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제104장 슬픈 꿈 悲夢
“고생하셨습니다.”
하북의 북쪽 끝자락.
한때 드넓은 대륙을 넘어 서역까지 제패했던 대제국이었으나 지금은 망해 버린 왕조, 원.
원의 잔존 세력인 북원의 본거지인 내몽고의 아래에는 수많은 병사들과 장수들로 이루어진 넓은 주둔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주둔지의 가장 깊은 곳.
장군들이 회의하기 위해 마련된 막사로 사내가 들어서자 앉아 있던 모든 사내들이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추었다.
저벅저벅.
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사내.
그가 걸음을 옮겨 가장 상석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후우…….”
그러고는 화려한 적색의 투구를 벗고 앞에 위치한 탁자 위에 얹어 두었다.
“찝찝하군.”
피로 인해 젖어 버린 머리칼을 가볍게 털며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사내.
바로, 대명 제국의 황제, 혜제 惠帝 주윤문이었다.
그런 주윤문의 짜증 어린 중얼거림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에 적셔진 천을 건네었다.
“되었다.”
“예.”
주윤문이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거절하자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다시 주윤문의 뒤에 섰다.
“그대도 앉지.”
주윤문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사내 중 또 다른 사내.
황금색의 멋들어진 갑옷을 차려입은 금의위의 수장, 이경륭을 보며 주윤문이 말하자 이경륭이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흐음…….”
이경륭의 대답에 주윤문이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송구하옵니다!”
장난스러운 주윤문의 말.
그 말에 이경륭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고,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있던 사내들이 움찔거렸다.
주윤문의 장난스러운 한마디.
장난기가 가득한 가벼운 한마디에 모두가 공포에 질려 용서를 구하자 주윤문이 피식 웃었다.
‘재미없네.’
심각하게 재미가 없었다.
물론, 황권 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던 군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만약 중원에서 만난 벗, 극신이 있었다면…….
‘나보다 약하지. 너는 충분히 보호를 받아야 해.’
라며 자신을 놀렸을 것이다.
피식.
잘생긴 얼굴로 얄밉게 웃으며 놀리는 위극신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상상되자 주윤문은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입을 열었다.
“모두 앉으시게.”
“황공하옵니다!”
막사에 들어서고 약 일다경(15분).
그 시간 동안 예를 갖추고 있던 사내들이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사내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그들을 한 번 둘러본 주윤문.
움찔.
그런 주윤문의 눈길에 사내들은 움찔하며 긴장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던 주윤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흠칫.
그에 사내들은 다시 흠칫했지만 주윤문은 무시를 하고는 고개를 돌려 새하얀 피부가 익숙한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제독동창.”
“예, 폐하.”
주윤문의 입에서 나온 낮은 음성.
그 음성에 가장 선두에 앉아 있던 사내, 이번에 새로 조직된 정보조직 동창의 제독인 염승이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북원의 상황은?”
“아유르가 죽고, 그의 동생 토구스가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야만 전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사내입니다.”
“귀찮아졌군.”
“…….”
주윤문의 말에 염승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에 턱을 한번 쓰다듬은 주윤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염승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황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명의 건국 영웅인 황자징.
그는 주윤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은퇴하기를 원했지만 주윤문의 부탁으로 계속해서 관직에 머물고 있는 노인으로, 학자들에게는 물론 학문과 거리가 먼 장수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는 황실의 어른이었다.
주윤문의 부탁으로 도독첨사라는 관직을 맡고 있는 황자징.
그를 보며 주윤문이 조금은 정중한 어조로 묻자 황자징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야만족들입니다. 굳건하신 황제 폐하께서 계신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훗.”
아부와도 같은 발언이지만 황자징의 말속에 담긴 진심을 느낀 주윤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신에게 병사를…….”
“기각.”
그런 주윤문을 보며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정이품 용호장군 마속이 목소리를 내자 주윤문이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에 마속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주윤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마속의 옆, 같은 정이품인 금오장군 합천을 바라보았다.
“금오장군.”
“예, 폐하.”
자신의 부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대답하는 합천을 보며 주윤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호장군과 함께, 최선봉에 서며, 지휘권은 도독첨사와 제독동창에게 맡긴다. 이경륭 지휘사는 나와 함께 내려가도록 하겠다.”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급한 불이 꺼진 지금.
굳이 자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못 느낀 주윤문의 말에 막사 내 모든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회의가 끝이 나고 주윤문의 축객령으로 막사의 모든 사내들이 밖으로 나섰다.
“폐하.”
“말씀하시오.”
사내들 모두가 막사를 나서기를 기다리던 황자징.
그의 부름에 주윤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황자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를 존경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
“번왕들을 견제하고 그중 가장 강성했던 연왕을 모든 번왕들의 앞에서 죽인 행동은 정말 과감했으며 군주로서 모범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짧게 말하시오.”
길어지는 황자징의 말에 주윤문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에 황자징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계 때문입니까?”
“…….”
“어린 시절부터 폐하께서 계획해 오신 대계. 방 학사와 함께 토대를 마련하고 저와 수많은 학자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우리의 대계가 드디어 시작되는 것입니까?”
고개를 든 황자징.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늙은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의 황자징을 보며 주윤문이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그에 황자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대계의 계획을 알리며 뛰어난 신하들을 모아 온 군주이자 황제이다.
늘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으로 믿음을 주던 자신들의 군주가 이런 모습을……?
복잡했다.
그에 황자징의 눈가가 떨려 오자 주윤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거만한 표정으로 황자징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켜보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폐하의 대계는…….”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마시오.”
황자징의 말에 주윤문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림말살대계. 나는 그것을 꼭 이루어 그 누구도 나의 권위를 넘보지 못하도록 강력한 황권을 이룰 것이오.”
자신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기회를 준 그녀를 위해서라도 꼭.
걸음을 옮겨 막사에 위치한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던 주윤문.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강하게 쥐었다.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조각.
다섯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별이 조각된 목걸이를 말이다.
* * *
화르륵!
“꺄아악!”
“모두 도망쳐!”
명 제국 수도인 남경.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거대한 황궁에는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화마 火魔 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있었고.
우와아아!!
황궁의 너머에는 수십만의 병사가 황궁을 포위하고는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작은 쥐 새끼 한 마리도 못 나갈 정도로 촘촘하고 완벽하게 포위된 황궁.
그에 황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거대한 화마는 목숨을 포기한 사람들을 덮쳐 나갔다.
거대한 화마로 인해 붉어진 하늘 아래.
오, 송, 양 왕조의 황궁이었던 전통 있는 건물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미안하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황제의 침전.
붉은색의 용포를 입은 사내가 염치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맞은편 여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적발 赤髮 적안 赤眼 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색목 여인.
파사국의 공주이자 명의 어린 황제, 혜제가 사랑하는 연인, 아스나는 사랑하는 어린 황제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어색한 한어.
그녀의 말에 주윤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멍청했소. 저런 숙부를 믿다니…….”
나약한 성정으로 그래도 숙부라며 그를 용서했던 혜제.
그 나약한 성정이 결국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거대한 화마가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후회가 되는 주윤문이 자책을 하며 말하자 아스나가 주윤문의 얼굴을 잡았다.
“폐하.”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게 했다.
일렁이는 붉은 화마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아스나의 두 눈.
그 두 눈을 바라보며 주윤문은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도 그녀에게 미안했다.
서역의 대국, 파사국의 공주였으나 오로지 자신 하나만 믿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타국으로 왔다.
그런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
색목인이라는 이유로 신하들은 그녀를 경멸했고,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황제다.
하늘의 아들, 천자이며 선택받은 존재.
만인지상의 존재이며 유일한 존재인 황제!
그런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그녀를 경멸했다.
그러고는 황후 책봉을 꺼내자마자 충언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부디, 한족의 명예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황제로서 모범을 보여 달라고.
색목인을 황후로 맞이한다면 그 누가 폐하를 따르겠냐며 말이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자신의 성정이 강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의 황권이 강했다면 그녀가 상처받을 일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후회되는 주윤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아스나가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어 그에게 걸어 주었다.
“……?”
파사국을 나섰을 때 유일하게 챙긴 보물.
왕족에게만 내려오는 스타 펜던트를 보며 주윤문이 놀란 표정을 짓자 아스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목걸이에는 전설이 있어요.”
“무엇이오……?”
불길이 일렁이는 장소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아스나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주윤문이 대답했다.
그에 아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기 전, 간절하게 소원을 바란다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에요.”
“그런…….”
순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 이야기에 주윤문이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말하자 아스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주윤문을 강하게 안았다.
꽈악.
“우리 기도해요.”
“…….”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기를 말이에요.”
주윤문의 귓가에 울리는 아스나의 아름다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느껴지는 촉촉한 물기에 주윤문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아스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니, 만약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과거로 돌아갔으면 좋겠소. 그대가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나와 웃는 날보다 나를 위로해 주던 날이 많았던 그대를 내가 매일 웃게 해 줄 것이오.”
“…….”
“그러니. 부디, 회귀해서 만납시다.”
화르륵! 쿵!
그날.
홍무제의 장손이자, 어린 황제였던 혜제는 숙부였던 연왕에게 살해를 당했으며, 훗날 사람들은 그런 황제를 가엽게 여기며 연호에 따라 건문제 乾文帝라 칭하였다.
* * *
서역에 위치한 파사국.
드넓은 땅을 자치하고 있는 대제국 파사국의 황성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아니, 평화로웠었다.
“꺄아아악!”
파사국의 유일한 후계자.
왕위 계승 서열 일 위이며 공주인 아스나의 침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까지 말이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공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수많은 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그녀의 문 앞을 지켰으며 궁녀들이 그녀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아…… 하아…….”
땀으로 인해 젖은 머리칼을 아무렇게 흩날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아름다운 여인.
바로 파사국의 공주인 아스나 사파비였다.
“뭐야…….”
좀 전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던 슬프고 아련한 꿈.
그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스나는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뚝.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적안에서 한 줄기의 맑은 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