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제117장 버리다 捨
“어…… 아…….”
뭐야 이거.
우리 은설이에게 추파를 던지길래 여자에 미친 놈팡이인 줄 알았더니, 나의 격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정말 당황한 놈처럼 말이다.
“이봐?”
“아…….”
그런 놈팡이를 보며 내가 다시 부르자 그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멍청한 표정을 수습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마독입니다.”
“…….”
예의 바르다.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으니 독설을 내뱉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나의 독설에 격하게 반응해야 뒈지게 팰 수가 있는데 이건 뭐…….
명분이 없다 명분이.
“그…… 혹시 이 소저가 소협의 연인입니까?”
끄덕.
녀석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이것 참, 나도 너무 착해서 탈이다.
왕일이나, 본교의 아이들이 보았다면 명분이고 나발이고 그냥 패 버렸겠지.
아무튼, 그런 나의 대답에 녀석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이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화났다는 것으로 여겼는지 녀석이 다시 용서를 구했다.
그러고는.
“제가 음식값을 내겠습니다. 그러니 기분 풀어 주십시오. 소저도 정말 죄송합니다.”
“크흠. 괜찮으니 그만 허리를 펴시오.”
절대 술값을 낸다고 하여 기분이 풀린 것이 아니다.
서은설에게도 용서를 구하는 녀석의 모습에 갱생의 여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헛기침을 한번 한 내가 말하자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 이백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은에 위치한 백사문의 소문주인 마독이라 합니다.”
“그렇구려.”
“하하, 저는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녀석의 소개에도 내가 소개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눈치도 제법 있는 놈이었다.
“공자님……?”
그렇게 마독이 뒤로 물러서자 호위무사로 보이는 사내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그에.
“부끄러우니까 빨리 가자.”
마독이 호위무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에 호위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몸을 돌렸…….
“!!”
아니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곧 어정쩡한 표정으로 앉아 잇는 이백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호위대상인 마독을 지나 이백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곧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주님.”
“호오, 훈이구나.”
호위무사, 훈의 인사에 이백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에 나는 이백을 바라보았다.
“아는 자입니까?”
“예, 백사대의 대원이었습니다.”
“아?”
이백의 대답에 서은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에 훈은 고개를 돌렸고.
“!!”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두 눈의 색깔이 달랐지만 틀림없었다.
늘씬한 체형에 아름다운 외모와 이국적인 이목구비, 거기에 푸른색의 거궁 巨弓 까지.
사황성의 소공녀, 서은설이다.
그에 이백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니, 꿇으려고 했다.
“조용히 밥 먹고 싶으니, 그만 물러나세요.”
싸가지 없게 나를 신경 쓰지도 않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식사를 방해하던 훈.
그를 보며 나는 나직한 경고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을 내뿜어 녀석의 몸을 꽉 붙들었다.
사람을 대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받을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나의 경고에 훈이 그제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르르…….
그러고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형의 기운에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으니 두려운 것은 당연지사.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
“예…….”
나의 말에 녀석이 짧게 대답했고, 나는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술 식겠습니다.”
“술은 원래 식어 있습니다.”
“하하. 은설 내 농담 어때?”
“구려.”
“…….”
어정쩡하게 서 있는 훈이라는 사내를 무시하고 우리는 다시 우리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훈과 마독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 *
“후개!”
“왜.”
무협공자라는 존재와 위마참군의 존재에 정신이 팔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 두 존재만을 파고든 후개, 취걸.
그는 수하의 부름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에 헐레벌떡 움막으로 들어선 수하가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무협공자 떴습니다!”
“어디?”
사천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무협공자.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후개는 수하의 보고에 언성을 높이며 대답했다.
그에 수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숙입니다!”
멈칫.
“감숙……?”
수하의 보고에 그대로 굳어 버린 후개.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있는 후개를 바라보았다.
“후개의 예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진짜! 무협공자가 위마참군인 것 같습니다!”
사황성의 공녀, 서은설과의 혼약을 위해 무림을 나선 천마신교의 소교주.
그리고 우연찮게 그와 같은 시기에 등장했고 같은 나이였으며, 고강한 무공을 지닌 무협공자.
그에 자신은 그를 의심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에 개방의 도움을 포기하고 홀로 근거를 찾던 도중.
결정적인 근거가 나왔다.
바로.
무협공자가 사황성의 본거지인 감숙에 도착했다는 수하의 전언이었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딱 걸렸어.”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 * *
“훈.”
위극신과의 만남 이후, 난주에 위치한 백사문 소유의 장원으로 돌아온 마독.
그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호위무사를 불렀다.
“예.”
스무 살의 나이에 백사대에 들어 뛰어난 두각을 보이고, 나아가 백사대주이며 초절정고수인 사령마 死靈魔라 불리는 마사의 눈에 띄어 백사문의 문도가 되어 버린 훈.
그가 자신의 소주인인 마독의 부름에 짧게 대답했다.
“그분이, 정말 백호대주님이셔?”
잘생긴 사내의 옆,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중년인을 떠올리며 마독이 묻자 훈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으아아…….”
마독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미쳤지 미쳤어…….”
얼굴을 쓸며 같은 말만 내뱉는 마독.
훈은 그런 마독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주님에게 가셔야겠습니다.”
“숙부님에게?”
훈의 말에 마독이 고개를 들고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자신의 숙부가 왜 나온단 말인가?
“공자께서 한눈에 반한 여인,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응? 유명한 사람이야?”
훈의 물음에 마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훈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아무리 두 눈 색깔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이국적인 외모를 보고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게 뛰어난 외모에 이국적인 이목구비, 거기에다 푸른 거궁까지.
객잔에 있던 일반 사람들은 몰라도, 사황성의 무인이라면 그녀를 몰라서는 안 되었다.
“서은설 공녀님이셨습니다.”
그는, 사황성의 주인.
패천황 覇天皇 백리관의 유일한 제자였으니 말이다.
“……?”
훈의 설명에 마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멍청한 표정,
그 표정에 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연인이라 칭한 사내.”
“서…… 설마!”
훈의 말에 마독이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잘게 떨리는 마독의 두 눈동자.
그 두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 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마교의 소교주, 위마참군이 틀림없습니다.”
털썩!
훈의 확신 어린 발언에 마독은 그만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런 마독의 두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공허했으며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으아아!”
두려움에 질려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인들의 본거지인 마교.
그곳의 소교주이자 초절정무인이었던 무림공적을 여섯이나 해치운 괴물.
그런 괴물에게서 살아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며.
“아아…….”
사황성의 공녀에게 추파를 던진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렇게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괴로워하는 마독을 내려다본 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소주인을 대신해서라도 백사대주 白蛇隊主, 마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 말이다.
* * *
“아마 소문날 것입니다.”
“뭐가요?”
술잔이 두어 번 오가고.
동파육을 한 점 집어든 나는 이백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스윽.
은설의 밥 위에 동파육 한 점을 올리며 말이다.
배시시.
그에 서은설은 미소를 지었고, 나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누구 여자 친구인지 너무나도 예뻤다.
“나 말 안 합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이 꼴사나웠을까?
이백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거참, 부러우면 말로 하지 왜 화를 내고 그런단 말인가?
이백의 날카로운 태도에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다시 이백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이백.”
“미안해요, 대주님.”
“…….”
나와 서은설의 사과에 이백은 입을 다물었고, 이내.
“쯧, 아닙니다.”
혀를 한번 차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술잔을 들어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내는 백사문의 소문주이고, 호위무사였던 사내는 백사대의 기대주였습니다.”
“흐음…….”
“뛰어난 성취와 강인한 심지로 저희 백호대는 물론, 다른 무력대에서도 탐내던 놈이죠. 그것을 눈치챈 사령마는 교활한 혓바닥으로 녀석을 설득해 백사문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이백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제법 강한 기세를 지니고 있던 호위무사.
확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나이대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사내기는 했다.
‘근데 왜 내가 모르지?’
그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면 전생의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에 의문을 느끼던 것도 잠시.
“아무튼, 그런 놈이 공녀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흐음.”
이어진 이백의 말에 나는 의문을 접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서은설을 알아봤다는 말은 곧.
“예, 공자님도 알아봤겠지요.”
서은설과 혼사가 오가고 있는 나의 정체 또한 눈치챘다는 말.
그런 나의 생각과 같은지 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그에 나는.
“흐음…… 아쉽네요.”
아쉬웠다.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이백.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은설.”
“응.”
기품 어린 숟가락질로 벌써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서은설.
그녀가 나의 부름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거참, 순식간에 밥 한 공기를 비운 행동과 달리 너무나도 기품 어린 모습이었다.
그에 살짝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 색안막이라는 거 벗자.”
“응?”
나의 말에 서은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는 푸른 눈이 매력이야.”
“하지만…….”
나의 장난스러운 음성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 서은설.
나는 그런 서은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무림행을 가고 싶은 거지?”
무림행 武林行.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베일에 휩싸여 있는 존재가 바로 사황성의 공녀, 서은설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김새와, 두 눈으로 인해 공식적인 행사는 물론, 사적으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
색목인이라는 것과 거궁 巨弓을 사용하다는 정보만이 타 세력의 수뇌부들이 알고 있는 정도였다.
평생을 갑갑하게 살아왔던 그녀였기에 나와 무림행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나의 말에 서은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다니자, 너의 본모습 그대로.”
“!!”
“네 본모습.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마.”
“…….”
“정말 매력적이니까.”
나의 말에 서은설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나 또한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달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모습 그대로, 나와 다니자.”
그리고 나도 내 본모습 그대로.
제법 마음에 들었던 별호, 무협공자 武俠公子.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