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제194장 멸문 滅門
“형님의 무례는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방문을 나선 위천.
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방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위천의 정중한 사과에 방선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이가 먼저 무례를 저질렀는걸요.”
방선 또한 알고 있었다.
악천후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에 방선이 괜찮다 대답하자 위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악천후가 잘못한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위천의 입장에서 그는 악여화의 아버지이다.
그러다 보니 애매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악천후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빴던 위천이었다.
하지만 화내기도, 뭐라 하기도 애매했고, 그런 자신을 대신해서 형인 위극신이 나서 주었다.
자신과 달리 그는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보호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위극신이라면 위천의 보호자로서, 악여화의 보호자인 악천후와 동등하게 대화가 가능하니 말이다.
위천의 미소와 함께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악여화가 입을 열었다.
“방, 가요.”
“!!”
방선의 귀로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방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딸인 악여화.
배 아파 낳은 자신의 딸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가장 최근에 들었던 기억이 너무나도 오래되어서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입을 열지 않았던 자신의 딸이 입을 열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너는 괜찮아? 형님의 기세에 정면으로 노출되었잖아.”
위천과 서은설, 둘 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방선만 신경 쓰고 있었기에 악여화는 위극신의 기세에 정면으로 노출되었었다.
물론 그녀는 무공을 익힌 일류고수였지만, 그래도 상대는 절대의 경지를 넘은 고수.
그런 고수의 기운에 노출된 악여화가 걱정되었던 위천이 물었다.
그러한 걱정스러운 위천의 물음에 악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끄덕.
“아, 조금 힘들었지만 괜찮았다고?”
끄덕끄덕.
“저번에도 형님이 그런 적이 있었다고? 언제?”
끄덕, 도리도리.
“헐…… 그때? 미안해……. 내가 빨리 너에게 고백을 했어야 하는데…….”
악여화의 고갯짓에 위천이 울상을 지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에 악여화가 위천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고는
도리도리.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위천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뭘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이어 나가는 위천을 보며 방선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악여화.
그녀가 감정을 아예 표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저 모습처럼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었고, 그래서 답답해했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용인들까지 모두가 말이다.
헌데.
“여화, 너는 너무 착한 여자야. 고마워.”
고갯짓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내가 등장했다.
비록 그 사내가 천마신교의 이공자였지만 방선의 입장에서는 그저, 악여화와 대화가 가능한 사내라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내심 악여화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걱정이 해소되자 방선의 파리했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위천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갯짓만 하는 악여화의 옆에서 풍부한 표정과 적극적인 언사로 감정을 표현하는 위천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호호.”
그 모습이 보기 너무나도 좋았다.
그에 방선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갑작스러운 방선의 웃음에 세 명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식사는 하셨나요?”
그런 세 명과 눈을 마주친 방선은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고, 그에 세 명은 그제야 인지했다.
아침에 일어나 아직 공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밥 먹으러 가요.”
그런 셋의 표정에 식사 전이라는 것을 눈치챈 방선이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서은설에게 살짝 기대었다.
“부축해 줄 수 있죠?”
“네.”
자신에게 기대며 묻는 방선을 보며 서은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방선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고.
꽈악.
그 뒤로, 악여화가 위천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손…….”
그런 악여화의 행동에 위천은 얼굴을 붉혔지만 악여화는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위천은 새색시와 같은 모습으로 그런 악여화의 뒤를 따랐다.
* * *
호록.
산동악가의 집무실.
지독한 침묵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오랜 시간 동안 마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미 식어 버린 차에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차는 따듯해야 맛있는데.’
차 茶.
솔직히 별로 맛없었다.
술처럼 찌르르한 맛이나, 단술처럼 단맛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차가 좋았다.
아침. 일어나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면 몸을 데워 주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준다.
게다가 긴 회의가 지속될 때에는 따뜻한 차 향기가 뇌를 맑게 해 주며 피로를 풀어 주었다.
그에 나는 따뜻한 차를 선호했고, 기분을 새롭게 하기 위해 들었던 차가 식으니 김이 새었던 것이다.
움찔!
그런 나의 불편한 기색에 자리에 앉아 있던 악천후가 움찔했다.
조금 전.
확실하게 관계를 재정립하고 나서 계속 저 모습이었다.
‘뭐, 저게 당연한 거지.’
본교에서도 산동악가와 비슷한 세를 지닌 중견마가 中堅魔家의 가주도 나의 앞에서 저런 자세를 취한다.
그렇기에 나는 편하게 있으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계속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나에게는 편했으니 말이다.
“가주.”
“예, 소교주님.”
그렇게 찻잔을 내려놓은 내가 입을 열자 악천후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충 짐작하다시피 저의 동생과 가주의 여식이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찔.
그래도 아버지라는 건가.
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움찔한 악천후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겁을 집어먹은 눈동자가 아닌, 절대 안 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동자였다.
그에 나는 속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만약 겁을 먹고 마음대로 하시라 하였다면 조금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도 무인인데, 어느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이 정도의 기개는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본교의 사돈 가문이 될 자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저희는 정도를 걷는 가문입니다.”
흔들리는 몸과는 달리 전혀 흔들림이 없는 두 눈동자.
그런 악천후의 두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자세를 앞으로 기울여 손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그곳에 턱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도 魔道 가 정도 正道 인데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쩝.
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악천후가 대답했다.
나이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
나의 말장난에 피식 미소를 지을 법도 한데 악천후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재미없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악천후의 확고한 대답에 나는 깍지를 풀었다.
“마도의 정점에 있는 우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입니까?”
“저희에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나의 물음에 악천후가 대답했다.
제법 예의 있는 거절이었다.
“허면, 악 소저를 진주언가에 보내려고 하는 겁니까?”
“예, 이미 약속을 한 곳입니다. 그리고 진주언가는 저희 가문과 비슷한 집안입니다. 전혀 무리가 없지요. 여화에게 있어서도 그편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흐음…….”
악천후의 확신 어린 대답에 나는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악여화 때문에 고민하냐고?
아니다.
그저 저 멍청한 사내를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에 나는 계속해서 턱을 쓰다듬었고, 그것을 기회라 여겼는지 악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동생분을 소교주님의 가족과 어울리는 여인을 만나게 하시지요.”
“…….”
계속해서 확고하게 거절하는 악천후의 모습.
그 모습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할지 정했던 것이다.
‘그래, 내 성격대로 가자.’
답지 않게 너무 오래 고민했다.
그냥 내 취향대로 진행하면 될 것을 말이다.
그에 나는 입을 열었다.
“여화가 천이를 좋아하고, 천이가 여화를 좋아합니다. 하여 저는 둘을 이어 줄 생각입니다.”
“소교주님!”
나의 확고한 대답에 악천후가 언성을 높였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결정하세요, 천이를 허락할지, 아니면 멸문을 당할지.”
“!!”
나의 입에서 또다시 나온 멸문이라는 단어.
그 단어에 악천후는 두 눈을 부릅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천마 가문을 거부한 곳입니다. 그냥 살려 둘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당연히 흔적을 없애야지요.”
당연한 사실.
그것을 알려 주며 말이다.
“지금…… 협박하시는 것입니까…….”
분노로 인해 몸이 떨리는 것일까?
악천후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그에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입을 열었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무슨 기회 말입니까?”
“당신 가문을 살릴 기회.”
“…….”
나의 대답에 악천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뭐, 상당히 거슬리는 눈빛이지만 이건 넘어가고.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하세요.”
그러고는 선택을 강요했다.
그에 악천후의 두 눈가가 붉어졌다.
“저희 가문은 백 년 전 협을 행하며 청도현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세운 곳입니다.”
“압니다.”
이미 하오문의 정보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에 악천후가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흐를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저희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신교와 사돈 관계를 맺는다면 본가의 뿌리마저 흔들릴 것입니다.”
정도의 가문.
협을 행하는 의협심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문의 가주인 악천후가 말했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나의 대답에 악천후는 고개를 숙였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존심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에 나는 품속에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악천후의 앞에 놔두었다.
“……?”
그런 나의 행동에 고개를 숙였던 악천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쓰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나의 말에 악천후가 대답했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진주언가에 보낼 서신이죠.”
“!!”
“어서 쓰세요. 태중혼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소교주님!”
나의 말에 악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악천후를 바라보았다.
“쓰세요.”
우웅!
나의 말과 동시에 몸에서 뿜어져 나온 폭발적인 기세.
“크윽!”
그 기세에 악천후는 신음을 흘렸고, 결국.
털썩.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친히 악천후의 손에 붓을 쥐여 주었다.
아주 친절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진짜, 나만큼 착하고 친절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속으로 나 자신에 대한 칭찬을 하며 나는 붓을 쥐고 있는 손을 부르르 떠는 악천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예쁘게 쓰세요.”
받는 이가 기분 좋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