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제96장 고뇌 苦惱
“무슨 일이냐.”
이른 아침.
두 눈을 뜬 윤문은 자신의 침상 앞에 부복해 있는 염승의 모습에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태상시경의 전언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먼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윤문의 부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낸 염승.
얼마 전 있었던 무례를 떠올리며 염승이 용서를 구하자 윤문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말하라.”
목을 축이고 물잔을 내려놓은 윤문.
위엄 어린 그의 말에 염승이 입을 열었다.
“북원의 잔재 세력이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
“폐하께서 직접 번왕들에게 명령을 내려 주시고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셨으면 한다는 충언이 있었습니다.”
“귀찮게 하는군.”
염승의 전언에 윤문이 인상을 찌푸렸다.
부패와 타락의 끝을 보여 주었던 이민족의 나라, 원 元.
그들은 대명 제국에 의해 고향인 북으로 돌아갔지만 옛 원의 영광을 잊지 못해 최근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는 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윤문이었기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찌푸려졌던 인상을 폈다.
귀찮더라도 그들의 처리는 황제인 자신이 직접 해야 했으니 말이다.
“스승님의 의견은?”
“태상시경과 생각이 같다 합니다.”
황제의 스승이자 조력자인 시강학사 방효유.
모든 학자들의 존경을 받는 그의 의견을 묻자 염승이 대답했다.
그에 윤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다.”
“폐하.”
“오늘따라 전언이 많구나.”
계속된 염승의 말.
그 말에 윤문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윤문의 말에 염승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재미없는 염승의 반응에 미소를 지운 윤문.
그가 입을 열었다.
“농이다. 말하도록.”
“이경륭 지휘사의 전언입니다. 동창 東廠의 발족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그만 유희 遊戱를 끝내셨으면 한다고 합니다.”
“빠르군.”
염승의 전언에 윤문이 살짝 놀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염승을 바라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대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도 되겠군.”
화경의 고수로, 황궁 제일의 고수라 불림에도 불구하고 염승은 황제의 그림자로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황제의 직속 정보기관으로 환관들로 이루어진 동창.
대계를 위해 정보가 필요했던 윤문이 직접 조직한 비밀 조직으로, 뛰어난 정예들로 이루어진 그곳의 수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자가 바로 염승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상기하며 윤문이 장난스레 말하자 염승이 한쪽 무릎을 마저 꿇었다.
그러고는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충정이 가득한 염승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윤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가자. 지휘사의 충언대로 유희를 그만 끝내야겠구나.”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음을 옮긴 윤문.
그가 결심한 듯 말하자 염승이 입을 열었다.
“이번 유희의 흔적도, 전과 같이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그동안 수많은 유희를 해 온 윤문.
그는 유희를 끝낼 때마다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이름은 물론 사람까지 말이다.
그 흔적을 그동안 직접 처리해 온 염승이 묻자 미소를 짓던 윤문의 얼굴이 굳어졌다.
“…….”
창밖을 바라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윤문.
염승은 그런 윤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
수많은 유희 중 가장 즐거운 유희였고, 또 추억이었다.
회귀 이후 황제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윤문에게 있어서 한 줄기의 단비와도 같았던 즐거운 추억.
윤문은 그 추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극신…….’
자신과 같이 과거로 돌아온 사내.
자신처럼 미래를 알고 운명 運命을 개척하고 바꾸어 나가고 있는 자가 있었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극신.
또한, 명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하고 신강의 왕으로 군림해 있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이다.
그자로 인해 천마신교는 더더욱 강해질 것이고, 나아가 그들의 날카로운 검은 중원 그리고, 황실을 향해 겨누어질 것이다.
그런 위험한 자를 가만두어야 할까?
윤문의 차가운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절대 그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군.’
그의 가슴이 차가운 이성을 흩트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이성을 어지럽히는 가슴의 명령에 윤문은 복잡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내가 직접 처리한다.”
창가에 비친 윤문의 얼굴.
그의 얼굴은 사천을 넘어 전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한 적협공자 赤俠公子 라는 별호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차가운 얼굴이었다.
* * *
“바로 움직일 생각이냐?”
금색 수실의 흑의를 벗은 나는 왕일에게 옷을 건네며 물었다.
그에 왕일이 익숙한 자세로 내가 벗은 흑의를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오후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지금이 아닌, 약 반나절 후에 움직이겠다는 왕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네.”
“왜?”
너무나도 단호한 왕일의 말에 내가 묻자 왕일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망할 거지들 붕 뜨게 해야지요.”
“응……?”
무슨 소리일까?
왕일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왕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개방과 무림맹은 한창 바쁠 겁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행한 협행. 그것을 덮어야 할지 아니면 알려야 할지 말입니다. 무림맹 수뇌부 회의에도 이야기가 들어가겠지요.”
“호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게 한 다음에 선수 치겠다?”
왕일의 속셈을 파악한 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늘 하오문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 정적 관계인 개방은 신경 쓰이나 보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아서 해라.”
“조금 주무시렵니까?”
나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인 왕일.
녀석이 나를 보며 묻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왕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쉬시지요.”
“아니, 할 일이 있다.”
왕일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왕일이 다시 나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지만, 녀석의 입보다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나가 인마.”
귀찮게 하지 말고.
장난기 어린 나의 말에 왕일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뒷일은 맡기마.”
“네.”
나의 말에 왕일이 믿음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녀석, 가만 보면 사마천이랑 정말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왕일이 나가고.
나는 늘 입고 다니던 하늘색의 비단옷을 입었다.
이제는 무협공자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귀공자의 비단옷.
동경에 비친 나의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탁자 위에 있던 나의 애병, 뇌선을 집어 들고는 방을 나섰다.
마음의 정리는 끝이 났으니, 이제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
벌컥.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방문을 연 순간.
“어?”
나는 나의 앞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윤문을 발견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려 했는데, 녀석이 와 있다.
이것 참.
벗 아니랄까 봐 이것도 잘 맞는다.
“일찍 일어났네?”
놀란 표정을 지은 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윤문.
그런 윤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 찾아온 거야?”
“맞아.”
“왜?”
윤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에 윤문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외간 남자의 방에 막 들어오겠다고?”
“그 말은 지금 사용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지.”
“내가 웬만한 여자보다는 예쁘잖아?”
“하아…….”
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윤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웃긴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짜증 나는데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크큭, 들어와.”
솔직한 윤문의 반응.
그런 녀석의 반응에 나는 소리 내어 웃고는 녀석을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방에 위치한 탁자에 앉았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녀석의 앞에 차 대신 술잔을 내려놓은 내가 묻자 윤문이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었다.
“역시 넌 내 친구야.”
피식.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흔드는 윤문.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마주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이슬을 한 모금 마신 우리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감숙에는 같이 못 갈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술이나 마실 것만 같았던 윤문.
그런 녀석이 같이 가지 못하겠다는 말에 나는 조금의 섭섭함을 느끼며 의문 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에 윤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음…….”
“아마 당분간 못 볼 것 같다.”
윤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이 왔다.
녀석과의 이별이 아주 길어질 것이라는 나의 예감 말이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입을 열었다.
“윤문.”
“말해.”
나의 부름에 윤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윤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윤문의 두 눈동자.
위대한 천자의 핏줄이자 중원의 지배자인 황제, 혜제 惠帝의 두 눈동자는 굳건했다.
전생에서 숙부에게 자리를 빼앗긴 비운의 황제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에 나는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네 숙부들, 특히 연왕 蓮王. 그자를 조심해.”
* * *
멈칫.
유희를 끝내야 한다는 아쉬움에 술잔을 계속 만지작거리던 주윤문.
그는 위극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늘 자신의 앞에서 미소를 짓던 위극신.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주윤문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위극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야.”
“…….”
“내가 네 정체를 짐작하고 있듯이, 너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웃음기 어린 위극신의 물음.
그 물음에 주윤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승의 보고가 있기 훨씬 전부터 사실 위극신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주윤문.
그는 회귀를 경험한 사내로서, 보이지 않는 암투가 늘 존재하는 황궁에서 시간을 보내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위극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자신의 무공인 자광신공 紫光神功이 알려 주고 있었다.
위극신의 몸에서 순수한 마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주윤문이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위극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교와 황실. 사이가 안 좋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는 나를 벗으로 계속 대해 주었지.”
“…….”
“해서, 나 또한. 네가 황제든 평민이든 필요 없어. 넌 그냥 나의 벗이야.”
“…….”
복잡했다.
위극신의 입에서 나온 굳건한 말.
그 말에 주윤문의 표정은 굳어 갔다.
자신이 결심하는 동안, 자신의 벗인 위극신 또한 결심을 한 상태였다.
그것도 자신의 결심과는 정반대의 결심을 말이다.
그렇게 주윤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위극신이 두 눈에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숙부들을 조심해.”
위극신의 입에서 나온 말.
그 말속에 담긴 걱정을 느낀 주윤문의 표정이 다시 복잡해졌다.
자신의 짐작으로는 위극신.
이 녀석 또한 자신과 같은 회귀자다.
즉, 연왕에게 무참히 짓밟혔던 회귀 전 자신의 과거,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뜻.
위대한 존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왔던 주윤문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미치겠네.’
자신을 걱정하는 위극신의 마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상극인 두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 주윤문은 복잡했고, 그런 주윤문을 보며 위극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
“난 네 편이야.”
“…….”
스윽.
위극신의 말에 주윤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위극신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윤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생각 정리되면 평소의 모습으로 내려와. 해장탕 시켜 놓을게.”
“…….”
위극신의 말에 주윤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위극신은 싱긋 웃으며 주윤문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방을 나섰다.
쿵.
그렇게 방문이 닫히고.
홀로 남게 된 주윤문이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
자신과 같은 회귀자.
같은 세대에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의 존재가 자신을 걱정하고 또 위하고 있었다.
벗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