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제112장 태극검왕 太極劍王 (1)
‘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설마…… 머릿속으로 실망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거야?
검을 든 채 나를 바라보며 도호를 외우고 있는 늙은 도사와 어린 도사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기함했다.
술에 정신이 나가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으이구! 술이 정말 웬수지!’
전생에서, 늘 나에게 잔소리를 하던 서은설의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서은설의 말이 맞았다. 진짜 술이 웬수다.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배가 그만 실언 失言 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량수불…….”
“못난 후배의 잘못을 부디 용서해 주시지요.”
도호를 외우는 노인, 무림에 나오기 전, 사마천이 알려 주었던 용모파기 중 한 명이기에 바로 파악이 가능했던 노인.
칠왕 중 한 명이며 무림의 장로인 태극검왕 청수 진인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더 용서를 구했다.
그에 청수가 검을 거두어들여 허리춤에 집어넣고는 나를 향해 반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손님에게 다짜고짜 검을 겨눈 것은 도사로서 옳지 못한 행동. 우리는 말코도사가 맞네. 그러니 후배는 허리를 펴시게.”
‘호오?’
상당히 도사적인 발언을 하며 나를 용서하는 청수 진인의 모습에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나는 허리를 펴고는 어머니를 닮은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허어.”
안다.
내 웃음이 아주 치명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청수 진인과 어린 도사들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완벽하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인 나는 명문가의 자제가 말하듯 곧은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후배는 극신이라고 합니다. 태극검왕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의 기감을 자극할 정도로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노인, 아니 청수 진인.
그런 청수 진인을 보며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청수 진인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후배는 본인을 어찌 알고 있는가?”
“허허로운 미소 아래에 태산과도 같은 굳건한 심지를 지니고 있으며, 양과 음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기운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리고 있으니 도가의 명문, 무당파의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그런 조화로운 기운 속에 날카로운 검의 기세가 숨겨져 있으니 당대 무당제일검 巫堂第一劍 선배님이 당연하겠지요.”
“허허.”
내가 어린 시절부터 괴물 같은 천마랑 대면하고, 삭막한 천마신교에서 살아오다 보니 아부는 물론 말발이 상당히 늘었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그런 나의 입에서 나온 청산유수와도 같은 말.
자연스럽게 무당파의 근원인 유능제강 柔能制剛, 외유내강 外柔內剛, 조화 調和를 언급하며 칭찬을 하자 역시, 청수 진인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 특유의 멋이 가득한 나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웃기를 잠시.
청수 진인이 웃음을 멈추었다.
웃음은 멈추었지만 자신의 기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흐뭇한 표정을 지은 청수 진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녹색의 섭선, 허리춤 깊숙한 곳에는 아직까지 꺼내지 않은 검. 사천당가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협을 행하며, 젊은 무인들의 귀감이 되며 가슴에 불을 지른 젊은 협객, 무협공자가 맞는가?”
“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말씀과 별호에 부끄럽습니다.”
좀 전의 나와 같은 청수 진인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말.
그 말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겸손을 떨었다.
아버지인 천마가 보았다면 경악했을 나의 행동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린 후배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훌륭한 선배를 만났는데 그런 선배에게 예의를 갖추어야지.
천마가 나에게 예의를 갖추었다면 나 또한 이랬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나의 겸양에 청수 진인은 다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천을 벗어나려는가?”
“예.”
“혹, 어딜 갈 생각인가?”
나의 대답에 청수 진인이 물었다.
그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군.’
청수 진인의 질문, 그 질문 속에 내포된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호북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니, 감숙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무림맹 장로이기도 한 그의 앞에서 어찌 감숙으로 가겠다고 하겠는가?
감숙은 사황성이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무림맹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 정파의 기둥이라 알려진 내가 그곳에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감숙으로 가는 것이 알려진다면 개방에서 의심을 할 수도 있다.
무협공자와 위마참군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나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청수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는가?”
역시나.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동행을 권하는 청수 진인을 보며 나는 속으로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사실 이곳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행 말인가?”
“예.”
“혹, 후배의 벗인 적협공자를 기다리는가?”
“맞습니다.”
‘미안하다, 이름 좀 팔게.’
나 참, 생각해 보니 황제의 이름을 파는 놈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지…….
아무튼, 나의 대답에 청수 진인이 흥분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 얼마나 기다릴 예정인가? 가능하다면 정파의 기둥이 될 훌륭한 후배를 직접 만나 보고 싶군!”
“사실…… 따로 약조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응?”
곤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 나의 대답에 청수 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해 놓고, 따로 약조는 하지 않았다니?
성격 급한 양반이었다면 자신을 놀린다며 버럭 화를 낼 것이다.
다행히 청수 진인은 오랜 수양을 해 온 도인이었기에 나의 말을 기다렸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볼일이 끝나고 호북의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볼일이 끝났지만 녀석의 볼일은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지요.”
“허어…….”
“하하, 믿기지 않으시지요?”
나의 말에 불신의 허탈한 미소를 짓는 청수 진인.
그런 청수 진인을 보며 내가 묻자 청수 진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후배가 본인을 놀릴 리는 없으니 말이야.”
“정말 사실입니다.”
어쩌겠는가?
내가 사실이라는데 말이다.
그런 나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청수 진인은 불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기는 싫다는 청수 진인의 눈빛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도사가 이렇게 쉽게 감정이 읽힌단 말인가?
재미있는 노인네였다.
그에 나는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
“말하시게.”
삐져도 대답은 해 주네.
끝까지 후배인 나를 향해 예를 갖추며 대답한 청수 진인을 보며 나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웅!
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가공한 기운.
그 기운에 이대제자들은 허리춤에 손을 얹었지만.
“모두 가만히 있거라!”
나의 기세에 살기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청수 진인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에 제자들은 손을 내렸고.
“하하, 감사합니다.”
나와 청수 진인을 두고 그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는 완벽한 기막 氣幕이 생겨났다.
기막을 완벽하게 생성한 내가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자 청수 진인 또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래. 도대체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기막까지 펼친 것인가?”
단순한 노인네.
나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기대되었던지 언제 삐졌냐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아이 같은 청수 진인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나는 입을 열었다.
“한 달 전, 신선도인 선배님을 만났습니다.”
“!!”
* * *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향해 말코라 칭한 미청년.
그 미청년의 등장에 당황한 것도 잠시. 예의 바른 행동과 언사에 마음이 풀린 청수 진인은 미청년이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무협공자라는 사실에 흥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협공자 武俠公子.
그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육천…… 아니, 이제는 일곱 명이 되어 버린 칠천신군 七天神君에 버금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겪은 무협공자의 기운은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지금은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지만 조금 전.
자신들에게 다가올 때 분명 느꼈다.
매서운 기운을 말이다.
물론, 청수 진인은 몰랐다.
그 매서운 기세가 바로 술에 대한 위극신의 집념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를 꿈에도 모르는 청수 진인은 정파의 뒤를 받쳐 줄 훌륭한 후배의 모습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의 벗인 적협공자 赤俠公子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느냐 물어보니 그렇다지 않은가?
원하던 대답에 흥분했던 것도 잠시, 자신을 피하려는 듯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말하는 극신을 보며 실망스러워졌다.
아니 솔직히 조금 삐졌다.
왜 못 보게 한단 말인가?
그에 기분이 상했던 것도 잠시.
기막을 펼치며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극신의 모습에 청수 진인은 다시 흥분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적협공자가 이미 이곳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무림의 선배로서 뛰어난 후배를 보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운 청수 진인.
그런 청수 진인의 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한 달 전, 신선도인 선배님을 만났습니다.”
“!!”
전혀 생각지 못한 말.
십 년 전 홀연히 사라진 대사형을 만났다는 극신의 이야기에 청수 진인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은 물론 무당파에서 그렇게 찾고자 했던 존재가 바로 대사형이다.
십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추적했음에도 찾지 못했던 존재가 대사형이었거늘, 그런 존재를 까마득한 후배인 극신이 만났다고?
그에 청수 진인은 입을 열었다.
“대사형은 살아 계시는가?”
“…….”
이런.
자신의 물음에 정색을 하는 후배, 무협공자를 보며 청수 진인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십 년 만에 만난 대사형이다.
물론 그런 대사형이 살아 있는 것이냐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쳤구나…….’
불안했다.
혹시나 대사형이 살아 있을까 봐, 그로 인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아이를 거두지 못할까 봐 말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담긴 질문을 후배인 무협공자가 파악한 것이고 말이다.
“무량수불…….”
부끄러웠다.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온 삶도 육십 년, 평생을 무당파에서 수양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후배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청수 진인은 도호를 읊으며 스스로를 자책한 다음 굳어 있는 후배, 무협공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못난 꼴을 보였네.”
“…….”
“무량수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말 못난 모습일세…….”
아무런 대답도 없는 후배의 모습에 청수 진인은 스스로가 더욱더 부끄러워졌다.
그에 청수 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당파에 돌아가는 대로 참회동 慙悔洞에 들어 스스로를 수양하겠네. 그러니 부디, 후배는 이 못난 선배를 단정 짓지 말고 좋게 생각해 주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수 진인의 말에 극신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후배로서 선배의 잘못을 넘어가 주고, 위로해 주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청수 진인.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극신을 바라보았다.
“나는 후배에게 당당해지고 싶네. 꼭 이 못난 모습을 극복하도록 하겠네.”
“아니…….”
“고맙네.”
선배인 자신을 위하는 후배의 모습.
너무나도 이상적인 극신을 보며 청수 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뛰어난 후배가 자신의 뒤를 잇는다니…….
무림의 선배로서 큰 홍복 洪福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수 진인이 극신을 보며 흐뭇해하는 그 순간.
‘뭔 개소리야?’
위극신은 지 할 말만 내뱉으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청수 진인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