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제197장 감찰대주 監察隊主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이른 아침.
산동악가를 나서기 위해 아침부터 걸음을 나선 나는 친근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악천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피눈물이 흐를 듯한 원통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악천후다.
헌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나 친근하게 군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작스럽게 변한 악천후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불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청객이 굳이 오래 있어 봤자 뭐 하겠습니까. 물러가겠습니다.”
위천이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인 악천후.
그와 사사로운 감정을 모두 정리한 내가 딱 선을 지키며 말했다.
여기서 내가 지키는 선은 바로 존대.
예를 중시하는 악천후이기에 그의 입장을 배려하여 선을 맞춘 것이다.
헌데 웬걸?
나의 존대에 미소를 지을 것이라 생각했던 악천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존대를 하는 것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듯 말이다.
아니 이 양반아.
도대체 뭐 하자는 건데?
그리고 내가 간다면 좋아해야지 왜 아쉬워하는 건데?
덩치는 산만 한 양반이 시무룩해하는 꼴을 보이니 짜증이 났다.
그에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적당히 바뀌어야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니 불편했다.
“수하분들은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무슨 수하?”
아쉬움을 감춘 악천후.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나의 대답에 악천후가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림 수호를 위해 고생하시는 수하분들 말입니다.”
“……?”
이거 짜증 나네.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짓는 것도 짜증 났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도 짜증 났다.
악천후가 궁금해하는 나의 수하들은 없다.
기껏해 봐야 동생들이나 마교에 있는 친구들뿐.
동생들은 말 그대로 동생들이고, 나를 따르는 마교의 아이들은, 녀석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지만 나는 녀석들을 벗으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녀석들은 정확히 교주인 천마의 수하였고, 소교주인 나의 수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직 공식적으로 나에게는 수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악천후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림 수호를 위해 감찰대주직을 맡으셨지 않습니까!”
제가요?
거절했는데요?
짬 때리는 뭐 같은 서신.
나는 그것을 분명 집어 던졌다.
아니, 내가 왜 그 귀찮은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절대 사양이었다.
그나저나, 그 사실을 이 양반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우와! 형님! 무림 수호를 위해 이바지하시는 것입니까!”
넌 조용히 해라.
악여화와의 헤어짐이 아쉬웠기 때문일까?
악여화와 아쉬움의 눈빛을 나누고 있던 위천이 나를 보며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런 녀석의 호들갑 떠는 모습에 나는 눈을 부라리며 무언의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우와! 역시 형님!”
이 망할 놈.
즐기고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하다!
나의 언짢은 기색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들갑을 떨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위천.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녀석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악천후를 바라보았다.
“그건 어찌 알았습니까?”
내가 무림 수호 감찰대라는 괴상한 조직의 대주를 맡은 일.
아니, 정확히는 아직 맡지 않았다.
나는 임명장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나도 어제 알게 된 이야기를 왜 악천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고작 지역 명문가 수준인 산동악가의 가주가 말이다.
그에 내가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그에 악천후가 기다렸다는 듯, 나 대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소교주…… 아니, 감찰대주님의 행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니, 왜 댁이 자랑스러워하는데.
그리고 왜 내 행보에 집중해?
나 깽판 치고 다닐 거야, 집중하지 마.
처음 무림에 나왔을 때, 나는 어울리지 않는 명문 공자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 당시 본교의 인식은 너무나도 안 좋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뜻하지 않게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명분을 따지며 행동을 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 시절을 시원하게 해소하기 위해서 당당하게 깽판 치고 다니는 것이 나의 목표다.
헌데 그런 나의 행보에 왜 집중하는데?
그러지 마, 부담스러우니까.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산동악가의 무인들이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물론, 위천과 악여화. 그리고 서은설까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아…….
은설,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개판으로 살 거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자네, 조금 더 머물고 가게.”
“저요?”
“그래, 자네.”
악천후가 이번에는 위천에게 조금 더 머물다 갈 것을 권했다.
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자 목표를 바꾼 것이다.
그런 악천후의 권유에 위천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고, 그에 악천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위천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 내가 말을 편하게 해서 불편한가?”
“아니요! 전혀요! 괜찮습니다!”
악천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위천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이다.
그러한 위천의 반응에 악천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그래.”
“헤헤!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아들이다~ 생각하시고!”
“하하!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친근한 위천의 말에 악천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바로 어제.
아니꼬운 눈빛으로 위천을 바라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 악여화와 서은설, 그리고 방선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헤헤!”
“하하!”
당사자인 악천후와 위천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아주, 지들끼리 행복한 세상이었다.
“소교주님, 조금만 더 머물다 가시지요.”
그런 둘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은은한 미소를 지은 방선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일이 많았다.
은설과 시간을 보내어야 하고, 또 천산으로 위천 이 녀석을 데려다주기도 해야 했다.
하지만.
“형님…….”
위천 이 눈치 없는 녀석이 나를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조금 더 머물고 가자는 뜻이었다.
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죽는다.”
움찔.
나의 입에서 나온 경고.
그 경고에 움찔한 위천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찌릿!
악여화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 저거 진짜…… 후우.
천이 녀석이 좋아하는 여인이라 때리지도 못하고.
저 눈빛, 거슬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착한 내가 참아야지.
“극신, 조금 더 머물자. 다른 대원들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면 되잖아.”
그때, 방선과 나의 눈치를 살피던 서은설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은설, 왜 너까지 그러는 거야?
생각지 못한 은설의 배신에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은성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감찰이면 각 문파와 세가에 가는 거지? 재미있겠다.”
그래, 감찰대주로서 무림의 세가와 문파에 가지.
그러고 소리치겠지.
긴급 감찰이다! 모두 엎드려!
하고 말이다.
그런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서은설을 보며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밥 맛있습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악천후를 바라보며 물었고.
“네! 술도 있습니다!”
악천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악천후의 대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다 마음에 안 들지만, 술은 마음에 드네.
* * *
“뭐냐.”
조식과 더불어, 악천후가 자랑스럽게 꺼낸 모든 술병을 비우고 방으로 돌아가던 나는,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는 악여화를 발견하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빠안.
그런 나의 물음에도 악여화는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악여화의 행동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라, 피곤하다.”
그러고는 손사래 치며 악여화를 쫓았다.
술이 알딸딸해서 그런가.
피곤했다.
그러한 나의 축객령에.
“고맙습니다.”
악여화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고맙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에.
“본가를 살려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 저렇게 말 길게 하는 거 처음 본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보다는 길게 말한 것이 신기했던 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상인같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신기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뭐래, 가라.”
아침부터 악가의 모든 무인들이 나를 향해 감사 인사를 표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향해 고맙다 표현하는 무인들에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기까지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듯, 나를 향해 고맙다는데, 뭐가! 하고 소리치는 것도 이상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무인들과 다를 바 없는 그녀의 감사 인사에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싱긋.
“……?”
악여화가 웃었다.
한겨울, 눈이 가득한 거리 속 한 떨기 꽃과 같은 그녀의 미소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악여화의 미소. 아마 위천 녀석보다 내가 먼저 보지 않았을까?
솔직히 진짜 놀라웠고, 제법 예뻤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뭐, 웃으니까 귀엽네.
우리 천이한테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미소를 보니 뭐, 잘 어울리네.
아주 조금.
그렇게 생각을 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하아, 이거 어쩌지?”
어젯밤부터 계속해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서신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귀찮은 감투.
분명 무림맹주의 제안에 천마 그 양반이 신나 하면서 허락했을 거다.
그 양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지금쯤,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겠군.”
은설과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여행을 보내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뜻에 반하도록 행동한 천마와 그런 천마를 혼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서신을 집어 들었다.
“해야겠네…….”
서신에 적힌 임명장이라는 글귀.
그 글귀를 보며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귀찮은 감투.
내가 써야 할 것 같았다.
“X나 막 해야지.”
무림맹주인 외조부와 천마가 나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도록 말이다.
보아하니 제법 힘 있는 감투였기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하면 다 때려 부수어도 된다.
명분은 나한테 있기 때문에 말이다.
음…… 가장 처음으로 소림에 갈까?
소림에 있는 불상이 수상하다고 한번 살펴보는 거지.
크크.
재미있겠다.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서신을 다시 읽어 본 나는 그것을 탁자 위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알딸딸한 것이 딱 잠이 들기 좋을 것 같았다.
그에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막 잠에 들려던 순간!
“소교주님!”
“형님!”
“아씨.”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잠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