 처음이라면서요? 혹시 체질이 아니라 진짜 168인 건…….”

“……자네 마법사 맞나?”

“네?”

노인이 한숨 쉬었다.

아무리 어릴 때 배우는 기초 과정이라지만 이런 것까지 까먹을 줄이야.

특이체질의 인간은 워낙 드문 만큼, 모른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기초 과정까지 모르는 건 심하지 않은가.

“‘마력의 기초에 대한 이해’만 봐도 나오지 않나. 인간의 몸으로 100을 넘길 수 없다고.”

“어……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요?”

조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마법사는 마력 패스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다 보니 별 관심 없이 넘겨 버린 것이다.

“측정기가 발명된 100년 전부터 깨지지 않은 최고기록이 98일세. 그것도 갓난아기 기록이지. 제국을 건국한 그 ‘해방 왕’조차 100을 못 넘겼으리라는 게 학자들 중론이고.”

“아, 그랬던 것 같기도…….”

“아무튼, 인간은 절대 100을 넘길 수 없네. 엘프 중에선 가끔 나오긴 한다더군. 그것도 150을 넘긴 적은 없지. 168은 나올 수 없는 수치야. 절대.”

말을 마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조수를 바라봤다. 고생한 건 고생한 거고, 이런 것도 모르면서 뭘 배운단 말인가?

“자네는 오후 테스트 끝나고 연구실로 좀 오게.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겠군.”

“앗…… 아아.”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괜히 물어봤다. 조수는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 * *

“평민. 검사는 끝났나?”

“끝나긴 했는데…… 너 안가냐?”

“기다린 게 당연하지 않은가. 멍청한 평민.”

……그러니까 네가 날 왜 기다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꼬맹이랑 말다툼하다가 다시 자괴감 오지게 올 것 같아서다.

“그래서, 평민 측정 결과는 몇이나 나왔나. 30은 나왔나?”

“비슷하게 나왔어.”

“쯧쯧. 멍청한 평민. 그러게 신체 단련은 왜 해 가지고.”

“그러게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기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저런 말투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5골드 환불받았다!

내가 특이체질이라 판단한 노인이 돈을 돌려줬기 때문이다. 측정은 측정대로 하고, 돈은 돌려받고. 돌도 안 던지고 새 두 마리 잡은 꼴 아닌가.

저딴 거 한 번 올라가는 걸로 5골드나 받아 처먹는다고 속으로 욕을 그렇게 했는데 이젠 아니다.

고귀하신 마법사님 시간을 빼앗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내야지. 물론 나는 빼고. 충성충성.

“너무 실망하지 마라, 평민. 듣자니 신체 능력은 굉장한 거 같던데 아랫물에서 놀기에는 충분하지 않겠나.”

“그래. 너는 큰물에서 놀아서 좋겠다. 아랫물은 이제 사라질 테니 그만 좀 따라와라.”

“따라가다니! 내가 너한테 따라붙는 것처럼 보이나?”

“응. 우리 마탑 나온 지 한참 됐거든.”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이 겹칠 뿐이다! 오히려 평민이 나를 따라오는 것 아닌가?”

“아 그래? 난 이제 저쪽으로 갈게. 잘 가.”

“나도 그쪽이다.”

“……생각해 보니 반대쪽이다. 진짜 잘 가.”

“생각해 보니 나도 반대쪽이었다.”

……이 새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더니 벌써 시작한 건가? 그렇다면 성공이다. 벌써 후회 중이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말해 봐.”

“뭐를 말인가?”

“시비 걸 땐 언제고 친한 척 들러붙는 이유가 뭐야?”

“내가 언제 들러붙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시비는 평민이 먼저 걸지 않았나!”

그 표정이 정말 억울해 보여 나까지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대뜸 찾아와서 돈 없는 평민은 꺼지라고 말한 게 누군데.

원작에서도 그런 캐릭터였다.

악인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시비 걸고 권위 의식 내세우는 모두가 피하는 인물.

“돈 없는 거지새끼는 격 떨어지니까 마탑에서 꺼지라며?”

“그, 그런 적 없다!”

그래.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지. 그래도 같은 의미는 맞잖아, 새끼야.

“평민에게 5골드는 정말 큰돈이라 들었다. 그런 돈을 이런 될지 안 될지 모를 검사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결과도 나쁘지 않았나.”

“……뭐?”

“무, 물론 그 이후에 심하게 군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평민이 먼저 노블레스를 모욕하지 않았나.”

“…….”

지금 뭐라는 거지? 시비 거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였다고? 그런 말투로?

그냥 변명하는 거라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설정한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변명을 지어내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권위적인 만큼 자존심도 강하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평민을 배려하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원작에서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역할은 간단하다. 특유의 권위 의식으로 평민들에게 시비를 걸어 갈등을 조장하는 역할. 그러니 애초에 평민에 대한 배려의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어린 시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권위 의식에 찌든, 이기적인 캐릭터로 설정했으니까.

그런데 눈앞의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다. 순수한 선의로 한 말이라고.

변명하는 쪽과 배려심으로 평민에게 충고하는 쪽. 어느 쪽이어도 내가 설정한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아니었다.

“평민? 뭘 그리 생각하는가? 본인 잘못이 다시 떠오른 것인가?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다 용서했으니.”

“……아니다, 피곤해서 먼저 좀 가 볼게.”

“자, 잠깐 평민! 돈이 없으면 내 호위로 고용해 줄 수도…….”

멀어지는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음성을 뒤로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설정하지 않았지만, 상상한 모습 그대로의 마탑. 내가 설정했지만, 설정과 전혀 다른 캐릭터. 대체 이게 어떻게 돼먹은 세계관인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했다.

* * *

“74나 나왔다고……?”

“네.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보셔도 돼요.”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휴. 다행이다. 진짜 가서 확인해 보자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거짓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168 나왔다고 하면 믿지도 않을 거 아닌가. 74로도 저런 반응인데.

“하지만 그런 신체를 가지고도 74라니…….”

“봐요. 전 괜찮다니까요. 이제 운동해도 되죠?”

“으음…….”

내 말에 라이놀이 침음을 삼켰다. 병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보는 건 덤이다.

다린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오우거랑 팔씨름이라도 할 생각이야?”

“일단 목표는요.”

“……농담이지?”

“…….”

“농담이라고 말해 줄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라이놀을 쳐다봤다.

“그럼 전 좀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게?”

“운동할 곳도 좀 찾고, 흑철석도 좀 사려고요. 전에 건 너무 가벼워서…….”

“……후.”

라이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쩔 수 없지. 단, 운동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안 끼치는 곳에서.”

“네. 당연하죠.”

“농담이라고 말하고 가!”

끼이익. 쿵.

이 세계에 대한 의문에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지만, 어차피 내가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어떻게 여기에 떨어졌는지조차 모르는 상태 아니던가.

머리는 복잡한데 답은 없을 때, 그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래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제쳐 두고 운동기구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흑철석은 무거운 데다 가격이 싸서 내가 운동하는 데 쓰기 딱 알맞았다.

문제는 공정이 들어간 흑철석은 상당히 비싸진다는 것이다. 원체 무겁기도 하고 또 그만큼 단단하기 때문에 작업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내가 전에 구매한 건 그냥 원석 그대로의 흑철석이다. 길쭉한 똥 덩어리같이 생긴 걸 휘둘러 가며 운동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5골드라는 돈이 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원하는 형태의 물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령……은 너무 단순하다.

나쁘진 않지만, 운동이 대부분 상체에 집중된다는 점도 문제다. 그럼 또 뭐가 있을까. 복잡한 건 만들 기술이 안 될 거다.

케틀벨? 바벨?

……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실 지구에선 운동이랑 담쌓고 지냈으니까.

흔히 나오는 모래주머니처럼 만들 수는 없을까? 철이라서 불편할 거 같긴 한데. 철을 몸에 두른 걸 상상하자 자연스레 갑옷까지 상상이 넘어갔다.

아예 갑옷으로 만들어 입으면 괜찮지 않을까?

대장간에 도착해 흑철석으로 갑옷을 만들 수 있냐 물어보니 대장장이가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걸 만들어 어디에 쓰려고 그러오? 무거워서 입지도 못할 텐데.”

“그냥 장식용으로 쓰려고요.”

“별 이상한 취미도 다 있군…… 혹시 노블레스요?”

“……아닙니다.”

또 이상한 놈 생각나게 하네. 이 아저씨가.

“흑철석으로 갑옷을 만든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장식용이면 가능은 할 것 같소.”

“대충 걸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뭐 선반 같은데 걸쳐 놓을 생각이오?”

아니. 내가 걸칠 거다.

“뭐 나야 돈만 받으면 어떻게 쓰든 상관없지. 대신 물건은 직접 가지러 와야 하오. 그 무거운 걸 우리가 어찌 옮기나?”

“물론입니다.”

“그럼…… 위, 아래 해서 5골드만 주쇼. 그 정도면 만들기 쉬울 거 같아서 싸게 주는 거요.”

“여깄습니다.”

장사꾼의 싸게 준다는 말은 믿어선 안 될 말 중 하나지만, 실제로 내가 보기엔 적당한 가격 같았다. 마침 얻은 공돈이 5골드 딱 맞기도 하고.

일주일 뒤에 오라는 대장장이의 말을 듣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운동할 장소를 알아볼 차례였다.

유료 훈련장에서까지 쫓겨난 이상 도시 내에서 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안 그래도 인구포화의 도신데 운동할 곳이 어디 있겠나.

결국 밖으로 나가서 찾아봐야 한단 소리다.

왔다 갔다 동선이 귀찮긴 하겠지만, 어쩔 수 있나. 가까운 숲에서는 몬스터가 안 나올 테니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는 수밖에.

사실 레이튼 근처의 몬스터라면 얼마나 나오든 상관없기도 했다. 고블린, 오크 같은 녀석들뿐이니까.

스캐빈져도 B등급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애초에 B등급 용병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B등급 달고 스캐빈져 짓거리하는 놈은 사실상 거의 없다.

B등급 용병이면 어딜 가도 대우해 주고 밥 벌어 먹고사는데 스캐빈져 짓거리를 왜 하겠나?

디노, 그 정신병자 새끼가 이상한 거지.

성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텅 빈 길거리가 보였다. 레이튼의 인구 밀도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퍽! 퍽!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남성 한 명이 소년 하나를 구타하고 있었다. 레이튼에선 흔한 풍경. 흔한 만큼, 외면하기도 쉽다. 엮이기 싫어서 길을 돌아가는 게 조금 귀찮을 뿐이다.

나도 그리 의협심 넘치는 성격은 아니다.

21세기 지구를 살아가던 현대인으로서 가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내가 일일이 책임질 수도 없을뿐더러, 아직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일을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이런! 씨X! 놈이! 상납금을 안 내?”

첫째는 남자가 정말 아이를 죽일 기세로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DT-2-32-2]

둘째는 맞고 있는 아이가 소년이 아니라, 설정상 사망한 제국 황녀, 타냐 스트라우드였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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