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제111장 하필 何必
“하아…….”
이른 아침.
위극신과 함께 조반을 먹기 위해 방으로 올라온 왕일은 비어 있는 방과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한 개의 서찰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떠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한마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위극신의 행동에 섭섭해하던 것도 잠시.
왕일은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겨 서찰을 집었다.
차락.
그러고는 고이 접혀 있는 서찰을 펼쳐 들었다.
조만간 보자.
“멋지네.”
다섯 글자.
단 다섯 글자만이 적혀 있는 서찰을 보며 왕일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훌쩍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반가워했고, 몇 없는 단골만이 아는 비밀 음식을 주문했으며, 자신의 동생을 찾아 준 은인이었다.
한낱 점소이인 자신에게 의제가 되지 않겠냐고 제안하던 천마신교의 소교주.
그런 의형, 위극신을 떠올리며 왕일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일 층에서 위극신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자신의 의형.
남궁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왕일이 일 층에 내려서자.
“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왕일의 귓전을 때렸다.
남궁정의 옆에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인.
남궁정의 동생인 남궁연화의 모습에 왕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남궁정을 바라보았다.
“쟤는 언제 왔습니까?”
이틀 전.
남궁영을 죽이고 나서 늘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귀찮게 굴었다.
그에 남궁연화가 거슬렸던 왕일이었고, 그의 물음에 남궁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친해졌구나?”
“무슨 소리야!”
“이게요……?”
남궁정의 말에 남궁연화와 왕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정했다.
그에.
씨익.
남궁정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한숨을 내쉰 왕일은 고개를 돌려 남궁연화를 바라보았다.
“너, 집에 가라.”
“내가 왜?”
“여기 우리 집이야.”
“근데? 나 손님이야. 손님이 왕이지.”
“우리는 안 그래. 손님이 노예야. 그러니 나가, 훠이훠이.”
남궁연화의 말에 왕일이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손짓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물리치듯 말이다.
그에 남궁연화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입을 열었다.
“아주 장사를 개판으로 하네?”
“내 가게야. 간섭하지 마.”
“삼대가 망하겠는데?”
“삼대가 놀고먹을 돈을 모아 두었으니 신경 쓰지 마.”
“아 진짜!”
왕일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남궁연화.
그런 남궁연화를 보며 왕일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예의 얄미운 미소를 말이다.
그에 남궁연화는 다시 분노했고 그녀의 언성이 더 높아지기 전에 남궁정이 나섰다.
“그만.”
“우씨.”
“예 형님.”
남궁정의 만류에 남궁연화는 화를 삭였고, 왕일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남궁연화는 더 약 올라 했지만 그것은 각설하고.
남궁정은 이 층을 오르는 계단을 한번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형님은?”
“보세요.”
남궁정의 물음에 왕일은 오른손에 쥐어진 서찰을 건네었다.
그런 왕일의 서찰을 받아 든 남궁정은 곧 서찰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였고.
“가셨구나.”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왕일 또한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뭔데?”
그런 둘의 모습에 남궁연화는 촐싹거리며 서찰의 내용을 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스윽.
“시장하시죠?”
이미 서찰은 왕일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서찰을 품에 넣으며 왕일이 묻자 남궁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야!!”
남궁연화는 아침부터 우렁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주 장군감이었다.
* * *
한창 은하객잔이 소란스럽던 그 시각.
“서찰을 이제 확인했나 보네.”
갑작스레 귀가 간지러워진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가볍게 귀를 후비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녀석들이 섭섭해할 것은 알지만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았다.
‘형님! 한잔하셔야지요!’
‘맞습니다!’
내가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별주라며 계속 술을 권하던 왕일과 남궁정.
술에 약한 나의 성격을 파악하고 녀석들은 집요하게 그것을 노렸고…….
“하핫.”
나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술을 거절하겠는가?
아무튼.
그런 녀석들의 유혹에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서찰을 남겨 놓고 새벽에 몰래 나왔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어딜까.”
나는 산속 깊은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 참.
뽕!
“술이나 마셔야지.”
길을 잃어버린 겸, 해도 떴으니 시원한 아침 바람을 느끼며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품속에서 술병을 들어 뚜껑을 열고 근처 나무에 기대앉은 나는 망설임 없이 술병을 들었다.
꿀꺽!
나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술.
그 술의 기운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 있다!”
바닥에 덜어진 술병 뚜껑을 찾아 다시 술병의 뚜껑을 닫았다.
아쉽게도 나는 주윤문처럼 품속에 술병 세 개를 넣어 놓고 다니는 재주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 병의 술병만 들고 다닐 수 있었기에 지금은 술을 아껴야 했다.
언제 마을에 도착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품속에 술병을 다시 집어넣은 것도 잠시.
“…….”
뽕!
아무래도 한 모금만 더 마셔야겠다.
* * *
서역의 대제국 파사국.
한때는 황궁 기사단장이었으나 제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은거를 해 버린 키예프.
그는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슈팅스타 스워드라…….”
젊은 나이.
그리고 귀신을 속일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을 사용한다는 동방의 무인.
그 무인의 이야기에 키예프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자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기울이던 노인.
창기사단장 출신이며 키예프와 함께 은퇴를 한 벗 앤서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키예프.”
“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라이벌이자 이제는 마누라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버린 망할 놈, 앤서의 부름에 키예프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에 앤서는 어린 시절과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슈팅스타 스워드, 나는 윈드 스피어.”
“…….”
“각자 키워서 우리가 내지 못한 승부를 내 볼까?”
장난스러운 앤서의 제안에 키예프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앤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멍청한 말을 내뱉으며 자신과 내기를 즐겨 온 앤서.
그의 제안은 옛날부터 한심하고 멍청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씨익.
아주 재미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파사국 제일의 기사와 창기사의 내기가 성립된 그 시각.
파사국의 서쪽 끝자락.
“푸하하!!”
블러드 베어라 불리며 서역의 강한 사람들과 대련을 즐긴다는 단순무식, 구양적이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푸하하! 덥구나!”
구양적의 신체를 자극하는 뜨거운 열기.
그 열기를 느끼며 구양적은 손으로 부채질을 했고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아느냐고?
그럴 리가.
사마천과 단진, 그리고 야율민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렇게 구양적은 파사국의 끝자락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를 느끼며 말이다.
* * *
“어라……?”
언제 다 마신 거야?
시원한 아침 바람을 느끼며 딱 한 모금 더 마신다는 것이 그만 한 병 다 마셔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비어 버린 술병.
그 술병을 뒤집어 탈탈 털어 본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술이 없다니…….
곤란했다.
다시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아…….”
괜히 갔다가 애들 만나면 또 이별주라는 명분하에 하루 붙잡힐 것이 뻔하다.
“그건 곤란하지.”
진짜 곤란했다.
가뜩이나 우리 은설이 보고 싶은데 또 하루 미루어진다고?
차라리 술을 하루 더 안 먹고 말지.
“으챠.”
어서 은설이나 보러 가야지.
몸을 일으킨 나는 엉덩이를 팡팡 털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은설이.
엄청 예뻐져 있을 것이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비단결과 같은 머리칼에, 푸른 호수처럼 깊고 맑은 두 눈동자…… 크으!
그렇게 전생에서 늘 보았던 서은설의 모습을 상상한 것도 잠시.
나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씨익.
“찾았다.”
아무래도 다 떨어진 술을 찾은 것 같았다.
* * *
“각주님.”
“그래.”
사천의 한 산속.
제자의 부름에 한 노인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가면 호북입니다.”
제자의 설명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두 개의 갈림길.
제자가 가리킨 오른쪽으로 가면 무림맹과 무당파가 있는 호북 지역이며, 반대쪽인 왼쪽의 길로 가면 사황성이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감숙이 나온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
무당파의 정무각 正武閣 을 책임지고 있으며 동시에 당대 무당제일검 巫堂第一劍 에게만 내려지는 별호 태극검 太極劍 의 주인인 청수도장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태극검이 아닌 또 다른 별호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극검왕 太極劍王.
그렇다.
그가 바로 당대 천하를 논한다는 십대고수 十代高手 중 삼황 三皇 을 제외한 칠왕 七王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청수의 고개 끄덕임에 이대제자인 허참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곳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허참의 말에 청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뒷짐을 지며 걸음을 옮겼다.
멈칫!
그때.
청수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이대제자인 허참과 그의 사제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수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말해도 ‘그래’, ‘알겠다’라고 대답하시며 물 흘러가듯 움직이던 청수.
그가 처음으로 멈칫했기에 이대제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자들의 앞에서 멈칫한 청수는.
스르릉!
“모두 긴장하거라.”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며 낮은 어조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에.
채챙!
화들짝 놀란 이대제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황급히 검을 뽑았고.
“…….”
청수는 점점 가까워지는 엄청난 기운에 두 눈에 힘을 주며 긴장 어린 표정을 지었다.
태극검 太極劍, 혹은 태극검왕 太極劍王 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받음과 동시에 잊어버렸던 긴장.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에 청수는 검을 강하게 쥐었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에 청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구나.’
말년에 제자 욕심이 생겨 제자를 들이려고 했더니 자신은 스승이 있다고 거절했다.
무당제일검인 자신을 말이다.
그런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십 년 전 홀연히 사라진 대사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무림맹에 일이 생겨 돌아가려는 찰나 이렇게 강대한 기운을 내뿜는 자를 만나고 말았다.
평소 아무런 욕심 없이 살았을 때는 늘 평화로웠던 것이 자신의 삶이었다.
헌데 처음으로 욕심을 내었더니 자신을 긴장시킬 정도로 강한 적을 맞이하고 말았다.
인생 참 재미있지 않은가?
욕심 한 번에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이 된 청수가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기운에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꽈악!
검을 강하게 쥐고 휘두르려던 그 순간!
새하얀 백의를 입은 잘생긴 미남자가 청수의 앞에 나타났다.
비단결같이 고운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몸.
허리춤 깊숙한 곳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왼손에는 옥색의 아름다운 섭선이 들려 있었다.
그림을 찢고 나온 듯한 완벽한 외모를 지닌 청년의 등장에 청수는 물론 이대제자들도 그대로 굳어 버렸고.
미소를 짓고 있던 청년은 청수와 이대제자들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 하필 말코네.”
“무량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