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제77장 노인 老人 (2)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구나.’
현현자 玄玄子 장삼봉의 맥을 이어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무학과 도학을 발전시켜 온 무당파.
무당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청 자 배 중 유일하게 무학 武學 이 아닌 도학 道學 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도인 청학은 자신의 내부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선천지기 先天志氣에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
자그마치 십 년 동안 도학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유랑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힘들게 보내왔던 청학은 이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스승님!’
자신 하나만 믿고 늘 방긋 웃어 주던 어린아이.
자신의 제자 태진이 떠올라 청학을 더욱더 괴롭게 하였다.
‘미안하구나…….’
뛰어난 무재를 지녔음에도 스승의 뒤를 이어 무당의 도맥 道脈을 잇겠다면서 고집을 피우던 아이.
그런 아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사제, 아이의 무재를 탐내던 당대의 태극검 太極劍 에게 제자를 맡기고 무당을 떠났다.
울며 자신을 따라가겠다는 아이에게 도학의 가르침을 대성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약속을 이제는 지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지금 천명을 다해 이승을 떠나야 하니 말이다.
‘그래, 십 년이면 되었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이나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련을 했고, 도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하지만 하늘은 무능한 자신에게 가르침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 자신의 천명은 다한다.
그 사실에 슬픈 것도 잠시, 청학은 이내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모든 집념과 의지를 내려놓았다.
세상을 떠나는데 이승의 미련을 가져가서 뭐 하겠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다음도 있다.
현생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도학.
부디 다음 생에서는 대성을 이루기를 기도하며 이번 생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조금은…… 쉬어야겠구나.’
십 년 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 이 늙은 육체도 더 이상 힘이 없었다.
그리고 심적으로도 많이 피곤한 상태.
이제는 힘들다.
푹 잠을 자고 체력을 보충하면 반겨 주는 것은 바로 다음 생일 것이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지며 청학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려는 그때!
우우웅!
앞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이 자신의 영혼을 붙잡았다.
‘!!’
자신의 앞에서 느껴지는 정순한 기운.
자신이 배우고 익힌 선기보다 더 정순한 기운에 내려놓았던 청학의 미련이 다시 되살아나고 말았다.
그리고.
부릅!
청학은 두 눈을 떴다.
자그마치 이틀.
이틀 동안 두 눈을 감고 있던 청학이었기에 두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청학은 억지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앞에서 정순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사내.
청녹색의 섭선을 들고 있는 미청년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 * *
“하하…… 안녕하세요?”
두 눈을 부릅뜬 노인.
그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노인의 부담스러운 행동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
그런 나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
그 노인의 눈빛에 엄청난 갈망을 느낀 나는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노인네가 저런 눈빛을 지으니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내가 계속해서 웃자 노인의 부릅뜬 두 눈이 깜빡였다.
깜빡깜빡.
그렇게 오랜만에 접한 빛에 적응하듯 여러 번 깜빡여진 노인의 두 눈.
잠시 후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노인의 초점이 똑바로 잡혔고 이내 그 두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힌 노인의 두 눈.
그 눈 속에서 깊이와 현기를 느낀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보통이 아닌 노인이었다.
그런 나의 미소에 노인 또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아…….”
노인의 입이 열리자 들려오는 갈라진 목소리.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수분을 섭취하지 못했는지 노인의 목은 많이 말라 있었고 그로 인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에 나는 서둘러 품속에서 작은 물병 한 개를 꺼내었다.
“먼저, 입술을 적시고 그다음에는 입에 물을 머금고 뱉으십시오.”
목이 마르다고 한 번에 들이켰다가는 큰일 나니 말이다.
그런 나의 조언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건넨 물통을 받아 들어 나의 조언대로 행동하였다.
그렇게 입 안을 적시기를 세 번.
소량의 물을 조심스럽게 넘긴 노인이 물통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초면에, 미안하네.”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는 노인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중하게 대답하는 나의 모습에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물병을 들어 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더러워진 것 같아 미안하군.”
흑색의 도자기로 이루어진 작은 물병.
고급스러운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노인의 손자국과 입술 자국이 그대로 남아 더러워진 물병의 모습에 노인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병으로서 진정으로 필요한 이의 갈증을 해소시켰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 나의 대답이 의외였을까?
노인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잠시. 다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혹, 천마신교의 소교주인가?”
“…….”
놀랍다.
어떻게 나의 정체를 한 번에 파악한 것이지?
나의 겉모습은 누가 보아도 명문가의 공자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천마신공 특성상 마기가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며, 무인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섭선을 들고 겉옷 안, 허리춤 깊숙이 검을 감추고 있었다.
물론 섭선 또한 나의 무기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 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중원 유람을 나왔거나, 삶을 즐기기 위해 걸음을 옮긴 풍류공자 그 자체.
헌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어찌 천마신교의 소교주라고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상당히 놀라웠다.
그런 나의 놀란 모습에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당의 청학이라고 하네.”
역시, 무당이었던가.
노인의 소개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선기라면 아무래도 곤륜보다는 무당파의 인물일 것이라 짐작했다.
무당과 같이 곤륜파 또한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청해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교와 마찰이 잦았고 그로 인해 곤륜의 도학은 이미 상당히 변질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곤륜에서 이렇게 정순한 선기는 찾지 못할 것이다.
무당파의 일부 사람들은 곤륜파를 더 이상 도가의 문파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나는 노인의 이름을 알아차리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청 자 배…….”
바로, 현 무당파의 장문과 같은 항렬이었다.
그런 나의 놀란 모습에 노인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현 장문인의 사형이지.”
“아…….”
들은 적이 있었다.
신선도인 神仙道人.
구대문파의 수좌로 꼽히는 무당파의 대사형이면서 장문이라는 최고의 직위를 거부하고 사제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괴짜.
중년의 나이, 무인이기를 포기하고 도학의 가르침을 따랐던 도인이었으며 전 세계를 유랑하며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도인.
신선에 가장 가까웠던 도사라며 신선도인 神仙道人 이라 불렸던 존재가 바로 나의 눈앞에 있는 노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노인의 정체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서둘러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말학 후배 위극신이 신선도인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허허, 살다 보니 소교주에게 인사를 다 받아 보는구만.”
정중한 나의 인사가 놀라웠을까?
청학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선에 가장 가까운 도사.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선배님이십니다. 이 정도의 예는 당연히 갖추어야지요.”
“허허, 당대의 소교주는 기존의 천마신교의 인물들과는 아주 다르군.”
“네, 다릅니다. 다르기 위해 노력했고, 또 천마신교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어진 나의 말이 뜻밖이었을까?
청학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심인가?”
놀란 음성의 청학.
그의 질문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만도 했다.
천마신교는 천 년이라는 역사 동안 계속해서 변함이 없었던 폐쇄적인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천마신교를 변화시킬 것이라 다짐을 했으니 말이다.
이미 나는 사황성만큼이나 천마신교에 정이 든 상태다.
나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마인들.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있어서 가장 최우선의 목표였다.
“헌데, 선배님.”
“그래, 편하게 말하게.”
“제가 신교의 소교주인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청학의 대답에 나는 정말 편하게 물었다.
의문이 담긴 나의 물음에 청학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정순한 기운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느껴지십니까?”
나의 물음에 청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 선기라는 이름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연의 기운. 모두 하나일세. 보통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마인들의 기운은 상당히 탁하지만 자네가 가진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기운이야. 순수한 마기를 지닐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천마신공뿐. 마도의 정점에 위치한 무공을 익힌 젊은 사내라면 당연히 소교주가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청학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청학의 말이 맞았다.
‘마기’, ‘선기’라는 이름으로 나누더라도 결국은 자연의 기운이다.
그 뜻은 뿌리가 같다는 뜻이고, 내가 청학의 선기를 알아보았듯, 청학 또한 나의 마기를 알아본 것이다.
그에 내가 납득하자 청학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나는 자네에게 호감이 가네.”
어라?
고백인가?
노친네의 고백은 상당히 곤란한데…….
“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청학의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청학이 소리 내 웃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그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괜히 노선배님에게 호감이 갑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충분히 존경할 가치가 있으신 분 같습니다.”
“그거 고맙구만.”
나의 칭찬에 청학이 진심으로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나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청학이 품속에서 낡은 서책 한 권을 꺼내었다.
“이건 십 년 동안 내가 세상을 유랑하면서 깨달음을 모아 둔 서책이네. 절세신공이 아닌, 그저 도학의 가르침이 적혀 있지.”
“……?”
나를 향해 내밀어진 낡은 서책.
청학의 모든 깨달음이 적혀 있는 서책을 내려다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것을 나에게 내미는 것일까?
“이것을 자네가 대신 맡아 무당파에 전해 주지 않겠는가?”
“제가 말입니까?”
이어진 청학의 부탁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내가?
아니 왜?
자기가 직접 전해 주면 되지.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심지어 천마신교의 소교주인 나에게 무당파에게 있어서 중요한 물건을 나에게 맡긴다고?
아무리 지금의 무당파가 무학을 중요시한다지만 뿌리는 도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무당파에게 있어서 도학의 가르침은 무시하지 못한다.
무당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뿌리이니 말이다.
한데, 현재 도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인 청학이 그런 도학에 관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긴다?
내가 이거 먹고 튀면 무당파가 흔들릴 텐데?
이 노인네 알고 보면 노망난 거 아니야?
“허허! 나는 노망나지 않았다네.”
움찔.
“소교주인 자네에게 귀한 것을 맡기는 것이라 놀란 거 아네.”
“…….”
이 노인네 뭐지.
나이를 늙었더니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인가.
나의 진심을 전부 파악한 청학의 모습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청학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이기를 떠나서 무림을 구원 救援 할 영웅 英雄 일세.”
“……?”
“허허. 받아 주지 않겠는가? 노인네 팔 떨어지겠네.”
청학의 갑작스러운 말.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멍한 것도 잠시.
뒤이어 들려오는 청학의 엄살에 나는 얼떨결에 청학이 건넨 서책을 받아 들었다.
“고맙네.”
“아니, 저는 아직 대답을…….”
청학의 감사 인사에 나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나의 앞에 정좌로 앉아 있던 청학.
그가 조금씩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부탁하네. 그리고…… 혹 시간이 된다면 태진이라는 아이를 챙겨 주겠나?”
“…….”
점점 먼지로 사라져 가는 청학.
그의 두 눈에 담긴 진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를 잠시.
나는 청학의 두 눈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애 돌보는 것은 제 전공입니다.”
오대마가의 아이들도 훌륭한 사내들로 키웠으니 말입니다.
자신감 어린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청학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맙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청학은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의 육신은 물론 입고 있던 옷가지까지 말이다.
그렇게 사라진 청학의 모습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스윽.
잠시 후 나는 청학이 사라진 넓은 돌을 향해 두 번의 큰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