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제97장 변화, 평화 變化, 平和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정마대전이 끝이 나고 약 이십오 년.
수많은 고수들의 목숨과 무림의 재녀 才女로서 이름이 드높았던 천소화의 희생으로 무림에는 평화가 찾아왔었다.
이제는 치열했던 과거보다는 평화로운 현재에 적응해 버린 정마대전의 세대, 그리고 평화로운 시대에서 태어나 자극 없이 자라 온 신진 세대까지.
특별한 사건 없이 평화로운 시대로 인해 따분하기 그지없었던 무림이 두 가지의 소문으로 인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따분하던 무림에 활기를 심어 준 첫 번째 소문.
무림맹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오대세가 중 사천당가의 거대한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협을 행하며, 진정한 우정을 나눈 벗과 함께 사천당가와 당당하게 맞선 젊은 두 명의 협객이었다.
뛰어난 시인인 고계가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 만든 시의 주인공인 무협공자 武俠公子와 그의 벗 적협공자 赤俠公子의 협행은 젊은 신진 세대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많은 젊은 사내들이 매일같이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거나, 위대한 뜻을 가슴에 품고 출가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사천을 넘어 이제는 중원 전역으로 유명해져 버린 무협공자와 적협공자.
젊은이들의 꿈과 같은 두 사내의 등장에 무림이 진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무림공적인 색마 色魔 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 색마를 죽인 영웅이 바로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소문이 전 무림을 강타했다.
정마대전을 겪은 세대는 악마의 재림이라며 두려움에 떨었고, 젊은 세대는 갑작스러운 소교주의 등장에 당혹스러웠지만 곧, 그 사내를 꺾어 명예를 얻을 생각에 흥분하였다.
무림공적을 잡았음에도 명예는커녕 악명만 증가하고 만 천마신교의 소교주.
개중의 사람들은 거짓된 마를 참한다는 뜻으로 마교의 소교주를 위마참군 僞魔斬君이라 부르며 육천신군 六天神君에 포함하여 칠천신군 七天神君이라 부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갑작스러운 두 가지의 소문으로 인해 중원 무림은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기존 세대는 긴장감을, 새로운 세대는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의 씨앗에 무림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지만 나비의 작은 바람이 태풍을 만들듯, 그 작은 변화는 곧 중원 무림 전체 판도를 바꾸게 할 것이다.
그렇게 중원 무림은 두 가지의 소문으로 인해 시끄러웠으며, 그 시끄러운 소문은 중원을 가로질러 신강에 위치한 천마신교에까지 이르렀다.
천마궁 天魔宮에 위치한 천마각 天魔閣.
역대 천마가 기거한 곳이자 천마신교의 본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천마각에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있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정자로, 신강의 특산물인 흑목 黑木으로 만들어진 고급 정자였다.
천마와 그가 인정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정자에서 천마, 위관악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잘 그렸구나.”
이제는 미소가 익숙해져 버린 천마.
물론 가족들에게만 보여 주는 귀한 미소였다.
수하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람들을 아낄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아직은 조금 서툴지만 말이다.
“다행입니다!”
그런 천마의 앞.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후광이 나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아니, 순수한 미소에 천마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찌 저렇게 다른지…….”
큰아들 놈은 웃는 게 음흉하고 찝찝한 것에 비해 막내는 너무나도 순수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말이다.
아 물론, 이는 천마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위극신의 미소를 아주 좋아했으니 말이다.
“형님이 보고 싶으십니까?”
그런 천마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위극신의 동생, 위천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에 천마가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 녀석을 내가 왜?”
“흐음…… 하지만 형님이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제대로 식사는 하고 다닐지…….”
“넌 네 형이 걱정되느냐?”
위천의 걱정 어린 말에 천마가 피식 웃으며 위천을 바라보았다.
그에 위천은.
“아니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상쾌한 미소 말이다.
그에 천마가 입을 열었다.
“믿으니까?”
“네, 형님은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
강하지.
아주 미친놈이 따로 없지.
위천의 말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소교주 위극신.
그 망할 놈은 자신의 아들임에도 정말…… 그냥 괴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화경의 경지에 오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냥 화경이 아니다.
“망할 놈.”
마황이라 불리는 자신과 같은 완숙한 화경의 경지이다.
아비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오죽하면 아들에게 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으로 인해 삼 년 전부터 매일 무공을 수련해 왔겠는가?
더욱이 출가하기 전 마지막 대련은 그 망할 놈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천마에게는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끝까지 짜증 나는 놈이었고, 또 질릴 정도로 괴물 같은 놈이었다.
“저도 형님처럼 강했다면…….”
그런 녀석을 떠올리던 것도 잠시.
천마는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열여덟이 되어 성인이 된 위천.
워낙 괴물 같은 위극신 때문에 가려졌지만 저놈도 괴물이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괴물 말이다.
명문세가의 자제가 열여덟의 나이에 일류에 오르면 사람들은 최고의 후기지수라며 치켜세워 준다.
완숙한 일류의 경지가 바로 정도 무림의 희망이라는 오룡삼봉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위천은?
일류를 넘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이다.
애초에 같은 세대의 아이들과는 비교가 불가한 대상이었다.
워낙 엄청난 괴물의 그림자로 인해 스스로 겸손함을 배워 버린 둘째 아들 위천을 천마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저 녀석이 더 괴물이지.’
무공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주는 위극신과 달리 위천은 무공은 물론 학문과 예술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천마신교에서 더 이상 위천에게 학문을 가르쳐 줄 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천마의 생각대로 위천이 더 괴물이 맞았다.
하지만 천마는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다.
천마.
그 또한 열세 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미친 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사소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천마와 위천은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제가 방해한 건가요?”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기품 어린 걸음으로 천마와 위천이 있는 정자로 걸어온 아름다운 여인.
바로 천마의 부인이자 위극신과 위천의 어머니인 천소화였다.
그녀의 등장에 천마와 위천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앉으시오.”
“어머니, 이리로 오세요!”
그러고는 천마가 옆으로 비켜 주며 말했고, 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석을 밀어 주며 말했다.
파지직!
천소화를 앞에 두고 졸지에 경쟁을 벌이게 되어 버린 천마와 위천.
좀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부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두 부자의 모습에 천소화는 미소를 지었다.
부자지간의 사이가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게 천소화가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그녀는 몸을 움직여 천마의 옆에 앉았다.
“아…….”
그에 천마는 진한 미소를, 위천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 천아. 네 옆자리는 네가 사랑하는 여인의 것이란다.”
“어머니만큼 훌륭한 여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머…….”
위천의 대답에 천소화가 입가를 가리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너는 아비보다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지 않니? 거기에다가 성격 또한 자상하니 여인들에게 인기 많을 수밖에 없지.”
꿈틀.
아비보다 뛰어난 외모라는 말에 천마의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이건 넘어가자.
“하지만…… 제가 좋다는 여인들은 없었던걸요…….”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은 위천의 모습으로 인해 그 누구도 함부로 위천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차마 검은 점을 찍지 못하겠다는 심정이기 때문일까?
그 누구도 스스로가 위천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여인들은 위천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위천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천소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서신, 시무룩한 위천을 활짝 웃게 할 내용이 적힌 서신을 건네주었다.
“이 서신을 읽는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란다.”
“네.”
시무룩해하는 위천에게 웃으며 서신을 건넨 천소화.
위천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한 다음 천소화가 건넨 서신을 받아 들었다.
촤라락.
그러고는 보란 듯이 펼쳐 보이고는 천천히 서신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흐르고,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위천의 두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천소화의 예상대로 특유의 맑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형님이시군요.”
사천에서 활동하면서 꾸준히 사천 지부에 연락을 취한 위극신의 행동으로 인해 서신에는 위극신의 활약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무협공자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물론, 하오문주의 제자와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의형제를 맺고, 뛰어난 젊은이와 우정을 나누었으며 무림공적을 처치하여 신교의 위상까지 드높이고 있다는 상세한 내용.
그 내용에 위천이 감탄하며 말하자 천소화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천마가 위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거라.”
“네.”
천마의 말에 미소를 지은 위천.
그가 서신을 건네었다.
순순히 서신을 건네주는 위천의 모습에 천마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큰 아들인 위극신이었다면…….
‘싫은데요?’
‘그냥요?’
‘한 번 더 읽을게요.’
라면서 깐족거렸겠지.
속으로 피식 미소를 지은 천마가 손에 들린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협공자라니, 지 같은 별호를 얻었군.’
‘남궁세가랑 하오문? 이놈이 제정신인가?’
‘우정이라…… 백리관 같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겠군.’
읽어 내려갈수록 때로는 피식 미소를 짓고,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는 천마.
이제는 감정이 풍부해진 천마를 보며 천소화와 위천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시 후.
와락!
모든 서신을 다 읽은 천마가 서신을 강하게 쥐었다.
천마의 분노로 인해 원래의 모습과 달리 처참하게 구겨져 버린 서신.
그에 천소화와 위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신을 잘 읽다가 왜 갑자기 화를 낸단 말인가?
그런 천소화와 위천의 의문 어린 눈빛을 무시하고,
“사천당가 이 잡종 개XX들이…….”
천마가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천마.
그는 자신의 큰아들 위극신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 녀석을 욕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건 자신이고, 다른 사람이 위극신을 욕하거나 다치게 한다?
절대 용서 못 한다.
“마뇌!!”
그에 분노한 천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뇌를 찾았고, 천소화와 위천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런 천마를 말렸다.
그렇게 위극신이 떠난 천마신교는 오늘도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