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제47장 따뜻하다 溫 (2)
“오셨습니까.”
지마궁에 위치한 어머니의 전각.
그곳에 들어선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흑풍단주.”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강인한 사내.
흑풍단의 단주이면서 절정의 고수인 흑풍이었다.
삼 년 전, 라마승들을 놓친 것으로 인연을 맺은 그.
라마승들을 놓치고 대공자인 나와 오대마가의 자제들인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린 죄로 흑풍단주라는 직책을 박탈당할 뻔했으나 나와 아이들의 요구로 정상참작되어 삼 개월간 정직, 그리고 일 년 동안 감봉으로 끝이 났다.
삼 개월간의 정직과 일 년간의 감봉은 한 가족의 가장에게 있어서 가혹한 벌이었지만 흑풍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미안했지만 자신이 좋다니 어쩌겠는가.
그의 충심을 받아 줘야지.
그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의 인사에 흑풍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찌 단주께서 직접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지마궁에 위치한 중요한 다섯 개의 전각 중 한 곳.
흑풍단은 다섯 개의 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개의 대대에 일백 명이 속해 있다.
그리고 사대대와 오대대는 훈련생들이며 그들은 지마궁에 위치한 전각에서 번을 선다.
그들을 총괄하기 위해 나서는 인물이라 해 봤자 일대주나 이대주 정도.
단주인 흑풍이 직접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그런 나의 물음에 흑풍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흑풍단에게 임무가 없을 때는 저는 물론이고 부단주와 다른 대대들도 번을 섭니다.”
“굳이 말입니까?”
절정급 고수인 단주와 부단주.
고급 인력인 그들이 지마궁에 번을 선다고?
놀란 음성으로 묻는 나를 보며 흑풍이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원해서는 하는 일이지요.”
“집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
“흑풍……?”
나의 물음에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진 흑풍.
그런 흑풍의 모습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에 흑풍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가족들은 멀리에 있습니다. 오대마가 중 음마유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지요.”
“……?”
음마유가 陰魔柳家.
오장로인 혈화가 가주로 있는 가문이며 모든 주요 직책을 여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집안이다.
그들이 다스리고 있는 지역인 유려현 流麗峴.
그곳은 천마신교의 본전에서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가야 하는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 살고 있다는 흑풍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풍은 절정의 고수이다.
천마신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수이며,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는 이가 바로 흑풍이다.
헌데 그런 그의 가족이 왜 유려현에 사는 것일까?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흑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딸이, 음마유가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서…… 아이 엄마가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그곳에 가 있는 것이지요.”
흑풍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풍.
그는 소위 말하는 기러기 가장이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돈을 벌고, 혼자 살며 번 돈은 가족들에게 전부 보내는 불쌍한 존재.
그런 흑풍을 보며 나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군사에게 건의하여 휴가라도 길게 주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딸이 보고 싶을까.
안쓰러운 흑풍을 보며 내가 말하자 흑풍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는 천마신교에 충성을 바치는 지금이 좋습니다. 집에 가면 물론 좋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몸이 근질거리고 심심해서 별로입니다.”
소리 내 웃으며 말하는 흑풍을 보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정말로, 군사인 마뇌에게 건의를 해야겠다.
흑풍만이 아닌, 돌아가면서 모든 천마신교의 무인들에게 장기 휴가를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아! 어서 들어가십시오. 제가 시간을 너무 뺏었나 봅니다.”
미소를 짓는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은 흑풍.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같이 식사라도 함께 합시다.”
“영광입니다.”
나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흑풍.
그런 흑풍을 보며 마주 미소를 지어 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처소의 앞에 멈추어 섰다.
“안에 모두 계시는가?”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방문 앞.
그곳을 지키고 있던 흑풍단의 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에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왔다고 고하게.”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무사가 정중히 대답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부인. 대공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라 하세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
어머니의 허락에 무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벌컥.
방문이 열리고.
이야기가 즐거운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한창 즐거운 이야기 중 제가 방해를 하였나 봅니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어서 앉거라.”
나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옆에 위치한 의자를 가리켰다.
그에 나는 백리진과 서은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다음 어머니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차 마시겠습니까?”
“응, 차가운 걸로.”
“냉차 冷茶 말씀이시군요.”
나의 말에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따뜻한 찻물을 나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
그런 유화의 행동에 백리진과 서은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내가 냉차를 달라고 하였는데 유화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나를 향해 낮게 말한 유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의 허락이 있자 유화는 손을 뻗었고 이내 나의 찻잔을 손으로 잡았다.
그런 다음.
우웅!
사삭!
유화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렁이더니 이내, 뜨거운 찻물의 표면에서 얇은 얼음이 생겨났다.
그런 찻잔을 내려다본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성취가 좋구나.”
나의 전속 시녀인 유화는 아버지의 수신호위인 일살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일살의 무공이 아닌, 천마서고 天魔書庫에 위치한 상급 무공 중 한 개인 한빙공 寒氷功을 말이다.
다행히 제법 무재가 있던 그녀는 뛰어난 성취를 보여 주었고, 때때로 그녀의 경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냉차를 부탁하고는 했다.
만족스러운 유화의 경지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화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 언니 웃었다!”
그런 유화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서은설.
그녀가 손가락으로 유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에 유화가 고개를 들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은설을 바라보았다.
“안 웃었습니다.”
“웃었는데…….”
“안 웃었습니다.”
“네…….”
무감정한 유화의 부정에 서은설은 고개를 숙였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웃었다.
확실하다.
그러니 저렇게 정색하며 부정하지.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화의 성격을 파악한 나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아무튼, 나의 차를 냉차로 만들어 준 유화가 뒤로 물러났고, 나는 냉차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흐음…….”
너무 차갑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차가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나는 찻잔을 내렸다.
그러고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은설을 바라보았다.
“은설.”
“응?”
나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은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랑 놀러 나갈까?”
“놀러……?”
나의 물음에 서은설이 두 눈을 일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새하얀 얼굴이 붉어진 서은설이 나를 바라보았다.
“놀러? 나랑?”
두 눈에 불을 뿜으며 묻는 서은설을 보며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백리진을 바라보았다.
“은설과 놀러 나가도 되나요?”
“어디를 가시려고 합니까?”
나의 물음에 백리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친구들이 비마각에 있습니다. 은설을 소개시켜 줄 겸, 함께 놀고 오겠습니다.”
“어머, 은설에게 좋은 기회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네.”
백리진의 대답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나의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나는 서은설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은설이.
기분이 많이 좋은가 보다.
* * *
“누나도 왔네.”
모든 정보를 총괄하고, 총군사인 마뇌의 지시하에 명령을 이루는 행정구역 비마각 備魔閣.
그곳의 입구에 도착한 구양적은 익숙한 소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적아.”
“푸하하! 누나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나를 아네? 그렇게 내가 좋아?”
“적이는 좋은 동생이지.”
“푸헤헤!”
두 눈을 감고 있는 귀여운 소녀.
올해 열세 살이 된 야율령의 말에 구양적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크게 웃었다.
그런 구양적의 반응에 야율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야율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느냐?”
“오라버니, 저 이제 열셋이랍니다.”
야율민의 물음에 야율령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야율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안하구나.”
야율령의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착하고 다정한 오라버니가 되어 버리는 야율민.
그의 사과에 야율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단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그래.”
동갑인 야율령과 단진.
야율령의 인사에 단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에 야율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음, 령이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할 수는 없나?”
“흥.”
야율민의 말에 단진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 야율민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을 만류하는 야율령의 손길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느냐?”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야율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진이가 인사를 받아 준 게 어디예요.”
“령아.”
야율령의 말에 야율민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굳혔다.
그에 야율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오라버니가 정색을 하는 것일까?
혹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의문이 가득한 야율령을 바라본 야율민.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이름은 단진이다. 오라버니를 제외한 모든 남자는 다 쓰레기야. 그러니 친근하게 이름도 부르지 말거라. 인사도 안 하는 것이 좋다.”
진지한 야율민의 말에 야율령은 입가를 가리며 웃었고, 단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야율민을 바라보았다.
저 멍청한 누이 바보.
야율령이 착해서 그렇지, 만약 다른 여동생들이었다면 야율민의 행동에 학을 떼며 그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런 야율민의 동생인 야율령을 단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여동생에게서 시선 떼라.”
“하아…….”
야율민.
저 미친 자식은 정말 오대마가 중 한 곳인 야율창가의 후계자가 맞을까?
새삼 자신의 세대가 어른이 되어 중책을 맡을 때가 너무나도 걱정되는 단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