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
“일어나 이 병신새끼야!”
시X, 아침 댓바람부터 누구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배 쪽에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뭐, 뭐야?”
“허, 반말?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갑작스런 충격에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눈앞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납일까지 5일 남은 새끼가 여태 퍼 자고, 진짜 내일 아침 해 보기가 싫지?”
남자가 다시 발길질을 하려다 한숨을 쉬며 밖으로 몸을 옮겼다.
“그나마 가진 게 그 반반한 외모뿐이니 봐준다. 귀부인들한테 몸을 팔든, 구걸을 처 하든 상납일까지 돈 안 가져오면 뒤질 줄 알아라.”
그 말을 끝으로 나가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X. 뭐야?”
* * *
“X됐다.”
천박한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리스마 느껴지는 낮게 깔린 목소리. 아이 목소리에서 카리스마를 느끼다니 웃기지만.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쳐다보니 금발의 소년이 웅덩이에 비쳤다.
중고딩쯤 돼 보이는 외모.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일찍 성장하는 걸 고려하면 더 어릴지도 모르겠다. 어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생긴 티가 났다. 현대였으면 배우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X됐네.”
현실도피를 멈추고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는지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3일 전. 눈을 뜨고 일어났더니 내가 만든 게임 속이었다.
사골 대신 써도 국물이 우려 나올 만한 서술이지만 어쩌겠나, 현실이 그런걸.
그것도 게임 1부, ‘제국의 멸망’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의 제국의 수도 ‘레이튼’이었다. 한때는 번영했지만, 3왕국의 협약에 의해 무정부 상태로 남은 도시. 당연히 치안은 개판. 둘이 싸우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놈이 나타나 남은 놈 죽이고 시체 털어 가는 개막장 도시.
“하아…….”
그런 도시에 떨어진 지 삼 일이 지났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멍하니 방에 틀어박힌 시간이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방이 아닐까? 이건 그냥 단순히 나쁜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버텼다. 하지만 일어나면 구멍 뚫린 천장이 보였고, 꿈에서는 강도에게 찔려 죽는 내 모습만 보였다.
삼 일이 지나고서야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자 계획을 짜는 것은 쉬웠다.
강해져야 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알아보겠다고 미친 척 자살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일단 강해진다.
약한 게 곧 죄인 세계다.
무엇을 하든 강해지는 게 최우선. 칼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눈앞에 떠 있는 저 글자.
[FD-1-001]
FD는 음식(Food)의 약자였다. 그다음 숫자 1이 뜻하는 건 육류. 그 중 첫 번째 음식 육포를 뜻하는 코드.
분명 내가 설정한 코드였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음식과 골드. 그것들을 바라보자 저런 글자들이 떠오른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콘솔 창.’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현재 포인트: 5,000]
관리자 모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콘솔 창.
저놈의 포인트를 어떻게 얻는 건지 알 방법이 없어 아직 사용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정말 뭐든지 가능할 거다.
코드를 보는 눈, 관리자용 명령 창.
게다가 나는 게임 내 주요사건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게임 제작자이면서 동시에 고인물 플레이어.
‘해 볼 만하다.’
생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튼의 치안 상태를 고려했을 때 현재 가장 시급한 건 무기다. 무기를 구하고, 강해져서 정보를 모은다.
마법도, 신도 실존하는 세계.
어딘가에는 지구로 돌아갈 힌트라도 있겠지.
마음을 정하고 나오자 3일 전 정신없이 나왔을 땐 눈에 들어오지 않던 뒷골목의 모습이 훤하게 들어왔다.
오물에 쓰레기에…… 시X 저건 뭐야, 핏자국이 마르지도 않았네. 빌어먹을 중세랜드.
떨어져 있는 오물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겨우 무기 상점을 찾았다.
간판도, 표지판도 없는 단순한 건물.
안에서 들리는 쇠 두드리는 소리나 앞에 경비 서고 있는 용병들이 없다면 단순한 민가인 줄 알겠다.
그곳으로 몸을 향했다.
“어디 들어가냐 꼬맹아.”
애써 무시하고 들어가려는데, 벽에 기대 하품이나 쩍쩍하던 용병 하나가 슬쩍 몸을 옮겨 막았다.
“여기가 무기 상점 맞나요?”
“무기? 푸하하! 그래 뭐, 무기 파는 곳이긴 하지. 아무튼, 너같이 젖내 나는 꼬맹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더니 뭐가 그리 웃긴지 옆에 기대 있던 다른 용병과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후…… 작게 한숨 쉬었다. 이럴까 봐 무시하고 들어가려던 건데.
“용병 아저씨 심부름으로 왔어요. 맡겨 둔 검이 있으니까 받아 오라고…….”
“뭐? 그 용병 이름은?”
“한스 씨요.”
“그게 누구야?”
모르지 씨X 방금 지어낸 건데.
용병은 대충 한스로 통일하는 거 아니었냐?
그래도 상대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다른 용병과 시비 붙는 일은 피하고 싶겠지.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지. 그럼 출입료만 내면 되겠네.”
“……출입료요?”
“그래. 출입료 1골드.”
무슨 상점 들어가는데 출입료를 내냐. 박물관이야? 게다가 1골드라니, 1골드면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다. 상점 한 번 들어가는 데 필요한 금액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가격.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시비인가 싶어서 용병 둘을 바라봤다. 그러자 둘의 머리 위에 코드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NPC-1-MC-D]
[NPC-1-MC-E]
제일 처음 숫자 1은 성별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MC는 용병(mercenary)의 약자였다. 마지막은 용병으로서의 등급을 의미한다.
사람을 상대로는 처음 써 보는데 이름 없는 조연 캐릭터들은 이렇게 나오는군.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시비를 거는지 대충 알겠다.
“아저씨 몇 급이에요?”
“뭐? 무슨 소리야?”
“용병 등급이요.”
“허…… 이거 맹랑한 새끼네, D급인데 뭐?”
“옆에 아저씨는요?”
“……E급.”
옆에서 조용히 눈치만 보던 용병이 대답했다.
신입 앞에서 폼 잡으려고 일부러 시비 거는 거다 이거. 이런 놈 많이 봤지.
내가 설정하기로 이 시기 대부분의 E급 용병들은 애미애비 없는 호로새끼요, D급은 애비애미 없는 호로새끼다. 아무튼, 대부분 씹새끼란 소리다.
그냥 칼 든 양아치 새끼들. 그런 주제에 본인들은 진심으로 건전한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악질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한스 아저씨는 C급 용병인데 제가 늦게 돌아가면 화내지 않을까요?”
“그거야 네 사정이고.”
“저야 혼나도 상관없지만요…… 분명 늦은 이유도 물어보실 텐데 아저씨들까지 곤란해질까 봐요. 그 아저씨 한 성질 하거든요.”
“뭐?”
D등급까지는 그냥 양아치 건달 새끼들이지만 C급부터는 어디 가서 당당하게 용병이라고 밝힐 급은 된다.
D급 용병까지는 그냥 경력만 쌓이면 오른다.
용병 등록해 두고 아무 일 안 하고 몇 년 지나면 자동으로 D등급이란 소리다.
반면 C등급은 길드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말하자면 길드에서 실력을 보증한 이들.
즉, 겨우 한 등급 차이지만 그사이에는 진짜 칼잡이와 그냥 동네 양아치 수준의 격차가 있다.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겨우 꼬맹이 괴롭히는 걸로 폼 잡는 양아치가 굳이 확인해 볼 담력은 없을 거다.
과연, 녀석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비켜섰다.
“……검 한 자루다, 꼬맹아.”
“네.”
그 표정을 보고 내심 뿌듯해하며 들어가다 금세 침울해졌다.
지금 던전이라도 들어왔나? 대장간 한번 들어오기 겁나게 빡세네.
씨X 넣어 줄 거면 성인 몸에 넣어 주든가 아니면 아예 귀족 집안 아기부터 시작하게 해 주든가. 나도 응애응애 잘 울 수 있는데.
쓸데없는 상념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물건이 진열된 진열장과 카운터에 앉아 무언가를 수리 중인 노인이 보였다.
“검을 좀 사려고 왔는데요.”
“여기 검 맡겨 둔 용병은 없다.”
노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네가 귀도 밝아.
“그거야 안 들여보내 주니 거짓말한 거고요. 왜 저런 놈들을 고용한 거예요?”
“흥, 더 나은 놈이나 있고? 적어도 저놈들 세워 두면 자경단 놈들이 보호비 걷는답시고 쳐들어오진 않아.”
“…….”
자경단. 경비가 없는 도시의 틈새를 파고들어 만들어진 세력이었다. 무너진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은 좋았는데, 사실 하는 일 없이 상인들 삥이나 뜯는 깡패 집단이다.
용병은 양아치, 자경단은 깡패.
깡패를 막기 위해 양아치를 고용해야 한다니,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도시란 말인가.
곧이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그래서, 검은 네놈이 쓸 거냐?”
“네.”
“뭐에 쓰게?”
“몬스터 사냥할 거예요.”
“아서라 꼬맹아.”
노인이 철없는 자식이라도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전쟁 때 강한 몬스터들이 싸그리 토벌되고 약한 놈들만 남은 건 맞다. 하지만 숫자가 많아.”
노인이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약한 몬스터들은 돈이 안 되니 용병들도 기피하지. 그렇다고 토벌에 나설 왕도, 귀족도 없어. 하, 지금 생각해 보니 귀족 놈들도 뭔가 도움이 되긴 했었구먼 그래.”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그거 완전 초보자 맞춤 사냥터 아니냐.
설정상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했었다. 어쨌든 이제는 현실이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도 계획이 있어서요.”
“조막만 한 게 계획은 무슨…….”
노인은 더 말하지 않고 창고로 들어가 검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마침 네 녀석도 쓸 만한 크기의 검이 있다. 6급 기사가 쓰던 건데 크기가 애매해서 어차피 아무도 안 사 가는 놈이니 1골드에 주마.”
“6급 기사요?”
내가 설정한 바에 따르면 기사는 1급부터 5급까지밖에 없다. 숫자가 낮을수록 계급이 높고, 숫자가 높을수록 계급이 낮다. 그러니 6급 기사란 존재할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설정이 바뀐 거라면 큰일이다. 다른 설정들도 바뀌었을지 모르잖는가. 내 표정이 심각해지는데 노인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종자 놈이 쓰던 거란 소리다. 종자가 쓰던 거라고 하는 것보단 6급 기사가 쓰던 거라고 하는 게 너도 더 기분 좋지 않겠냐?”
“……배려 참 감사하네요.”
어찌 됐든 1골드면 확실히 싼 가격이다. 게임에서도 쓸 만한 검은 최소 5골드는 하니까.
[SW-2-C]
코드를 보아도 문제는 없었다.
쇼트 소드. C등급.
중고라는 걸 감안해도 싸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린 나이가 오히려 장점으로 돌아온 듯했다.
“알겠어요. 여기 1골드요.”
“칼집은 별도다.”
“…….”
이런 씨X.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