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제64장 파사국의 사신 (2)
“피곤해…….”
흐음…… 곤란하다.
나는 나의 옆에서 눈을 비비며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은설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시각은 유시(17시~19시).
한창 연회가 시작될 시각이다.
이 시각에 천마신교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서은설을 달래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파사국의 사신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말이다.
은설의 흥미를 이끌면서 또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어떤 게 있을까…….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던 그때.
서은설이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가자. 나 졸려.”
“…….”
“극신……?”
어떡하지?
무슨 말로 서은설의 시선을 끌어야 하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은설을 보며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내가 난처해하던 그때.
나의 옆에 있던 사마천이 입을 열었다.
“서 소저, 조금 이따 신강에서 유명한 경극단이 공연을 합니다.”
“경극이요?”
좋았어.
사마천의 말에 서은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사마천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노래 唱와 대사 念 동작 做, 무술 동작 打까지. 이 네 가지가 어우러진 연극이지요.”
“와!”
이 녀석. 자세히도 안다.
서은설의 흥미를 이끌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설명하는 사마천을 보며 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극신! 가자!”
“그래.”
그런 사마천의 설명에 언제 피곤했냐는 듯 흥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한 서은설.
나는 그런 서은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사마천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아직 전음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마천.
녀석은 갑작스러운 전음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시(23시~01시)에 끝납니다.’
서은설에게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한 사마천.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나를 도와준 사마천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짜식, 고맙다.
“할아버지, 조금 늦게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럼, 늙으면 잠도 없어지니 상관없다.”
혹여나 윤무천이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나의 물음에 윤무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우리와 조금 떨어져 대기하고 있는 흑풍을 바라보았다.
“군사에게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고개를 숙인 흑풍.
그가 고개를 돌려 수하에게 눈짓했고 수하 한 명이 나와 윤무천을 향해 예를 차려 보이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마친 나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되었다.
* * *
“아버지!”
“닥쳐라!”
마뇌가 나가고.
흥분한 잔크의 부름에 칼스가 매서운 눈빛으로 잔크를 보며 호통쳤다.
움찔.
늘 인자한 미소를 짓던 칼스.
그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에 잔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고, 칼스는 그런 잔크를 보며 매서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곳은 피도 눈물도 없는 마도인들의 근거지다. 정신 차려라.”
“…….”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미친놈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사신이고 뭐고 너는 물론 나를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본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뻔히 알 텐데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겁만 주다가 말겠죠.”
서역의 강대국 파사국.
동양의 강대국인 명나라에 뒤지지 않는 자신의 조국을 떠올리며 잔크가 말하자 칼스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파사국이 강한 건 맞지.”
“그렇습니다. 헌데 왜 우리가 이렇게 무시를 당해야 합니까!”
칼스의 동의에 자신감을 얻었을까?
잔크가 좀 전과는 달리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주장했다.
그에 칼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멍청한 자신의 아들, 잔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뭔데?”
“……?”
칼스의 입에서 나온 말.
그 영문 모를 말에 잔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사국에 있어서 동양의 물건은 큰돈이 되고, 동양 또한 우리 문화의 물건이 큰돈이 된다. 그 도움은 무시 못 할 정도이지. 동양의 지배자인 명나라가 없다면 서역의 패자인 파사국도 없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
“그런 동양과 파사국의 교류를 이어 주는 곳이 바로, 이곳 신강이다.”
“…….”
“이자들이 미친 척하고 중간에서 일방적으로 교류를 끊어 버린다면? 우리는 뱃길을 이용해 동양과 교류를 해야 하고, 뱃길을 이용하면 저 미개한 왜국 倭國들의 습격을 막아서야 한다. 미개한 섬나라 인간들답게 겁대가리 없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놈들이지.”
“본국이 그들을 두려워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칼스의 말에 잔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잔크의 말이 맞았다.
파사국은 서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대국이다.
고작 왜국 하나가 두렵다고 이 무역 길을 고집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는가.
파사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왜국 따위 그냥 밀어 버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뭔데?”
칼스가 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
자신의 말에 가만히 입을 다문 잔크를 보며 칼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우리의 목숨으로 왜국과 전쟁을 벌이겠느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물자와 인력이 필요한데?”
“…….”
“고작 우리 둘 때문에?”
“…….”
“멍청한 놈.”
칼스의 말에 잔크는 입을 다물었다.
칼스의 말이 맞았다.
자신들이 이곳에서 설령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파사국에서는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이야기를 덮어 둘 것이다.
거기에다가 마뇌는 똑똑한 인물.
그에 대한 사과와 그에 준하는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파사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주제 파악을 잘해라.”
외교관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소양.
바로 자신의 주제 파악이다.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강한 자에게는 비굴하게.
그것을 삶의 이정표로 살아온 칼스의 말에 잔크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아직 어리고 혈기왕성한 잔크에게 있어서 칼스의 사상은 너무나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칼스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방문을 나섰다.
아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이 이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잔크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쾅!
그렇게 생각을 하며 칼스가 방을 나서자 잔크가 홀로 남게 되었다.
몰려드는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잔크.
그리고.
“씨X.”
그는 무능한 자신의 신세에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파사국의 모든 외교를 담당하는 칼스의 아들로서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온 잔크.
그런 환경에서 자라 온 잔크는 칼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결국.
“술을 가져와라!”
술로 기분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너무나도 화가 날 때 먹는 술.
칼스가 늘 잔크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음주로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 * *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지마궁에 있던 천소화의 전각을 없애고 천마의 거처인 천마각 옆에 새로 세운 소화각 素華閣.
그곳의 주인이 되어 버린 대부인 천소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리진을 바라보았다.
“네, 피곤해서요…….”
천소화의 말에 백리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예쁜 건물이네요.”
삼 일 전 완공이 되었고, 어제 입주한 천소화의 거처를 둘러보며 백리진이 살짝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러게. 그이가 이렇게 배려심이 있을 줄은 몰랐어.”
천소화의 이름을 따서 소화각 素花閣 이라는 이름으로 지었고, 천소화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들의 정원이 있으며, 그 정원을 주위로 빙 둘러져 있는 고풍스러운 전각들까지.
천마신교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건물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천소화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백리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욱신.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지만 말이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미소를 지은 백리진이었지만 상대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백리진의 모습에 천소화가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듯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천소화의 모습에 백리진은 가슴이 꽉 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뺏고 싶어.’
머릿속을 계속해서 감도는 나쁜 생각들.
‘탐나.’, ‘내 것이 되어야 해.’, ‘왜 나는 못 가지는 거야?’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번뇌에 백리진은 문득 생각했다.
이 얼마나 못난 모습인가?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천소화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미움도 없는 무조건적인 호감.
그 호감 어린 눈빛에 백리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고맙고 사랑스러운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다니.
이런 언니를 질투하고 미워하다니.
못났다.
너무나도 못났고 또 못났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했던 백리진은 결국.
뚝.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진아!”
그런 백리진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천소화.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백리진은 서둘러 눈가를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울음을 꾹 참은 백리진의 말.
그 말에 천소화는 백리진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백리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스윽.
백리진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
그런 백리진의 행동으로 인해 허공에서 멈추어 버린 천소화의 손.
백리진은 그런 천소화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올게요.”
“응, 기다릴게.”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야속한 동생.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안쓰러운 동생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던 천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천소화의 말에 백리진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소화는 그런 백리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타다닷!
“아! 진아야……?”
타닷!
소화각을 나서자 자신을 반기는 오라비를 뒤로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 백리진.
이윽고.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릴게.’
상처받은 표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던 천소화.
너무나도 착해서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겠는 천소화의 모습이 떠올린 백리진은 두 눈을 감았다.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친언니와도 같은 감정을 준 여인이다.
“…….”
그리고 미소를 지은 천소화의 모습이 사라지고, 흑발의 장발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천마 위관악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이 아닌 천소화를 바라보고 있는 위관악의 모습이.
백리진은 생각했다.
그 다정하고 매력적인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백리진은 똑똑하고 강한 여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인이기도 했다.
머리로는 절대 안 된다고, 저런 언니를 배신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은 정반대였다.
“아아…….”
그에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백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