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제192장 산동악가 山东握家
“이게 사실이야?”
서은설의 방.
그곳을 찾은 나는 내가 내민 서류를 읽고 놀란 표정을 짓는 서은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나의 대답에 서은설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서류에 적힌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은 서은설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일게.”
“응?”
이글거리는 서은설의 눈빛과, 아름다운 입과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
평소와 다른, 낯선 은설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서은설은 다시, 흔들림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간, 이 쓰레기는 내가 죽이겠다고.”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비장하기까지 한 서은설의 말에 나는 당황해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탓!
“이 쓰레기는 죽어야 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이는 서은설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언간은 죽일 놈이다.
분명 죽일 놈이었지만 굳이 서은설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죽이면 죽였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나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은설이의 손에 피를 안 묻힐 수가 있을까?
우선 서은설의 흥분부터 가라앉혀야겠지?
무슨 말을 해야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힐까?
그렇게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지금 갈까?”
어느새 푸른 거궁을 등에 둘러멘 서은설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물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은설은 바로 방을 나서서 활을 빼 들 것이다.
그리고 언간이 가두어져 있는 방을 향해 활시위를 잡아당길 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문을 관통해 언간의 미간에 그대로 꽂혀 즉사를 시키겠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자기가 죽는다는 것도 인지 못 한 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법, 괜찮은 변명거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에 나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죽이지 않아.”
“……?”
나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의 의외였을까?
그녀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어린아이까지 인신매매했던 쓰레기야. 그런 녀석을 단번에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벌이야.”
“그러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파괴시켜야지?”
“파괴?”
“응.”
언간이 가지고 있는 명성, 지위 등 모든 것들.
그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겠다는 나의 말에 서은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자세를 바로잡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자세를 앞으로 기울였다.
“자세히 말해 봐.”
다행이다.
나의 의견이 솔깃했는지 그녀는 흥미를 보였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 전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은설을 바라보았다.
급조된 나의 계획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 * *
산동악가 山洞握家.
산동성의 청도현을 지배하고 있는 산동악가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내부에는 수많은 하인들과 하녀들이 바삐 움직였고, 총관급 이상의 간부들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당신, 표정 풀어요.”
호위무인까지 포함하여 약 스무 명의 사람들로 둘러싸인 정문의 한가운데.
산동악가의 안주인이자 악여화의 어머니인 방선이 자신의 옆에서 인상을 굳히고 있는 악천후를 향해 말했다.
무림맹에서의 볼일을 끝낸 후, 말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악천후.
그는 자신보다 먼저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악여화 때문에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게다가 함께 오고 있는 인물은 천마신교의 소교주와, 이공자. 그리고 사황성주의 제자이다.
정파의 명문가주로서 자신의 여식이 그런 인물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도 탐탁지 않았던 악천후는 방선의 지적에 찌푸려진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언간, 그자는 도대체 뭐 하고 있단 말인가.”
자신의 벗인 언진게의 아들 언간.
비록 무공은 떨어지지만 뛰어난 머리와 예의 바른 성격으로 현현공자라 불리는 언간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악천후는 함께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언간을 떠올리며 언짢은 기색을 지었다.
그러한 악천후의 기색에 방선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여화가 처음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자리예요. 표정 풀어요.”
악여화의 서신을 받고 정문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악천후와 방선.
불편한 악천후와 달리 방선은 지금 상당히 기분 좋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부터 말은 물론, 자신의 감정 또한 잘 표현하지 않았기에 방선에게 있어서 악여화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고 하였다.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아 친구는커녕, 인간관계를 이어 나가지 못했던 자신의 딸이 말이다.
천마신교의 인물?
사황성주의 제자?
무림인이 아닌 방선은 다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딸을 외로움에서 구제해 준 고마운 은인일 뿐.
그렇기에 방선은 악천후의 이러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림인들이 타 세력을 배척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좋든 싫든, 무가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싫어함과 동시에 싫은 티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은인과 같은 그들에게 혹여나 실수를 할까 두려웠던 방선은 악천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화에게 상처 주지 마세요.”
“부인!”
방선의 경고 어린 말에 악천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방선의 언사는 상당히 무례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악천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모습은 상당히 두려웠지만 방선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그의 두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는 여화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어요, 이제는 여화가 원하는 대로 해 줘요.”
“녀석은 산동악가의 여식이오! 게다가 뛰어난 무재…….”
“그만.”
악천후의 입에서 늘 똑같은 말이 튀어나오자 방선은 차가운 어조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번에도 여화에게 상처를 준다면 저는 여화를 데리고 본가로 가겠어요.”
고위 관료의 여식인 방선.
그녀의 선언에 악천후가 침음을 흘렸다.
방선의 친아버지인 그는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높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천후와 방선의 대화가 일단락이 되었고, 곧.
“저기 보입니다!”
호위를 서고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저 멀리 보이는 일행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악천후와 방선은 고개를 들었고, 곧 볼 수 있었다.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며 옥색의 섭선을 살랑 흔들고 있는 미남자와, 그의 옆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어린 청년. 그리고 푸른 눈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인과 자신의 여식, 악여화가 말이다.
잠시 후.
“어서 오시오.”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 그들 모두가 산동악가의 정문 앞에 멈추어 서자 가주인 악천후가 한 걸음 나서서 그들을 반겨 주었다.
비록 일행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은 천마신교의 인물.
심지어 그중 한 명이 소교주이며,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고수이다.
그렇기에 악천후는 최소한의 예를 갖추며 그들을 맞이했고, 그에 옥색의 섭선을 쥐고 있던 미남자, 위극신이 섭선을 접어 품속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 위극신이오.”
꿈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약관의 청년.
위극신의 하오체에 악천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예를 중시 생각하는 그였기에 위극신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극신의 위치를 생각하며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만약 지금 위극신이 홀로 미쳐 날뛴다면?
본가는 멸문이다.
마교의 지원?
아니, 그런 것 필요 없이 소교주인 위극신 홀로 가능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절대고수였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악천후는 애써 미소를 짓고는 위극신을 바라보았다.
“산동악가에 온 것을 환영하오.”
끄덕.
악천후의 인사에 위극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에.
“안녕하세요? 위천입니다.”
해맑은 미소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어린 청년이 인사를 건네어 왔다.
움찔!
위천의 해맑은 미소.
그 미소에 악천후가 움찔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미소가 돌아오니 괜히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에 악천후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위천을 바라보았다.
“반갑소이다. 모두 안으로 드시오.”
위천에게 인사를 하고 서은설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한 악천후.
그가 몸을 돌리며 일행들을 안으로 안내했고, 일행들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 * *
‘저자가, 창협 악천후군.’
산동에서 유명한 절정고수로 젊은 시절 진주언가주와 함께 협행을 해 왔던 고수로 유명한 악천후.
지금은 산동악가의 가주로서 가문을 잘 굴리고 있는 악천후를 보며 나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하오문의 정보로 인해 이미 악천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예를 중시한다는 것도, 마인들을 싫어한다는 것도 말이다.
젊은 시절 수많은 마인들을 보고 싸워 왔던 그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거짓된 마공을 익힌 자들은 생각보다 많았으며 쓰레기 짓을 엄청나게 많이 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내 동생이 좋아하는 여인의 아버지라 하더라도 내가 굽힐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저자가, 방선.’
현 황제, 즉 주윤문의 스승이자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신하, 방효유의 외동딸 방선.
동시에 악여화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하오문을 통해 정보를 듣기 전에는 몰랐다.
설마, 악여화가 그의 손녀일 줄은 말이다.
주윤문은 알고 있었을까?
위천과 악여화를 놀리던 주윤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더 친근하게 악여화를 대했겠지.
그때.
방선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린 그녀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에.
싱긋.
방선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 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악천후와 달리, 방선은 우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나 보다.
“위천 공자라고 했지요?”
“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렇게 나와 눈이 마주친 방선은 고개를 돌려 악여화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위천에게 물었다.
그에 위천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친근하면서도 싹싹한 위천의 대답에 방선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이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여화와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여화가 저랑 친구가 되어 준 거예요!”
방선의 감사 인사에 얼굴을 붉힌 위천이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그런 순수한 모습에 방선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우리 여화 잘 부탁해요.”
“네!”
방선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에 위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위천 이 녀석.
역시 저 녀석의 미소와 호감 어린 인상은 사기적이었다.
벌써부터 장모가 될 여인에게서 호감을 얻어 내다니 말이다.
“크흠! 안으로 드시오!”
그때.
방선과 위천의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 응접실에 도착한 악천후가 헛기침을 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물론 찡그러진 얼굴로 말이다.
그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또 우리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 존재이며,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