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8)
“더럽게 크네 진짜.”
마탑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고개 들어 하늘 보면 보이거든. 사우론의 눈 같다.
덕분에 찾아오는 건 쉬웠다. 원래는 다린, 라이놀과 같이 와야 했지만, 내가 거부했다.
자식 병원 따라붙는 부모님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솔직히, 이 나이 먹고 쪽팔린다. 근데 또 생각해 보니 이런 감상 자체가 사춘기 애들이나 할 생각 아니던가? ……그만 생각하자.
어쨌든 마탑은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 똑같았다. 문제는, 마탑의 모습은 상상만 했지 설계한 적은 없다는 거다.
이제는 내가 정말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자폐증이 도져서 내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
잠시 머리가 복잡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 상상 속이라면 또 어떤가? 내가 느끼는 것은 진짜다. 현실의 나도 ‘통속의 뇌’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있는 힘껏 살아가는 것뿐이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접수원이 말을 걸었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마력 패스를 측정하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테스트 시작까지 1시간이 남았습니다만……. 미리 올라가시겠습니까?”
“올라가겠습니다.”
운동이나 하다 올까 고민했지만, 마침 심란하기도 하고 올라가서 멍이나 때릴 생각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테스트 비용은 5골드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테스트 한 번에 4인 가족 5개월 생활비.
내 돈도 아닌데 내면서 손이 떨렸다. 개천에서 용 못 난다는 말은 저쪽보다 이쪽 세계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위로 올라갔다.
* * *
십 분쯤 지났을까, 내 또래의 꼬맹이 하나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주위에 칼 찬 놈, 활 든 놈, 옷 든 년 등등 가지가지 달고 다니는 놈이었다.
라이놀과 다린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둘 데리고 오는 것도 쪽팔려 거절했는데, 저런 녀석도 있을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다.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 그 꼬맹이를 바라봤다. 그 녀석한테 코드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NPC-1-117-2]
자이어 테르베로츠.
이 녀석이었구나. 이 시기 레이튼에서 사람 줄줄이 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예상했어야 했는데.
세 번째로 보는 캐릭터였지만, 라이놀과 다린 때와 달리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별 감흥 없었다.
비중 있는 캐릭터도 아니었고.
신경 끄고 다시 멍 때리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넌 뭐냐?”
“나도 너 처음 보는데. 넌 뭐냐?”
내 말에 자이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래 노블레스 출신은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면 노블레스 출신은 아니고…… 하긴, 그건 옷차림만 봐도 알겠다만.”
“…….”
안 그래도 심란한데 이 새낀 왜 시비지?
어이가 없어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오히려 기세가 등등해져서 계속 떠들어댔다.
“평민까지 테스트를 받다니. 마탑도 격이 많이 떨어졌군.”
“…….”
“꼴을 보아하니 평민 놈이 전 재산 투자해 온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환불받고 가는 건 어때? 평민 놈들은 5골드라도 소중하잖아.”
무시하면 알아서 떠나겠지 싶었는데 떠날 기미가 안 보인다.
꼬맹이랑 말싸움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나랑 말 섞고 싶어 하는 인간은 오랜만이라 나도 좀 설렜다.
솔직히 5골드는 나한테 진짜 소중한 돈 맞아서 좀 울컥하기도 했다. 아까 주면서 손 떨리던 거 생각나서. 팩트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귀족 놀이는 적당히 하지? 보기 추하다.”
“뭐, 뭐?”
자이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귀족 놀이? 지금 나한테 말한 거냐?”
“뻐기던 놈이 너 말고 또 있냐? 왕도 없는데 귀족은 무슨. 노블레슨지 뭔지 되도 않는 단어 만들어서 다니는 건 그나마 양심 측면에서 칭찬해 줄 만하다만.”
“이, 이놈이! 나를 능멸해!”
능멸? 어디서 사극 보고 왔나.
컨셉질도 이 정도면 감탄밖에 안 나온다.
“용병! 이놈을 때려눕혀라! 죄목은 감히 나,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가문을 무시한 죄다!”
그 말에 멀리 떨어져 있던 칼 든 놈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 나를 보고 흠칫 뒤로 물러섰다.
왜 저러지?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데…….
“아재, 나 알아요?”
“……아니. 모른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착각이겠죠.”
갑자기 웬 존댓말.
“내가 이 도시에 낯익을 사람이 많지 않은데…… 좋은 쪽 몇 명 빼면 다 나쁜 쪽이거든.”
“지금 뭐라는 거야! 용병! 얼른 저놈을 때려눕히라니까!”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말에도 불구하고 칼 든 놈은 내게서 계속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점점 더 수상한데.
“나쁜 쪽도 존X 나쁜 쪽이랑 좀 덜 나쁜 쪽 있는데 아재, 어느 쪽이에요?”
“……존X 나쁜 쪽은 어느 쪽입니까?”
“나 죽이겠다고 쫓아오던 놈들 있었거든. 절반은 날아갔는데, 절반은 도망갔어.”
용병의 안색이 하얘졌다. 날아갔다는 게 비유가 아니라는 걸 아는 눈치다. 역시 나랑 만난 쪽인데.
“저, 저는 그쪽은 아닙니다!”
“아, 훈련장 쪽이구나.”
안색이 하얀 용병을 향해 이어 말했다.
“일주일은 꼼짝없이 요양할 줄 알았는데 빨리 나았네요? 아재 회복력이 좋은가 봐.”
“……아뇨. 아직 죽을 맛입니다.”
“그럼 집에서 쉬지 왜 이러고 있어요?”
내 말에 용병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시X 사내새끼가 왜 이래.
“……치료비가 없어서…….”
“…….”
“길드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업무라고…… 그래서 나와서 치료비라도 벌려고 했는데…….”
“…….”
“저 조막만 한 애새끼는 돈값 하라며 일부러 여기저기 시비 걸고 다니지…… 움직일 때마다 몸은 죽을 것 같이 쑤시지…….”
용병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지만, 모른 척해 줬다. 사나이의 눈물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 나도 미안해요. 아재도 먹고살자고 한 건데 내가 너무 심했나 봐.”
“흐…… 흐흑…….”
“그래도 애새끼 하나 협박하자고 열 명이나 모인 건 선 넘었지. 안 그래요?”
“크흥! 네…… 네.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요. 다음부턴 그러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그가 활 든 용병을 데리고 뒤로 빠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돈 받기 싫어?”
“야. 덤빌 거면 직접 덤벼. 불쌍한 아재 그만 괴롭히고.”
“……크윽!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그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돌아갔다. 직접 덤빌 용기는 없나 보다.
“아니, 컨셉 좀 작작 잡아라…….”
요즘은 삼류 악당도 그런 대사는 안 쓴다.
게임에서도 권위적이고, 싸가지 없긴 해도 저런 대사 내뱉진 않았는데. 어려서 그런가?
끼이익.
그때 전형적인 마법사 차림의 노인과 조수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와 장내를 둘러봤다.
“흠…… 오늘 오전은 2명뿐인가. 빨리 끝나겠군.”
“지난주에 워낙 많이 몰렸었잖아요. 보통 오후에 많이 오기도 하고.”
“난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설명하고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조수가 남아 우리를 바라봤다.
“음…… 근데 여기 분위기 왜 이렇죠? 무슨 일 있었나요?”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내 쪽을 바라보며 씩씩대고 있었고, 놈을 따라온 사람들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 와서 꼬맹이랑 말싸움한 게 쪽팔려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신의 말에 아무도 반응이 없자 민망했는지 조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뭐 상관없죠. 그럼…… 자이어 테르베로츠 먼저 들어오세요.”
“잠깐만요. 제가 먼저 와서 기다렸는데요.”
“이쪽은 예약 명단이에요. 어디 보자……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5일 전부터 예약했네요.”
아니. 5일 전부터 예약해 놓고 50분이나 일찍 와서 기다렸다는 거야? 황당해하는데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굳이 내 앞으로 지나가며 말했다.
“흥. 평민들은 준비성까지 부족하군.”
“…….”
그래 너 준비성 철저해서 좋겠다. 무슨 삼류 악당 같은 녀석이 이런 데선 성실하지? 권력으로 순서 바꾸는 게 정석 아닌가?
아무튼, 5일 전부터 예약해 놓고 기다렸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녀석이 방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오기까지 5분.
표정이 밝은 거 보니 결과가 좋았나 보다. 별로 알 바 아니었지만, 문제는 일행이 아니라 굳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평민, 들어가기 전에 용병에게 들었다. 너, 마나 하나 없는 육체파라며?”
“그래.”
“큭. 멍청하고 둔해 빠진 놈들. 너희 종자들은 운동할 시간에 마력 수련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이해 못 하는 무식이라던데. 아빠가 그랬어.”
“……아, 그래.”
“멍청한 평민. 신체가 강해지면 마력 패스가 좁아지는 것도 모르나? 네 마력 패스는 보나마나겠군. 나는 몇이나 나왔는지 아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녀석 혼자 신나서 말을 이었다.
“87이다! 올해 측정자 중 가장 높은 수치라 하더군.”
“그래. 축하해.”
신나서 떠드는 꼬맹이를 두고 나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내가 이런 꼬맹이랑 뭘 한 거지?
“멍청한 평민. 너는 멍청하게도 신체를 단련해 버렸으니 30이라도 나오면 다행일 거다.”
“그러게…….”
“멍청한 평민. 기운 없어 보이는군. 이제야 주제 파악하고 사과할 마음이 들었나?”
“그래…… 내가 잘못했다.”
“흠. 주제 파악이라도 잘해서 다행이군. 특별히 사과는 받아 주도록 하겠다.”
“……그래. 고맙다.”
“무얼. 노블레스로서 넓은 마음씨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
그런 새끼가 뽕 뽑겠다고 여기저기 시비 털고 다니냐?
대충 장단 맞춰 주고 있다 보니 조수가 나왔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네 차례군, 평민. 낮게 나와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라.”
“……걱정 고맙다.”
대충 인사한 후 조수를 따라 들어가자, 처음 들어왔던 노인이 석판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체중계같이 생겼다.
노인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발 벗고 저기 올라가면 된다.”
“네.”
내가 신발을 벗는 도중에 노인과 조수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87은 오랜만이군. 작년 최고 기록이 94였던가?”
“92였을 겁니다. 아르곤 왕국에서 데려갔죠.”
“아르곤 왕국? 욕심도 많군. 기사가 포화 상태라더니.”
“90을 넘는 건 드무니까요. 아르곤에서도 욕심날 만하겠죠.”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신발 벗었는데요.”
“그럼 그냥 거기 올라가게. 이런 것까지 얘기해 줘야 하나?”
“…….”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겁나 까칠하게 구네.
조용히 석판 위로 올라가자 무언가 내 몸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마력인가. 생각보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조수가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리곤 기록된 숫자를 보더니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어…… 교수님 이거 고장 난 거 같은데요?”
“왜? 숫자가 안 나오나?”
“아뇨, 그…… 숫자가 너무 높게 나와서…….”
“몇으로 나오는데?”
조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8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