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제202장 천마신의 가호 天魔加護
“…….”
뭘 또 이렇게까지 조용해지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말이야.
나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자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껄껄!”
그때, 길어질 것만 같았던 침묵을 깨고 혜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런 혜천의 웃음에 옆에 있던 공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이내 왕일과 마독 또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소교주.”
“말씀하세요.”
이제야 제대로 호칭을 칭하는 혜천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혜천이 입을 열었다.
“우선, 조금 전의 무례는 사과하겠소.”
편한 말에서 예를 차리는 어투로 바뀐 혜천.
그래, 진작 이래야 했었다.
같은 소속의 세력이라면 모를까 그와 나는 다른 세력.
비록 내가 한 세력의 주인이 아닌, 소주인이라지만 어느 정도의 예는 차려야 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예를 갖춘 혜천의 사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과를 받아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나의 대답에 혜천이 고개를 들어 나의 두 눈을 응시했고, 이내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와 한 수 손속을 나눠주겠소?”
“정확히 한 수 맞습니까?”
혜천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한 판이 아닌 한 수.
그것이 맞냐는 나의 질문에 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들어오십시오.”
귀찮은데 잘 됐다.
대련이 아닌, 단 한 수.
그것으로 상황 정리가 되기에 나 또한 마음에 들었다.
“고맙소. 그럼 검을 뽑아 드시오.”
나의 시원한 수락에 혜천이 살짝 반장을 하며 감사를 표한 다음 뒤로 물러나 자세를 낮추었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십대고수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삼황에 가장 가까운 사내를 꼽으라면 모두가 소림의 방장, 혜천을 꼽을 것이다.
약 이십오 년 전.
정마대전에서 단 한 번의 무공을 보여주며 왕이라는 호칭을 받았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고, 사람들은 그런 혜천의 생각을 존중해 그 어떠한 별호도 붙이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칭호는 소림 방장이라는 것뿐.
그 어떠한 것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혜천에게 기대를 걸었다.
어쩌면, 삼황보다 더 강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며 말이다.
물론 그건 정파인들 생각이고, 마도인 나는 살짝 기대되는 표정으로 혜천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검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스르릉.
“기대하겠습니다.”
소림 방장의 일 권.
과연 그의 주먹에서는 어떠한 무공이 펼쳐질까?
백보신권?
아니면, 방장만이 익힌다는 최고의 무예 아라한신권 阿羅漢神拳?
모르겠다.
하지만.
우웅!
그 어떠한 무공이 나오더라도 나의 천마신공에는 안 될 것이다.
나의 검을 뒤덮은 칠흑색의 검강.
그리고 붉어진 나의 두 눈.
그런 내 모습을 응시한 혜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우웅!
그의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백색이 아닌, 투명한 기운.
혜천의 주먹을 시작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이런 X.’
잠시 자만했나 보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혜천의 주먹에 나는 황급히 천마신공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단진!”
“알겠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단진을 불렀고, 나의 의중을 파악한 단진이 일행들을 뒤로 물리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에 옆에 있던 공진 또한 내공을 끌어올려 단진을 도왔고, 이내 곧 단단한 기막이 일행을 둘러쌌다.
그렇게 일행이 어느 정도 안전해지자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참, 너무 세게 나오는 거 아닙니까?”
모든 마공을 끌어올리면서도 나는 여유로운 음성으로 혜천에게 말했다.
그에 혜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는지 기운의 조율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듯했다.
그에 나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고 이내.
우웅!
내가 휘두른 검의 궤적은 시간이 멈추었다.
우우웅!
그때.
공간을 일그러트리던 혜천의 주먹 또한 드디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시간이 멈추어진 공간을 향해 거대한 기운이 덮쳐 들어갔다.
삐이이!
폭발적인 소리도, 거대한 굉음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소리.
이명 耳鳴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우웅!
나의 궤적, 멈추어졌던 그 궤적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의 검이 지나간 온연한 나의 공간.
그 공간이 혜천의 주먹으로 인해 일그러지고, 잡아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처음입니다.”
나의 전력을 드러낸 것이.
영광인 줄 아십시오.
씨익 미소를 지은 나는 검을 높게 들어 아래로 내리 그었다.
그리고.
파앗!
모든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의 검으로 인해 시간이 멈추었던 공간도.
혜천의 주먹으로 인해 일그러졌던 공간과 기운도 그 모두가 거짓말처럼 소멸해버린 것이다.
그에.
“아…….”
털썩!
혜천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갈무리했다.
“이…… 이 검은 무엇이오……?”
그렇게 모든 기운을 갈무리한 나를 올려다보며 혜천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소멸검 消滅劍.”
“!!!”
나의 입에서 나온 단어.
그 단어에 혜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혜천에게 다가갔다.
“일어나겠습니까?”
“아…….”
가까이 다가온 나의 질문에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혜천.
그가 탄성을 내뱉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무릎은 멀쩡하오.”
“다행이군요.”
혜천의 대답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혜천은 고개를 들어 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소교주.”
“말 하세요.”
“부디, 지금처럼 옳은 길을 걸어주시오.”
나의 대답에 혜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지금 걷는 길이 옳은 길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왜 입니까?”
혜천의 확신 어린 대답에 내가 의문 어린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옳은 길을 걷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판 남인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혜천이 어째서 저렇게 확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나의 물음에 혜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의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힐끔 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항상 있지 않소.”
“…….”
“소교주는 충분히 옳은 길, 좋은 길을 걷고 있소.”
“그렇습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하듯 하는 혜천을 보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혜천이 다시 살짝 미소를 짓고는 이내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러고는 정중히 반장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공진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이를 부탁하는 아비와 같은 심정일까?
진심이 가득 담긴.
나의 아버지인 천마에게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절절한 감정에 나는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런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고개를 든 혜천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앞길에 부처님의…… 아니, 천마신의 가호가 있기를. 아미타불…….”
이 양반.
은근히 선을 계속 넘으려고 하네.
부처가 아닌, 천마신의 가호를 기도하며 아미타불을 외우는 혜천.
그런 혜천을 보며 나 또한 마주 반장을 했다.
그러고는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장님에게 천마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도 선 잘 넘는다.
* * *
“아가씨! 또 무공 수련 중이신 거예요?!”
남궁세가의 직계만이 기거하는 안채.
그곳의 개인 연무장에 들어선 희정은 화려한 연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궁연화를 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아, 유모.”
유모인 희정의 등장에 남궁연화는 검을 내리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무서운 표정의 희정과 너무나도 다른 반가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남궁연화의 반응에 희정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다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약혼 준비로 인해 신부수업이 한창인 남궁연화.
그 수업이 너무나도 지겨웠던 남궁연화는 답답한 마음에 연무장에 나와 검을 휘둘렀지만 희정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에 남궁연화가 힘을 주어 자신을 이끌려는 희정을 억지로 멈추어 세웠다.
“유모.”
“예, 아가씨.”
진지한 남궁연화의 부름.
그 부름에 희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에 남궁연화가 입을 열었다.
“나 약혼해야 해?”
“물론이죠!”
남궁연화의 물음.
그 물음에 희정이 대답했다.
그에 남궁연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갈세가의 샌님이랑?”
“샌님이라니요!”
남궁연화의 물음에 희정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펴 확인하고는 이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 뭐 어때. 맞는 말이잖아.”
제갈세가의 소가주이자, 무림맹의 부군사 중 한 명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는 사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뛰어난 지략과 기상천외한 진법을 선보이며 이름을 날리고 있는 와룡서생 臥龍書生 제갈기.
혹자는 와룡이라는 칭호가 과분하다고 하지만 정파의 인물들은 모두가 그를 와룡서생이라 부르며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뛰어난 사내였지만 남궁연화의 눈에는 그저 샌님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한 남궁연화의 불평에 희정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남궁연화의 두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왕 공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흠칫!
희정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에 남궁연화가 정곡을 찔린 듯 흠칫했다.
그에 희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공자는 사파의 인물이에요. 하오문의 소문주. 만약 가주님이 알게 된다면 어쩌겠어요?”
부르르.
희정의 물음.
그 물음에 가주, 남궁준광의 모습을 떠올린 남궁연화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호랑이와 같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준광.
그가 분노한 모습을 떠올리니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애초부터 이루어질 사이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마음 접어요. 그래도 제갈 공자는 아가씨를 좋아하잖아요?”
오대세가들 간의 잦은 교류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쌓아온 남궁연화와 제갈기였다.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와도 같은 사이가 바로 그들이었고, 연애 소설에 꼭 나오는 필수적인 요소.
바로 친구인 남궁연화를 제갈기는 사랑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다.
남궁연화는 물론 제갈기를 친구, 그 이상 이하로 생각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 샌님은 재미가 없는걸…….”
“결혼 생활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니랍니다.”
남궁연화의 작은 투정에 희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남궁연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어서 가요.”
그런 남궁연화의 모습에 희정은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다잡으며 남궁연화를 이끌었다.
좀 전과는 달리 남궁연화는 순순히 희정에게 이끌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뺀질이, 왕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왕일…… 너는 나를 좋아해……?’
아직 왕일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남궁연화.
그녀는 왕일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