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제125장 어머, 실수 失手
“물러서라.”
“지랄.”
내가 왜 물러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권진욱의 경고에 나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었다.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웠다,
아니 솔직히 가소로웠다.
그런 나의 대답에 권진욱이 다시 주먹을 들었다.
어구, 무서워라.
그에 나는 서은설을 안고 뒤로 물러섰다.
아직은 정면으로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은설을 안고 뒤로 물러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리관의 옆에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백리관을 바라보았다.
“권진욱!!”
나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그답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권진욱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늘 호쾌한 미소를 지으며 정파인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무인이라 알려진 패천황 백리관.
알려진 그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무서운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정하시네.’
전생에서 딱 한 번 본 적 있다.
나를 향해 짜증을 부리듯 투레질을 한 말을 단칼에 죽였을 때.
그때, 생명을 함부로 앗는 나의 행동이 너무나도 이기적이라며 이렇게 대로하셨다.
그때 나는 스승님이 왜 화를 냈는지 몰랐지만 세월이 흘러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스승님이 고마웠다.
그 전까지는 나는 살생 殺生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의 폭발적인 살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권진욱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까득.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모든 무력대주들은 눈치를 살피면서도 백리관의 뒤에 섰다.
늘 권진욱의 편을 들던 백사단의 마사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사황성의 모든 수뇌부들과 대치하게 된 권진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불손한 표정으로 백리관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꿈을 짓밟은 아비가 어찌 당당하게 살까. 나는 오늘 성주에게 죽을 것이오.”
“…….”
비장한 권진욱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팔이 으스러져 무인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권강.
그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의 모습에 잠깐 머뭇거렸던 것이다.
그렇게 수뇌부들이 머뭇거리던 순간.
부웅!
콰악!
“끄아아악!”
권진욱이 옆을 향해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의 폭멸권 한 번에 근처에서 눈치를 살피며 지켜보던 세 명의 무인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말 그대로 폭발.
순식간에 강력한 권강으로 무인들을 폭발시켜 버린 권진욱이 자세를 낮추며 백리관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동무들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파앗!
그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미친놈이!!”
그에 격노한 백리관이 움직이려는 순간!
스윽!
콰앙!
내가 먼저였다.
사황성의 일반 무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휘둘러진 권진욱의 주먹을 막아선 나.
그런 나는 가까워진 권진욱의 얼굴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해 주니 고맙네.”
“닥쳐라!”
콰앙!
나의 말에 권진욱이 다시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주먹을 휘둘렀고, 나는 가볍게 막아서며 뒤로 물러섰다.
“모두 물러가도록!”
그러고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황성의 무인들에게 경고했다.
그에 일반 무인들은 황급히 백리관의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넓은 자리에서 권진욱과 대치하게 된 나는 급하게 꺼내었던 옥색의 섭선, 뇌선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스르릉.
그러고는 허리 안쪽 깊숙이 잠들어 있던 나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 전체가 어두운색인 흑색의 검.
그 검을 쥔 나는 권진욱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 아들의 팔을 그렇게 만든 서은설 공녀의 약혼자다! 나를 죽인다면 네가 가는 길은 외롭지 않겠지?”
“후후…….”
나의 외침에 권진욱이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에 나 또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멍청한 새X.
오늘 저 새X는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웃음을 흘리는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을까?
눈가를 찌푸린 권진욱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에 나는 그와 반대되는 표정,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네놈이 싫었어.”
“잘난 척하는 것도, 여유로워하는 것도 싫었지.”
“지가 성주인 척하는 것도, 지가 잘난 것처럼 센 척하는 것도 싫었지.”
“…….”
“훗.”
가소로웠다.
나의 말발에 말문이 막힌 권진욱을 보며 나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권진욱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머, 무서워라.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웠다.
그때, 권진욱과 대치를 이루던 나의 귀로 백리관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교주는 물러나게!”
“제가 하겠습니다!”
이 사내는 내가 죽이고 싶었다.
성주가 부성주를 직접 죽이는 것보다는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부성주를 죽이는 그림이 더 좋으니 말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리관의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성주인 내가 정리하는 것이 맞아!”
“제 약혼녀를 죽이려 한 자입니다!”
“내 제자를 죽이려고 한 자이기도 하지!”
“…….”
거참,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스승님 말발이 상당히 늘었다.
도저히 내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백리관의 행동에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에 백리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 소교주는 그만…….”
그때!
백리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진욱이 매서운 기세를 내뿜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저쪽도 나처럼 상대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나 보다.
나에 대한 악감정인지,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권진욱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왜냐고?
그래야 내가 그를 죽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려 나를 향해 달려드는 권진욱.
그런 권진욱을 보며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런!”
뒤에서 백리관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건 넘어가고.
씨익.
나는 검병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서걱!
“어머, 실수.”
순식간에 권진욱의 목을 베어 버렸다.
진짜, 어머 실수다.
* * *
“형님!”
“오! 이게 누구야! 취걸이 아닌가!”
호북 지역의 형문 荆门.
무림맹에서 내려온 임무를 마치고, 부단주인 민규와 함께 객잔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있던 천풍은 자신을 부르는 반가운 얼굴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단주님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앉아.”
그런 천풍의 옆.
민규를 향해 반가운 얼굴, 개방의 후개인 취걸이 아는 척을 하자 민규가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에.
“실례하겠습니다!”
공짜 밥을 얻어먹을 생각에 취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앉았다.
그에 천풍은 피식 미소를 지었고, 이내 점소이를 불러 그의 식사와 함께 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크으! 감사합니다!”
그런 천풍의 행동에 취걸은 호들갑을 떨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천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취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한 삼 년 만인가?”
“예, 그 정도 되었지요.”
천풍의 물음에 취걸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개방의 정보력이 필요하기에 정식으로 공조 요청을 보내 개방과 무림맹이 함께 맡았던 한 개의 임무.
개방에서는 후개인 취걸을 보내었고, 무림맹에서는 최고의 무력대인 천풍의 청룡단 靑龍團 을 보내었다.
그때,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적이 있었던 천풍은 후개의 대답에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 즐거웠는데 말이야…….”
이름에 취 醉 가 들어갈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취걸.
그리고 술만 보면 미쳐 버리는 천풍과 민규.
이 셋은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눈만 마주치면 술을 기울였고, 또 아무리 술을 퍼마시더라도 다음 날만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즉, 과도한 음주는 하지만, 다음 날의 일상에는 지장이 없는, 아주 이상적인 주도 酒道 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 시절.
매일매일 술을 퍼마시던 시절을 떠올리며 천풍이 말하자 취걸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실례합니다!”
때마침 점소이가 술병과 수저를 들고 왔고, 취걸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천풍을 향해 내밀었다.
“오랜만에 한잔하시지요!”
“그래, 좋군.”
“어이, 나도 있다고.”
천풍에게만 병을 내미는 취걸을 보며 민규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취걸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민규를 바라보았다.
“어이쿠, 형님에게 정신이 팔려서 부단주님에게 소홀했습니다.”
“그러면 잘하도록 해. 나 삐지면 오래가니까.”
취걸의 장난스러운 말에 민규 또한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에 천풍은 피식 미소를 지었고.
챙!
이내 세 개의 술병이 시원하게 부딪쳤다.
꿀꺽꿀꺽.
“키야아!”
목이 많이 말랐던 것일까?
술 한 병을 그대로 들이켜는 취걸의 모습에 천풍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많이 달렸나 보군.”
“예, 급한 정보가 있어서요.”
천풍의 물음에 취걸이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에 천풍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떤 정보 말인가?”
속으로는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천풍의 물음.
그 물음에 겉으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벼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천풍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던 취걸이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무협공자 말입니다.”
“오! 그 후배 잘 알지!”
취걸의 대답에 천풍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협공자 武俠公子.
짧게 만난 인연이었지만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청년이었다.
술도 좋아했고, 의협심도 있었던 진국의 사내.
그의 벗이었던 적협공자 赤俠公子 또한 진국이었던 사내였고 말이다.
아무튼, 반가운 이름에 천풍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겉으로만 말이다.
그에 취걸이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아니 술기운이 조금 오른 듯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무협공자가, 위마참군과 동일 인물인 것 같다는 정보입니다.”
“……?”
취걸의 한마디.
그 한마디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천풍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것은 옆에 있던 민규 또한 마찬가지.
그런 둘의 모습에 취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 또한 무협공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에 취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청룡신군 천풍.
그가 사사로이는 조카지만, 크게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인 그의 정체를 알고도 묵인한 것이라면 큰 파장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둘을 보며 취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걸음을 뺐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취걸이 입장을 정리했다.
그에.
스윽.
“자네는 먹고 가.”
“형님……?”
천풍이 자리에서 일어나 취걸에게 말했다.
그에 취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휘익.
이미 천풍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아…… 귀찮네.”
그에 민규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취걸을 바라보았다.
“취걸.”
“예.”
“걱정하지 마.”
“……?”
민규의 말에 취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피식 미소를 지은 민규가 취걸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몰랐고, 그들의 편을 들어 줄 생각도 없어.”
“…….”
“그런데, 다음에도 이딴 식으로 굴면…… 웃으면서 술잔을 나누지는 못할 것 같네.”
“죄송합니다.”
민규의 말에 취걸이 순순히 사과를 건네었다.
그에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보자.”
“예 부단주님.”
민규의 인사에 취걸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민규 또한 천풍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두 명이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취걸.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천풍이 남기고 간 술병을 집어 들었다.
“아이 씨, 없네.”
빈 술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