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제56장 광마도 狂魔刀 (1)
“드디어 잠들었네요.”
함께 있던 대공자가 쓰러지고 그가 걱정이 되어 곁에 있겠다고 때를 쓰던 서은설.
그런 서은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 같은 얼굴로 잠에 빠져들자 백리진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에 사파 지존, 패천황 백리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미소를 짓는 백리진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진 백리관.
그런 백리관의 모습에 백리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전에 있었던 그 기사 奇事 때문에 그런가요?”
대공자 위극신이 쓰러질 때 일어났던 정체불명의 노란 빛.
그 빛을 떠올리며 백리진이 묻자 백리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빛은 은설이가 지니고 있던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졌던 반쪽을 대공자가 가지고 있었고.”
“확실히 이상하긴 해요.”
삼 년 전 귀신이 장난을 친 듯 거짓말처럼 은설의 목걸이가 반쪽이 되었다.
남은 반쪽을 찾기 위해 사황성은 물론 주변 일대 전부를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헌데 그 반쪽이 천산을 넘어 이곳 신강에 있다고?
기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내일 교주와 이야기를 해 보시지요.”
계속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백리관을 보며 백리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의 친동생인 백리진은 알고 있었다.
백리관이 한번 고민에 빠지면 그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며칠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염려한 백리진의 말에 백리관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지.”
“그…… 오라버니.”
“응?”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백리관.
그는 자신을 부르는 백리진의 목소리에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
불안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붉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는 백리진의 모습에 백리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다가 떨림으로 인해 불안하게까지 들리는 음성까지.
너무나도 낯선 백리진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리관은 이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마, 말이냐?”
“예…….”
백리관의 물음에 백리진이 고개를 푸욱 숙이며 대답했다.
그에 백리관은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짐작이 맞는 듯했다.
사황성에서 태어나고 자라 혈화라는 별호로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온 자신의 동생이다.
하지만 지금은…….
“…….”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이 처음인지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티가 났고, 눈치가 빠른 백리관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에 백리관은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된다.”
“……?”
단호한 백리관의 말.
흔들림 없는 백리관의 말에 백리진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호감, 집어넣어라.”
“오라버니……?”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하는 백리관의 모습에 백리진이 당황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늘 웃는 상으로 장난을 치던 오라버니가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너무나도 무서웠다.
“나는 네가 누구를 좋아하더라도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도와주려고 했지. 그것이 거지이든, 심지어 같은 성을 지닌 여자이든 말이다.”
“!!”
너무나도 생각지 못한 백리관의 말에 백리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왜 동성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천마는 안 된다.”
그렇게 어이가 없던 것도 잠시.
백리관의 입에서 나온 차가운 말에 백리진이 얼굴을 굳혔다.
“진아.”
“…….”
“그 친구가 대부인을 바라보는 얼굴을 보았지 않느냐?”
보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존재, 소중한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어찌 그 눈빛을 잊겠는가?
그 눈빛을 보고 다시 반했는데 말이다.
백리관의 물음에 백리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 백리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상처받는 것이 싫다.”
“…….”
“네가 행복하다면 그 누구도 나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너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안다.
그가 천소화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꼈다.
자신이 들어갈 조금의 틈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상기시킨 백리관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아.”
“네.”
“미안하구나, 이런 말을 하게 되어.”
괴로워하는 백리진을 보며 백리관은 침울한 어조로 사과했다.
그런 백리관의 사과에 백리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래.
자신이 접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했다.
* * *
“대공자님!”
“푸하하! 괜찮소이까!”
이른 아침.
나는 문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모처럼 편안하게 잠을 이루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아까웠다.
조금만 더 자면 기분이 아주 좋았을 텐데…….
망할 놈들.
“대공자님.”
“그래.”
밖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익숙한 목소리.
유화의 목소리에 나는 침상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공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아…… 들여보내.”
벌써부터 골이 울려오는 듯한 기분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런 나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대공자님!”
“공자님!”
“푸하하하!”
“괜찮습니까!”
네 명의 아이들이 나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문 부서진다.”
너무나도 상남자스럽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미 부서졌구나.
아이들의 뒤에서 부서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너덜거리는 문의 모습에 나는 다시 이마를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대표 격인 연장자 사마천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안 괜찮아 보이냐?”
“너무 괜찮아 보여서 걱정입니다.”
“말장난하자고?”
“하고 싶으십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아니야?”
“공자님이 원한다면 해 드리겠습니다.”
하! 이 새끼.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하는 사마천을 보며 나는 화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마 형, 예를 지키십시오.”
그런 사마천의 뒤.
차가운 인상을 지닌 단진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사마천에게 경고했다.
그에 사마천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단진 공자, 이것이 나와 대공자님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개뿔.”
애정 표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마천의 괴상한 말에 나는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푸하하 웃고 있는 구양적을 바라보았다.
“야.”
“푸하하!”
이제는 웃음이 대답이 되어 버렸다.
나의 부름에 소리 내어 웃은 구양적을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문 고쳐 놔.”
똑똑히 보았다.
가장 선두에서 문을 박차 버린 구양적을 말이다.
그런 나의 말에 구양적이 다시…….
“푸하하!”
웃었다.
진짜 저 망할 웃음.
도저히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밥은?”
“함께 먹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네 명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내가 묻자 가만히 있던 야율민이 대답했다.
그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령이는?”
“서 소저에게 갔습니다.”
“아 그래?”
“네, 혈화 血華 대협께서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야율민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다행이네.
“가자.”
“푸하하!”
“너는 꺼져.”
“푸하하! 왜 그러시오!”
은근슬쩍 우리를 따라나선 구양적.
그런 구양적을 보며 내가 툴툴거리는 어조로 말하자 구양적이 당당하게 물었다.
그에 옆에 있던 단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너는 삼류니까.”
아직 소주천을 이루지 못하여 화식을 하지 못하는 구양적.
그런 구양적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 단진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들.
정말 사이가 좋았다.
“푸하하! 얼음탱이! 조금만 기다려라!”
“나는 열 살에 소주천을 이루었다.”
“푸하하!”
“하지만 너는 불가능하지.”
“푸하하!”
“나는 열 살에 대공자님과 함께 식사를 하였지.”
“푸하하!”
“아주 맛있는 사천 특유의 얼큰한 탕이었다. 오리고기가 끝내주었지.”
“푸하하…….”
그만.
끊임없이 놀리는 단진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단진의 팔을 잡았다.
이 녀석은 다 좋은데 나와 관련만 되면 적당히를 모른다.
아주 귀찮은 놈이었다.
“가자.”
“네.”
구양적을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단진을 진정시킨 나는 침상에서 벗어나 앞장섰고 그런 나의 뒤로 네 명의 아이들이 따라나섰다.
삼 년 전.
처음 만난 이후로 이들은 나의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함없이 말이다.
* * *
“왜 왔느냐?”
“거참,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오?”
지마궁 地魔宮에 위치한 마의당 魔醫堂.
그곳의 당주이자 천마의 주치의인 마의의 싸늘한 어조에 한 노인이 팔짱을 끼며 삐딱한 자세로 대답했다.
“누가 동생이더냐?”
“천륜을 저버릴 셈이오?”
“망할 놈.”
한마디도 지지 않는 노인.
그런 동생 놈을 보며 마의는 욕설을 내뱉었다.
“왜 왔느냐?”
“폐관을 끝냈소.”
“지존에게는?”
“인사드리러 가야지.”
동생의 대답에 마의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지존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다.”
“알다시피 나는 지존에게 별로 충성심이 없소이다.”
“무천!”
동생, 아니 천마신교의 우호법이자 광마도 狂魔刀 라는 무서운 별호를 지닌 전대고수 윤무천의 말에 마의가 진정으로 분노한 듯 소리쳤다.
“뭘 새삼스럽게 화를 내고 그러는 거요?”
마의의 분노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윤무천.
그의 말에 마의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꺼져라.”
“갈 거요.”
마의의 축객령에 윤무천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섰다.
“헌데, 천마신교에 무슨 일 있소?”
“…….”
“너무나도 변했소이다.”
“무엇이?”
무천의 물음에 마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죽일 놈이고 미운 놈이더라도 자신의 동생이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녀석의 대화를 받아 주게 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무천은 늘 이렇게 자신을 찾아왔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마의의 물음에 윤무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공기가 변했소이다.”
“…….”
“그 차갑고 삭막했던 공기가…… 이상하게 따뜻해졌단 말이지.”
귀신같은 놈이었다.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새로운 경지에 올라 기감에 더욱더 예민해진 윤무천.
그런 윤무천을 보며 마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윤무천의 말이 맞았다.
천마신교는 변했다.
대공자라는 사랑스러운 존재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윤무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가 보겠소이다.”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윤무천이 가볍게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격식 없고 무례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행하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마의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휘잉~
거짓말처럼 윤무천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렇게 윤무천이 사라진 빈자리를 잠시 바라본 마의.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그 아이를 만나면 치유가 될 것이다.”
손이 떨려 더 이상 의원 노릇을 하기 싫었던 삼 년 전.
그때 대공자를 만나고 거짓말처럼 자신의 병이 고쳐졌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이십 대 젊었던 그때의 열기를 되찾은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사랑스러운 대공자가 저 못난 놈에게 따뜻한 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