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제171장 위천의 본심 本心
“자네 왔는가?”
정마대회의 끝을 기념하며, 다음 날 있을 회동의 무사 종료를 위해 열린 연회.
명문가의 수장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 젊은 청년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산동악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러한 사내, 산동악가의 가주이자 창협 槍俠 으로 이름이 높은 고수, 악천후의 반가운 인사에 젊은 청년이 예를 차리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허허! 그런 깊은 예는 필요 없네. 곧 가족이 될 사이가 아닌가?”
그에 악천후는 악여화의 태중혼약자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벗, 권협 拳俠 언진게의 아들에게 친근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래, 그래. 이번 대회는 아쉽게 되었네.”
순위는커녕,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한 언진게의 아들 언간.
비록 무공은 뛰어나지 않지만 뛰어난 머리와 협의심으로 무림인들에게 현현공자 玄玄公子라 불리는 언간을 보며 악천후가 아쉽다는 어조로 말하자 언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제 실력이 부족한 것이니 아쉽지는 않습니다.”
“하하! 그래, 그 대신 자네는 똑똑하지 않은가?”
“그저 말과 잔재주를 잘 부리는 편이지요.”
악천후의 칭찬에 언간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한 언간의 모습이 더욱더 마음에 들었을까?
악천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 좋아 보이는군.”
그렇게 악천후가 언간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순간.
한 중년 사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사내의 난입에 악천후는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게!”
진주언가의 가주이자, 악천후와 함께 권협 拳俠 으로 이름 높은 언진게.
자신의 하나뿐인 벗의 등장에 악천후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언진게 또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 얼굴 못 보고 가나 걱정했네.”
“내가 할 말일세! 왜 이렇게 늦게 왔는가?”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말을 오래 타니 너무 힘들더군그래.”
“껄껄! 옛날에는 하루 종일 말을 타도 피곤하지 않았던 자네가?”
“그러니까, 이제는 한 시진(두 시간)도 못 타겠네.”
젊은 시절.
창과 주먹을 들고 함께 무림을 활보했던 협객.
이십 대 청춘을 함께 보낸 두 명의 벗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언간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말이다.
그러한 언간의 모습을 발견한 악천후.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화를 찾는가?”
“아, 죄송합니다. 아쉽게 사강전에서 패배한 악 매를 위로하고 싶어…….”
악천후의 물음에 언간이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그에 악천후가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 죄송하단 말인가! 지아비가 될 자네가 위로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아직 악 매의 의중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괜히 제가 함부로 행동했다가 악 매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악천후의 말에 언간이 웃으면서도 자신이 없다는 듯 두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에 악천후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젊은 시절. 내 아이를 낳으면 이 녀석과 짝을 맺어 주기로 약속했거늘!”
“천후. 여화와 간이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네.”
두 눈에 힘을 주며 강하게 말하는 악천후의 모습에 언진게가 나섰다.
그에 악천후는 고개를 돌려 언진게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게. 여화는 내가 하라는 대로 평소처럼 대답도 안 하고 따를 테니 말이야.”
“그런가?”
“그렇네, 예쁘지만 도통 말이 없어서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네. 이보게 사위. 자네는 괜찮지?”
언진게의 물음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린 악천후.
그가 곧 고개를 들어 언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친근하게 사위라 칭하며 말이다.
“저에게 과분하지요.”
그러한 악천후의 물음에 언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하하! 고맙구만!”
언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악천후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여화는?”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악여화를 불러 언간과 시간을 함께 보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악천후의 물음에 호위무사가 당황해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악천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대답하도록.”
악천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절정고수의 매서운 기세.
그 기세에 식은땀을 흘린 호위무사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먼저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뭐라?”
“죄송합니다! 아가씨의 경지가 저희보다 높아…….”
“멍청한!”
호위무사의 같잖은 변명에 악천후는 울분을 토하며 무사를 노려보았다.
그에 호위무사는 고개를 깊게 숙였고 악천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김을 강하게 내뿜었다.
“허허, 이보게 진정하게. 보는 눈이 많네.”
그러한 악천후의 행동에 언진게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악천후를 만류했고, 그에 주변의 시선을 깨달은 악천후가 호흡을 고르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언간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군. 이 아이가 먼저 본가로 돌아간 듯해.”
“그렇군요. 그럼 제가 길을 따라가서 악 매와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악천후의 사과에 언간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에 악천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래 주겠는가?”
“비록 악매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무림은 무공만으로는 힘든 곳이지요. 부족하지만 제가 함께하면서 악매와 함께 산동악가로 가서 가주님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네가 그러면 되겠구나. 호위무사들도 데리고 가거라.”
언간의 대답에 옆에 있던 언진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에.
“네, 풍권단주를 대동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진주언가의 제일무력대인 풍권단.
그곳의 단주를 대동하겠다는 언간과 흔쾌히 수락하는 언진게의 모습에 악천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악천후의 시선에 언진게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악천후를 바라보았다.
“벗의 여식이 위험한데, 당연히 도와야지.”
“고맙네!”
“아닐세, 반대로 간이가 이러한 상황일 때 자네가 도와줄 것이지 않은가?”
“그걸 말이라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언진게의 말에 악천후가 콧김을 내뿜으며 강하게 대답했다.
그에 언진게는 미소를 지었고, 옆에 있던 언간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럼, 서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겠다는 언간의 모습에 악천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언간은 몸을 돌려 연회장을 벗어났다.
“아들 잘 키웠구만.”
“자네도 딸 잘 키웠네.”
그런 언간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악천후가 말하자 옆에 있던 언진게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두 중년 고수의 기대를 받으며 걸음을 옮긴 언간.
연회장을 벗어난 그의 얼굴은 좀 전과는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망할 X.”
* * *
본가로 먼저 돌아가려는 악여화, 우연찮게 강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났고, 그녀의 이야기에 걱정되어 산동악가로 동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의 설명을 들은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위천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래서, 같이 가출했다?”
천이에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 나의 어조에 당황했을까?
“나는 가출이 아니라, 악 소저가 걱정되어서…….”
위천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에.
스윽.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위천을 바라보았고.
움찔!
“…….”
움찔한 위천이 고개를 숙였다.
위천도 알 것이다.
내가 지금 진짜로 화가 났다는 것을 말이다.
“천아.”
“예…….”
“지금 어머니는 홑몸이 아니시다.”
“네…….”
현재 우리의 동생을 회임 중인 어머니, 천소화.
어머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의 걱정도 없이 웃으며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다.
헌데 이 상황에서 아들이란 놈이 가출을 한다?
그것도 고작 여자를 집에 데려다준다는 이유로?
“네가 강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채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중소문파의 문주와도 같은 실력을 지닌 위천.
절정의 경지에 접어든 그를 바라보며 내가 인정하듯 말하자 위천이 고개를 들었다.
“헤헤.”
그러고는 웃어 보였다.
“웃어?”
평소에는 귀엽고 싱그러운 미소지만 지금은 짜증 났다.
그에 내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위천이 다시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당당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허락을 맡고 오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장로 중 한 사람을 붙여 줬을 것일 텐데.”
“그러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네 재미 때문에 어머니를 걱정하게 만든다는 뜻이냐?”
“죄송합니다.”
후우…….
아직은 철이 없는 건가.
평소 어른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주던 위천의 철없는 행동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위천을 바라보았다.
“돌아가.”
“하지만…….”
“돌아가라 했다.”
나의 명령과도 같은 말에 위천이 고개를 들며 반항했지만 나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녀석의 반항을 미리 차단했다.
그에 위천이 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억울하고 분했는지 녀석의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부릅뜬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녀석의 모습이 제법 신선했지만 지금은 허락할 수 없었다.
홑몸이 아닌 어머니를 걱정시켜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위천이 걱정되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꼴은 다시 못 본다.’
전생에서 내가 저질렀던 끔찍한 실수, 그리고 그로 인해 이루어진 끔찍한 상황.
그 상황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천이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의 용납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단호한 표정을 말이다.
“극신…….”
그런 나의 단호한 모습에 서은설이 당황해하며 나를 불렀지만 나는 무시했다.
지금 은설의 목소리에 응했다가는 천이의 외유를 허락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런 나의 모습에 서은설 또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상황을 대충 정리한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악여화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상당히 당황스러웠나 보다.
하긴 그럴 만했다.
자기 때문에 위천이 나에게 혼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철없이 혼자 본가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동행하겠다는 위천의 말에 냉큼 동행한 악여화의 행동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나는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악 소저, 미안하지만 천이는…….”
“형은!”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분노가 가득한 위천의 목소리가 나의 말을 막아섰다.
“……?”
처음이다.
나의 앞에서 언성을 높인 천이의 행동이 말이다.
그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위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어진 두 눈과, 그 속에 어려 있는 원망이 말이다.
‘아……’
위천의 원망 어린 두 눈동자에 나는 순간 가슴이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형은! 맨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나는 왜 안 돼!”
“…….”
“나도 형처럼 즐기고 싶다고! 신교에서 벗어나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고 싶고! 벗도 만들고, 의형제도 만들고! 추억을 만들고 싶어!”
“…….”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본교에만 있어야 해? 내가 그렇게 어려? 약해? 나도 형처럼 즐기기 위해서 밤잠을 줄여 가며 수련하고 또 수련했어! 이제는 나도 좀 즐기고 싶단 말이야!”
아…….
내가 멍청했다.
그동안 홀로 쌓아 왔던 울분이 폭발했을까?
나를 향해 언성을 높인 위천의 두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이의 두 눈에서 떨어진 한 줄기의 눈물.
그 눈물 속에 담긴 원망과, 그동안 외로웠고, 또 나를 부러워했을 천이의 속마음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천이의 말이 맞았다.
감히 내가 뭐라고 천이에게 훈수를 둔단 말인가?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놈이 바로 나인 것을.
나는 천이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할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천아, 진정해.”
그렇게 내가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서은설이 위천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에 위천은 차올랐던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다물었고, 우리 네 명의 사이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내려앉은 채로 약 일 각(십오 분)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들어 위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감히 내가 뭐라고 너를 말리겠냐.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나는 너에게 못난 형인 것 같아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