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86장 회상 回想
“오셨습니까, 형님!”
“그래, 일아.”
녀석.
사천에 있던 볼일을 처리하고 오랜만에 은하객잔에 들어선 나는 나를 반겨 주는 동생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인사하는 것은 좋은데 굳이 저렇게 어깨를 떡! 벌리고 해야 할까?
하여튼 이상한 놈이었다.
“이리로 오시지요!”
이제는 나의 전용이 되어 버린 창가 자리.
그곳으로 안내하는 왕일을 뒤를 따랐다.
“너도 앉거라.”
“넵.”
자리에 앉은 나의 말에 왕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야.”
“예, 사장님!”
“얼큰한 내장탕이랑 술을 내오거라. 오리고기도 조금 내오고. 아 닭고기도 조금 내오고, 동파육이랑 오향장육…….”
“녀석아! 이 형 배 터진다!”
계속해서 주문하는 왕일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타박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라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리탕이랑 죽엽청 두 병 내오거라.”
“알겠습니다!”
깔끔한 나의 주문에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해맑았다.
특유의 순수함이 느껴진달까?
꼭 옛날의 왕일을 보는 것 같았다.
“형님, 오늘 오리랑 돼지고기 상태가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맛을…….”
“되었다. 요즘 살쪄서 설이한테 혼나는 중이야.”
“크큭, 그러게 술 좀 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엄살에 녀석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객잔의 주인이 사파 지존, 사황성주에게 저렇게 무례한 언행을 내뱉으니 말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녀석은 객잔 주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의동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하오문주님은 건강하시고?”
“뭐 건강하시겠지요.”
나의 물음에 왕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자기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무책임한 왕일의 대답에 나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스승에게 관심을 좀 가지거라.”
“뭐, 이제는 제자도 아닙니다. 말했잖습니까? 완전히 물러났다고.”
하오문의 후계자였으나 모든 것을 때려치워 버린 왕일.
그런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오문 下午門.
정파에 개방이 있다면 사파에는 하오문이 있다.
기루와 도박, 사채 등등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며 사황성의 정보책이기도 한 문파.
사람들은 음지의 일을 처리하는 하오문을 속으로는 무시하지만 겉으로는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오문의 정보력은 개방에 필적하면서, 그들이 가진 금력은 어마 무시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파의 입장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아무튼, 그 문파의 후계자였던 왕일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하오문주는 물론 모든 장로가 아끼던 인재였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적응력과 통찰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벼슬도 본인이 원해야 하는 것이다.
천성이 귀찮은 것을 싫어했던 왕일은 하오문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하오문주와 장로들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금의 은하객잔 주인이 되었다.
참 특이한 놈이었다.
“에휴, 스승님 만나면 앉혀 놓고 하오문의 역사를 처음부터 설명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외울 지경입니다.”
나의 말에 계속해서 변명하는 왕일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오문주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헌데 이 녀석은 하기 싫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스승을 피하는 것은 물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객잔에서 무려 이십 년 동안이나 점소이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다.
정말, 독특한 놈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라고 불리던 아이가 붉은 내장탕과 술을 들고 왔다.
“허어, 고기는 내오지 말라 했거늘…….”
“숙수 어르신이 가져다 드리라고…….”
탁자를 가득 채우는 수 가지의 음식을 보며 내가 말하자 점소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꾸벅.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한 노인.
바로, 왕일을 따르는 수노였다.
그런 수노의 인사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수노의 정성을 봐서라도 한 젓가락씩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참, 어쩔 수 없지 뭐.
참고로 절대 내가 먹고 싶어서 젓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절대 아니다.
그나저나…… 나 살 빼야 하는데…….
삼십 줄에 접어들었더니 뱃살이 조금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조심해야 했다, 술도 좀 줄이고 말이다.
‘그래, 결심했어.’
금주와 살 빼기, 내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주 제대로 말이다.
쪼르르.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젓가락질을 하는 나의 옆.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른 왕일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그래.”
오리고기 한 점을 집어 먹으며 나는 대답했다.
거참.
이 오리고기 맛있네.
역시 이 집 잘한다.
자, 다음은 동파육을 한번 먹어 볼까나……?
“저 동생 찾았습니다.”
멈칫.
탐스러워 보이는 동파육을 향해 젓가락을 옮기는 것도 잠시.
나는 왕일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
그러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왕일을 바라보았다.
“혜정이라는 아이 말이더냐.”
“예.”
나의 물음에 왕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았다.
잘 지내고 있었는지, 또 어디서 찾았는지, 그동안 어떻게 자라 왔는지 등등. 아주 많았다.
하지만 왕일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모든 질문을 억눌렀다.
천성이 귀찮은 놈이 평생을 노력했다. 자신의 동생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헌데 동생을 찾았음에도 슬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답은 뻔하다. 동생이 죽었거나, 아니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홀짝.
그러고는 한 모금 마셨다.
“같이 마시지요.”
그런 나의 모습에 왕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과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한 잔의 술을 모두 비운 우리 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왕일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녀석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
그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를 하던 것도 잠시.
굳게 닫혀 있던 왕일의 입이 열렸다.
“혜정이의 나이가 금년에 열다섯입니다.”
“…….”
“열다섯인 그 아이…… 아직 어린 그 아이가 지금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
왕일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열다섯.
분명 어린 나이다.
평범한 농가의 자식이라면 이제 막 결혼을 하기 위해 혼처를 찾는 나이.
헌데 그런 어린아이가 두 아이의 엄마라고?
“열 살, 그 나이에 겁간을 당했습니다.”
열 살……?
그 어린아이를?
“…….”
“그리고, 겁간을 한 사내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개자식에게 맞아 가면서 부인으로 지내 왔다 하더군요.”
“이런 시X!”
콰앙!
미친.
말이 되는가?
자신을 범한 사내와 혼인을 해?
그 무슨 개떡 같은 경우란 말인가!
심지어 아직 여인이 되기도 전에!!
이런 젠장!
그런 희대의 쓰레기가 있다니.
너무나도 화가 났다.
천벌을 받아도 부족한 쓰레기 같은 자식.
그런 녀석을 떠올리며 나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왕일의 이야기에 격노한 내가 탁자를 내려치자 왕일이 슬픈 미소를 지은 채 술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마셨다.
“…….”
그런 왕일의 슬픈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정하자.
지금 누구보다 가장 분노할 사람은 왕일이다.
그런 녀석의 앞에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자, 진정하고. 수하에게 명령을 내려야겠다.
그 개자식을 찾아오라고.
진짜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그 개자식은 내가 잡아서 족…….
“이미 잡아들였습니다.”
“그러냐?”
녀석, 나의 마음을 눈치챘네.
그동안의 세월이 확실히 헛되지는 않았는지 나의 의중을 눈치챈 왕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는 제가 직접 고문을 하고, 오후에는 기술자가 고문을 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명의가 치료를 해 주며 각종 영약을 먹이고 있습니다.”
“…….”
아주 잘하고 있군.
역시 내 동생이다.
“형님.”
“그래.”
“죄송하지만…… 돈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돈?”
왕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오문주의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다.
그리고 이 은하객잔 또한 사천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객잔이다.
이 객잔의 수익과, 하오문에서 나오는 돈이 무시 못 할 정도일 텐데 어찌……?
내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왕일을 바라보자 왕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개자식을 치료하는 데 돈을 다 썼습니다.”
“…….”
“그 개자식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습니다. 최소 십 년. 우리 혜정이가 당한 괴로움만큼 괴로워야 합니다.”
“그래.”
왕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황성에 있는 영약과 돈을 보내 주마.”
“형님…….”
“그냥 받아라. 내 좋은 영약으로 보내 줄 터이니.”
그런 개자식은 당연히 오래 살아야 한다.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나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그 개자식에게 벌을 주는 것도 좋지만, 네 동생 혜정이라는 아이를 잘 돌봐 주거라. 그동안의 괴로웠던 기억, 그리고 한 번에 바뀐 상황에 많이 힘들 것이다…….”
“물론입니다.”
나의 말에 왕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우리 둘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사황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일에게 각종 영약과 엄청난 돈을 보내 주는 것은 물론, 사황성에 있던 뛰어난 명의까지 보내 주었다.
장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
왕일의 동생, 혜정이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말았다.
그런 개자식도 지아비라고 왕일에게 용서를 요구했다고 한다.
지 오라비 가슴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열 살의 나이.
지금의 개자식한테 시집을 가 평생을 녀석의 그늘 아래에서 자라 온 아이.
제대로 된 생각이 확립되기도 전에 그런 개자식에게 세뇌당하고 말았던 아이는 끝까지 그 개자식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요구에도 왕일은 그 개자식을 풀어 주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세뇌를 당해 버린 아이는 지아비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아비를 용서해 달라는 편지와 함께 말이다.
진짜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어떻게 세뇌를 시켰기에…….
그 개자식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사천으로 날아갔다.
최대한의 신법을 펼치면서 말이다.
사천에 도착하고 바로 은하객잔으로 들어선 나는 왕일을 찾았다.
그러자 수노가 왕일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굳게 닫힌 방문 앞.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아 수노와 점소이들을 걱정시키고 있었다.
차마 주인의 방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서 녀석의 방문을 열었고 이내.
“아아…….”
목을 매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추욱 늘어진 왕일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왕일아…….”
멍청한 녀석아…….
어찌 이런 선택을 하였단 말이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나의 의제 義弟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왕일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나서서 도와주어야 했다.
하오문의 정보력을 믿고 가만히 있었으면 안 되었다.
만약…… 만약에 내가 직접 나서서 혜정이를 조금만 더 일찍 찾았다면 너는 행복했을까?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환하게 웃으며 동생에게 못 주었던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왕일아.
내 동생 왕일아.
형이 너무 미안하다.
나는 내 친동생도, 내 의동생도 지키지 못했던 머저리, 반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