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제52장 대계 大計
“평소에 섭선을 사용하는 거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서은설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그런 나의 대답에 서은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 나는 나도 모르게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검을 사용해.”
“헌데, 왜 섭선으로 수련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두 번째로 사용하는 물건이거든.”
“아…….”
나의 대답에 서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한 거야?”
“…….”
갑자기 훅 들어온 서은설의 물음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나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 것일까?
서은설이 특유의 맑은 두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젠장.
저 눈빛은 반칙이었다.
서은설의 눈빛에 괜히 긴장이 되었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게 좋잖아.”
“아!”
곧 죽어도 멋을 지키겠다는 나의 의지가 담긴 대답.
그 대답에 순수한 서은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풉.”
옆에서 사마천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도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으니 말이다.
“왜 웃어요?”
하지만 우리 은설이는 무시를 못 했나 보다.
입가를 가리며 웃는 사마천을 향해 서은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사마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죽. 는. 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찔끔한 사마천이 다시 고개를 돌려 서은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웃긴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요?”
“뭔데요?”
집요하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빛으로 자세히 파고드는 서은설의 모습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 대상자인 사마천은.
“비밀입니다.”
머리 좋은 놈답게 비밀이라며 대답을 사수했다.
그에 서은설은 볼을 부풀렸다.
호기심이 강한 나이다 보니 무엇인지 궁금했나 보다.
“야룡아. 령이는?”
“처소에 있을 것입니다.”
창마 야율진이 뇌옥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처소인 소교주전에서 머물고 있는 야율 남매.
그런 야율민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서은설을 바라보았다.
“령이에게 가 봐. 우리는 수련해야 하거든.”
“혼자서?”
나의 말에 서은설이 무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서은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 수 있지?”
“음…….”
나의 말에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는 서은설.
그런 서은설을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은설이는 용감한 아이. 아니었나?”
“맞아! 나는 용감해!”
도발 어린 나의 말에 서은설이 고개를 치켜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각오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갈게! 이따가 봐!”
“안녕.”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서은설.
그런 서은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정말 귀여웠다.
나의 도발에 바로 넘어가는 모습도 귀여웠고, 연무장 바로 앞에 위치한 전각이 소교주전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워 저렇게 달려가는 것도 귀여웠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지?
모든 어린아이들이 귀엽지만 우리 은설이는 더 귀여운 것 같았다.
“대공자님.”
아빠와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나.
그런 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 사마천이 입을 열어 나를 불렀다.
그에 나는 미소를 지우고는 고개를 돌려 사마천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잘 돌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친해진 거지.”
사마천의 말에 내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런 나의 대답에 사마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채채챙!
“얼음탱이 새끼!”
“재수 없는 놈!”
흉포한 기세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야율민과 단진.
“푸하하! 덤벼라 덤벼!”
그리고 멀쩡한 나무를 두 주먹으로 때리고 있는 구양적.
그런 아이들을 한 번씩 바라본 사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사마천 이 자식.
자기는 저 녀석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는 왜 아닌 척해?”
그에 내가 묻자.
“저는 성인입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요. 후후.”
사마천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올해 열여덟.
성인의 나이가 됐다며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대답하는 사마천이었지만 나의 눈에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그냥 애일 뿐이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판 할까?”
“벌써 체력이 돌아오셨습니까?”
체력은 물론이고 내공까지 돌아왔다, 인석아.
놀란 사마천의 물음에 나는 싱긋 미소로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부채를 펼쳐 들었다.
“들어와.”
“네.”
나의 도발에 사마천이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
기세가 제법 날카롭다.
사마천의 매서운 기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사마천이 강해졌는데 왜 내가 뿌듯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 * *
“스승님.”
“예, 전하.”
명나라 수도 남경 南京.
대명 제국의 건국 황제 명태조의 손자이며, 황위 계승 서열 일 위인 의천 태자의 아들 주윤문의 부름에 그의 스승을 맡고 있는 방효유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에 주윤문이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어떻습니까?”
“…….”
“괜찮으니 말하세요.”
주윤문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방효유.
그런 방효유의 모습에 주윤문은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에 방효유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만…… 위독하십니다.”
방효유의 대답에 주윤문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예.”
주윤문의 나지막한 부름에 다시 고개를 숙인 방효유.
주윤문은 그런 방효유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는 삼 년 뒤. 돌아가십니다.”
“!!”
갑작스러운 주윤문의 말이 놀라웠을까?
방효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십사 년 후 할바마마께서 돌아가실 것입니다.”
“전하!”
천자이자 대륙의 주인인 명 태제.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주윤문의 불손한 말에 방효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 방효유의 모습에 주윤문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주윤문의 말.
그 말에 방효유는 대답했다.
방효유.
그는 모든 황족들의 스승이면서 시강학사로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있다.
명 태제인 주원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위대한 학자였고, 대륙의 모든 선비들에게 존경받는 유학자였다.
그리고 주윤문을 전담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지 삼 년이 되었고, 그 삼 년 동안 주윤문의 뛰어난 두뇌와 눈치, 그리고 일반인들과는 비교가 안 될 독심에 놀랐던 그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주윤문이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은 필시,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방효유의 비장한 대답에 주윤문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부탁입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십시오.”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주윤문의 모습에 흠칫한 방효유.
그가 긴장한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소신은 무엇이든 따를 것이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말고 명을 내리소서.”
명 태조를 향한 방효유의 충심은 진심이었으나 이미 지금의 태양은 곧 저물어갈 태양이다.
삼십여 년 전, 전국을 휩쓸며 그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던 명장 주원장.
그는 이제 더 이상 화려하게 타오르던 태양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황손의 스승이 된 뛰어난 학자 방효유.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소년.
바로 주윤문을 보고 그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토록 강하던 명 태제는 이제 저물어가고 새롭고 강렬한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미 마음을 굳힌 방효유.
그가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 보이자 계속 미소를 짓고 있던 주윤문이 돌연 미소를 지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황권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예.”
몸이 약한 의천 태자. 그리고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손자 주윤문.
그들을 위해 명 태조는 다른 자식들, 즉 의천 태자의 형제들에게 번왕 藩王 이라는 직위를 내려 수도 남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었다.
각자 정해진 지역을 다스리며 군주국으로서 황궁에 충성을 바치도록 한 것이다.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 태조의 의지로 결국 이루어진 이 제도는 어린 주윤문을 수많은 암살 시도에서 지킬 수가 있었지만 황권을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염두에 둔 듯한 주윤문의 말에 방효유가 짧게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보기에는 황권 강화에 있어 가장 큰 방해물은 무엇이라 생각되옵니까?”
“번왕이지요.”
“그렇지요.”
방효유의 대답에 주윤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번왕뿐일까요?”
“……?”
갑작스러운 주윤문의 물음에 방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 황위를 위협하고 있는 존재는 번왕들뿐이다.
헌데 다른 존재가 또 있다고?
방효유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짓자 주윤문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무림 武林.”
“!!”
생각지 못한 주윤문의 짧은 대답에 방효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대륙의 주인인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자기들만의 법과 세력을 만들어 활개를 치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무림이지요.”
“하지만 무림인들은…….”
“압니다, 강하지요.”
자기들만의 세력을 구축하여 오랜 시간 동안 무공을 발전해 온 무림인들.
그들은 강했다.
수백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대명 제국이더라도 무림을 없애기에는 너무나도 잃을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수많은 황제들은 무림과의 공생 共生을 선택해 왔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무림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나섰으며, 각 성의 치안은 관과 무림인들이 함께 지키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그들은 황실을 존중했으며. 황실 또한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로 무림인들끼리의 분쟁에 대해서 관이 나서지 않도록 하였다.
수많은 세월로 인해 무언의 합의가 된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윤문의 말에 방효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건드려 봐야 좋을 것이 없습니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입니다.”
“하하.”
스승인 방효유의 말에 주윤문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에 방효유가 찔끔했다.
소리 내어 웃는 주윤문.
그의 웃음소리에 실려 있는 강력한 기운에 놀라고 만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에게 실례를 한 것을 깨달은 주윤문.
그가 무심결에 튀어나온 자신의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사과했다.
그에 방효유는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그렇게 잠시.
주윤문의 부름에 다시 방효유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대륙의 주인은 황궁입니다. 하지만 남경의 백성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황궁이 아닌 소림을 찾습니다.”
“…….”
“나아가 옆에 위치한 안휘성은 황궁에서 파견한 성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가라는 인물들이 안휘성의 주인이라 칭하고 다닙니다.”
“…….”
“이것이 맞는 것입니까?”
주윤문의 물음에 방효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윤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
자신 또한 그에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사상은 주윤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위험했다.
“나는 지금부터 준비할 것입니다.”
“…….”
“스승님.”
주윤문의 계속된 말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방효유.
그가 고개를 들어 주윤문을 바라보았다.
그에 주윤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할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광기가 가득한 주윤문의 두 눈.
어린 소년에게서 볼 수 없을 법한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방효유가 물었다.
그에 주윤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림말살대계 武林抹殺大系.”
“…….”
“진정한 황권을 찾기 위해 나는. 번왕인 숙부들과, 자신들이 주인인 양 중원을 마음대로 헤집어 놓는 무림인들. 그들 모두를 죽일 것입니다.”
광기가 가득한 주윤문의 말에 방효유의 두 눈이 떨려 왔다.
위험하다.
정말 위험하지만…….
함께하고 싶었다.
주윤문,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며 나이도 어렸기에 시간은 많았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광기가 가득한 주윤문의 말에 홀렸기 때문일까?
방효유는 자신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이어진 주윤문의 말에 방효유가 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