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4화 (4/225)

너의 코드가 보여 (4)

“사냥을 나가자고?”

바람의 마도사 다린.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변에 하급 몬스터만 남아 사냥에 나서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B등급 검사, B등급 마법사인 그들이 잡기엔 너무 격이 떨어진다.

한 달 내내 하급 몬스터 잡는 것보다 B등급 의뢰 한 번 하는 게 벌이 면에서 이득이었으니까.

그런 의문을 담아 그녀가 그녀의 오빠를 쳐다보자 그 당사자, 라이놀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길드에 갔는데 웬 꼬맹이가 용병 되겠다며 찾아왔더라고.”

거기까지 듣고 다린이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인간의 오지랖은 고질병이다. 죽어도 못 고칠 고질병.

“그래서? 또 어디 일자리 소개시켜 주면 되잖아. 사냥은 무슨 말인데?”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혼자 몬스터를 잡으러 나가겠다고 하잖아. 잘못하다 죽겠다 싶어서 같이 가자고 했지.”

“뭐? 몬스터를?”

평생 도시 안에만 머무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 하급 몬스터란 충분히 두려운 존재다. 그렇다고 공포에 맞서 싸울 만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급 몬스터 부산물은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이니까.

레이튼에는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들이 널렸다. 소매치기, 강도 등등. 잡아갈 사람도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다.

이런 곳에서 몬스터를 잡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면 미친놈이거나, 인성이 제대로 박힌 놈이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응. 어차피 너도 할 일 없잖아. 오래간만에 몸이나 풀고 오자는 거지 뭐.”

“좋아. 다 좋은데, 오늘 하루만 나가면 되는 거야? 다음번엔 어떡하려고? 우리가 계속 책임질 건 아니잖아.”

“몬스터를 직접 보면 나가겠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그럼 일자리 알아봐 주면 되는 거고.”

대책 없다는 소리다.

“하아…….”

다린이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대신 오늘만이다?”

“물론이지.”

* * *

[NPC-1-119-3]

[NPC-2-123-3]

놀랐다. 여기서 주연 캐릭터들을 만날 줄이야.

“아직 소개를 안 했지? 나는 라이놀,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 다린. 마법사야.”

“안녕하세요. 리안이에요.”

지구에서의 내 아이디를 이름으로 둘러댔다.

원래 풀네임은 ‘리게임안돼요’ 인데, 사람들이 멋대로 줄여 리안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보다, 지금 시기엔 레이튼에 있었구나.

제국 귀족 출신 남매 용병.

사자검 라이놀과 바람의 마도사 다린.

처음 보는 놈이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길래 경계했는데, 내가 아는 캐릭터였다.

2부 본편 시점에선 이미 제국을 대표하는 용병단 ‘제국의 망령들’을 이끄는 거물.

뛰어난 실력에 인성, 거기에 라이놀의 리더십까지 갖춘 만능 캐릭터.

이 녀석들이라면 믿을 만하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주연 캐릭터를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외국에서 동향 사람 만난 기분이라 해야 하나.

“안녕! 꼬마야 너 목소리 되게 좋구나? 크면 여자들 많이 울리겠어!”

“하하…… 고마워요.”

반짝이며 바라보는 눈길을 피하며 멋쩍게 답했다.

다린은 붙임성이 좋아 상당한 인기를 가진 캐릭터였다. 나도 꽤 좋아했던 캐릭터이기도 하고. 만나서 반갑긴 한데…….

저놈의 꼬마 소리 얼마나 들어야 하는 거지?

사실 이 세계 기준에서 한국 나이로 열여섯이면 이미 성인이다. 여덟 살만 돼도 밖에서 일하고 돈 벌어야 하는 세계니까.

저 둘도 끽해야 20대 초, 중반이다. 지금 내 몸이나 저 둘이나 내 기준에서는 둘 다 거기서 거긴데.

애한테 애 취급받는 현실에 한숨이 나왔다.

“야, 야. 떨어져 애가 부담스러워하는 거 안보이냐?”

“뭐어? 이렇게 이쁜 누나가 들이대는데 뭐가 부담스럽다는 말이야? 추하게 질투하지 말고 저리 가셔, 훠이훠이.”

“부담스러운 부분보다 안 부담스러운 부분 찾는 게 더 빠를 거 같은데.”

“오빠는 죽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재주가 있구나?”

말다툼하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봤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남매의 철없는 다툼으로 보이지만, 저건 저들 나름대로의 긴장을 풀어 주는 방법이다. 싸우는 와중에도 계속 내 상태를 확인하는 게 그 증거다.

고작 하루 일하고 말 짐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경우는 없다. 확실히 리더의 그릇이라 해야 하나.

“미안하다니까. 그만 출발하자. 이러다 더 늦으면 몬스터 득실거리는 숲에서 노숙해야 할지도 몰라.”

“흥, 리안 얼굴 봐서 이번에만 봐주는 거야.”

“네이네이, 감사합니다요. 가자, 리안.”

건성으로 대답하고 걸어가는 라이놀을 보며 다린이 한숨을 내쉬고 뒤를 따랐다. 나도 살짝 고개 젓고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 * *

“여기부터는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니 조심해야 해. 특히 리안, 너는 처음이니까 더 긴장하고. 혹시 놀라서 도망치더라도 멀리는 가지 마. 숲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너무 멀리 가면 우리가 도울 수 없잖아.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는 것도 안 돼. 독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 배고프면 배낭에서 육포 꺼내 먹고.”

“네. 폐 끼치지 않게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 후에도 몇 가지 더 신신당부하는 걸 경청하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소리가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충고로 봐야겠지.

이 정도면 현대에서도 보기 힘든 호인이다.

“자자, 잔소리 끝났으면 이제 그만 들어가자.”

“잔소리라니! 난 어디까지나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걸 잔소리라고 하는 거야. 이 꼰대야.”

“꼰대라니…… 너 나랑 겨우 두 살 차이 나는 거 알지?”

“쯧쯧, 꼰대랑 나이는 관계없어. 하는 행동이 결정하지. 그치?”

내 쪽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잔소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솔직히 너무 길긴 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앞장서는 라이놀을 따라서 숲에 들어서자 둘은 조금 전까지 소풍 온 듯한 분위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침묵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주변을 살피는 눈빛이 꽤 날카롭다.

역시 보통은 아니다.

한국이었으면 대학교에나 다닐 나이.

술 마시고 캠퍼스 낭만을 즐길 나이에 저 정도 주의력. 과연 ‘제국의 망령들’을 이끌 재목이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들어가다 라이놀이 손을 들어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앞쪽에 고블린 7마리 발견. 다린, 몇 마리?”

“저 정도로 뭉쳐 있으면…… 4마리 정도.”

“좋아. 주문 준비해 줘. 리안 너는 움직이지 말고 뒤쪽에 있어.”

“네.”

곧이어 다린이 잠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린의 앞에 무수한 숫자들이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숫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다가 한순간 멈추더니 칼날 모양으로 변했다.

쉬이익!

다린의 손길을 따라 칼날이 허공을 향해 춤추기 시작했다.

“크웨에엑!”

“키이익!”

칼날에 허리가 절단된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자 그 사이로 라이놀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라이놀이 휘두른 검에 남은 고블린들의 머리가 날아갔다.

생명체를 죽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아니, 정확히는 방금 보인 숫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보만 보이는 게 아니었나?

마법이라는 건, 대기에 실린 마나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게 숫자로 보인다는 건, 마법이 형상화되는 과정이 코드로 보인다는 건데…….

예상치 못했지만 좋은 소식이다.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겠지.

그사이에 라이놀이 남은 고블린을 모두 처리하고 돌아왔다.

“어때? 마법은 처음 보지?”

숫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이놀이 웃었다.

“놀랄 만도 하지. 나는 저 녀석 처음에 혼자 중얼거리는 거 보고 정신 나간 줄 알았다니까.”

다린이 다가와 라이놀의 뒤통수를 때렸다.

“정신 나간 여자 주먹 한 번 더 맞아 볼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라이놀이 웃으며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고블린 어금니.”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나.

“고블린한테 돈 되는 건 어금니밖에 없거든. 장식품으로 만들어서 쓴다나? 하여튼 취향 특이한 사람 많아.”

“시약 재료로도 많이 쓰이거든? 알아서 무식을 티 내요 하여간.”

“내가 마법사도 아닌데 그거 모른다고 무식하다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도 고블린을 해치우면 어금니가 드랍된다. 건네받은 어금니를 멍하니 배낭에 집어넣다가 흠칫했다.

[NPC-1-MD-B]

[NPC-1-MD-C]

멀리서 코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용병 등급 B등급 하나, C등급 다섯.

MD. 살인마(Murderer)

걸리적거리는 배낭을 내려놓은 뒤 검을 뽑았다.

“리안? 갑자기 검은 왜 꺼내?”

“다린, 주문 준비하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다린에게 이어 말했다.

“누가 와요.”

“뭐? 오긴 누가 온다고…….”

“리안 말대로 해.”

라이놀이 검을 들어 올리며 나를 흘낏거렸다. 아마 나 같은 꼬맹이가 어떻게 먼저 기척을 느꼈는지 궁금한 거겠지.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라이놀이 바로 정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 *

“이게 누군가! 라이놀. 이런 데서 다 보는군.”

“……오랜만입니다, 디노 씨.”

구겨진 표정으로 라이놀이 답했다.

그가 다른 B등급 용병에 비하면 경험이 적긴 하지만, 표정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구겨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눈앞의 남자를 혐오하는 탓이었다.

그런 명백한 적의를 봤음에도 그 남자, 디노는 태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 근처에는 고블린밖에 안 나올 텐데…… B등급인 자네들이 잡을 몬스터가 있던가?”

“……디노 씨도 B등급 아닙니까.”

“하하, 나야 여기 애새끼들 돌보러 나왔지. 얘들아, 인사해라. 저분들이 그 유명한 ‘사자검’과 ‘바람의 마도사’시다.”

“아니, 그 유명한 남매 파티 말입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라이놀은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디노를 노려봤다. 남자가 멋쩍게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C등급 용병이 고블린 상대도 못 해서 보모가 따라붙었죠?”

“이런, 다린 양. 아무리 이놈들이 모자라 보여도 표정 푸시게. 고블린놈들이 무섭다고 매달리는 걸 난들 어쩌겠나?”

“……지랄.”

거친 용병들과 부대껴 살아가면서도 격 떨어진다는 이유로 욕설을 지양하던 다린이다.

그렇기에 ‘지랄’은 그녀가 쓰는 욕설 중 가장 험한 것 중 하나였다.

디노는 그녀의 욕설도 태연히 무시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능글맞은 표정으로 물었다.

“보아하니 사정은 자네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둘이 어느새 아들까지 낳았나?”

디노가 리안을 가리켰다.

어떻게 보아도 리안은 둘의 아들뻘이 아니었고, 둘이 남매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명백한 도발.

“……저와 다린이 남매 사이인 건 아실 텐데요.”

“하하하! 그게 뭐 대수인가? 한창때의 청춘남녀가 떡 좀 칠 수도 있지. 걱정 말게, 나는 이해하니까. 한데 아들이 좀 크군. 둘이 대체 언제부터 교접한 건가?”

“이런 씹…….”

참다못한 다린이 욕설을 뱉으려는 순간 라이놀이 다린의 어깨를 툭 쳤다.

“……농담이 과하시군요. 저흰 그만 가 보겠습니다. 디노 씨도 적당히 돌아가시지요.”

“저런,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쉽군. 가 보시게.”

씩씩거리는 다린을 다독이며 라이놀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용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 형님. B등급 두 명 상대로 왜 그러실까. 살 떨려 죽는 줄 알았소.”

디노가 말을 건 용병을 바라봤다.

싸움이 붙어도 자기 한 몸은 빼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은 아니겠지만.

아무렇게나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버러지들이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다.

디노는 일단 그 생각은 접어 두고 입을 열었다.

“어떨 것 같냐?”

“어떻긴 뭐가 말이우?”

“이런 답답한 새끼.”

디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눈치도, 생각도 없는 쓰레기들. 그러니까 천년만년 C등급에서 벗어나질 못하지.

“다른 사람이 너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면 어떨 거 같냐, 이 말이다.”

“아, 그야 당연히 그날로 사생결단을 내야지.”

“그렇지? 너 같이 자존심 없는 새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난데없는 폭언에 용병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디노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혼잣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참았단 말이야. 호구로 유명하긴 해도 결코 순한 성격은 아닌데…….”

전력은 오히려 이쪽의 열세.

C등급 이래 봤자 간신히 턱걸이한 떨거지 다섯. B등급 상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는 정도 넘은 모욕을 참아 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애새끼.

그 애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디노가 히죽 웃었다.

“가서 애들 좀 더 모아 와라. 오늘이 사자검과 바람의 마도사가 떨어질 날 같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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