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제16장 야율창가 耶律槍家
“와아! 정말요? 대공자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야율창가의 연무장.
오늘도 어김없이 수련을 하는 야율민을 위해 수건을 들고 나온 야율령은 야율민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에 야율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 그렇다.”
“와아!”
야율민의 확답에 입을 가리며 환호하는 야율령.
그런 동생의 모습에 야율민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아이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집안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아이.
만약 평범한 부유한 집안이었다면 그래도 사랑을 받아 왔겠지만, 이곳은 마인들의 중심인 천마신교였으며 가문은 천마신교를 지탱하고 있는 오대마가 중 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인은 물론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
무인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이 무섭고 슬픈 곳에서 아이의 편이 되어야 할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고, 아버지는 이런 아이를 혐오했다.
아니, 정확히는 없는 아이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일하게 야율민만이 이 아이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크크, 왜 그러느냐?”
너무나도 안쓰러운 자신의 동생, 야율령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야율민은 갑작스러운 야율령의 부름에 다시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소주천을 이룬다면, 더 이상 그런 연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
그리고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야율령의 말에 야율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신의 여동생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는 것인가?
생각지 못한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야율민이었지만 심호흡을 가볍게 한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크크, 무슨 소리냐. 연기라니?”
이전보다 더 음울한 웃음소리를 내며 야율민이 묻자 야율령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자신의 오라비인 야율민의 손을 잡았다.
“부족한 동생 때문에, 부족한 척 연기를 하고 있잖아요.”
“!!”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저는 오라버니가 당당하게 살았으면 해요. 그게 제가 바라는 것이랍니다.”
“…….”
생각지 못한 야율령의 말에 야율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올해 열세 살인 자신과 열 살인 야율령.
야율민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일 년 전이었다.
우연히 사춘기병이라는 병을 알게 된 것이 말이다.
처음에는 별난 병도 다 있구나 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지만 그 병의 증상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첫 번째는 자신과 같은 나이 대에서 발병을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고쳐진다는 것이다.
물론 조금의 부끄러움은 감수해야겠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 년 전 그 병을 알게 된 야율민은 그 병에 걸린 척을 하였다.
아주 심각한 중증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가문의 시선을 돌렸던 야율민이다.
헌데 이 아이가 알고 있었단다.
게다가 스스로를 위해서 그만두어 달란다.
집안에서 불편한 취급을 받고 있음에도 나를 위해주는 자신의 여동생.
역시, 이 아이는 미워할 수 없는 아이다.
웃으며 자신을 위해달라는 야율령을 보며 야율민은 새삼 다시 다짐했다.
평생 이 아이를 지켜 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야율민은 오늘도 연기를 했다.
“크크, 무슨 소리냐? 계속 헛소리를 하면 야룡이와 함께 혼내 주겠다.”
자신이 더 강해지고, 당당해져서 이 아이를 지켜 주기 위해서 말이다.
* * *
“야율민…… 앞이 보이지 않는 여동생이 있구나.”
유화가 수소문하고 정리해서 올린 서류를 읽은 나는 서류를 탁자 위에 놓으면서 두 눈을 감았다.
아직 자세히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야율민은 자신의 여동생을 아끼고 있었다.
집안에서 없는 취급을 받는 불쌍한 아이.
그런 불쌍한 아이를 돌보아 주며 괴롭히는 이들에게서 방패막이 되어 주고, 또 매일 수련을 끝내고 그 아이와 함께 추억을 만든다는 야율민.
진짜 생각지도 못했다.
야율민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말이다.
“유화.”
“네.”
가만히 크크거리는 야율민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두 눈을 뜨며 유화를 불렀다.
그런 나의 부름에 유화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고, 나는 고개를 돌린 다음 유화를 바라보았다.
“네가 보았을 때 야율민은 어떤 아이였어?”
야율민과 동갑인 유화다.
그러다 보니 유화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를 하며 내가 묻자 유화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기다렸고, 잠시 후 유화의 입이 열렸다.
“이상합니다.”
역시, 이상해 보이는 것인가.
유화의 대답에 나는 입맛을 살짝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시 서류를 집어 들어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 더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때,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나의 귀로 유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이상한 애잖아.”
“그게 아니라…… 한 번씩 정상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흐음…….”
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유화가 대답하자 나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의자를 유화가 있는 방향으로 돌리고 내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하자 유화가 입을 열었다.
“저는, 공자님들이 수련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렇지.”
우리들에게 수건과 물을 건네기 위해 연무장 한곳에 시립해 있는 유화.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의 긍정에 유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보니 보였습니다, 수련을 하는 도중 한 번씩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야율 공자가.”
“정확히 어떤 정상적인 모습이었지?”
유화의 말에 얼굴을 굳힌 내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에 유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추측이지만…… 마치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상한 모습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련을 할 때는 그 누구보다 진지했으며 이상한 행동과 말투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유화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수련 중에도 계속해서 파하핫거리는 구양적과 달리 야율민은 크크 거리지도 않았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온 힘을 다해 수련에 임했다.
어서 빨리 강해지고 싶은 무인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야율민은 사춘기병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자신이 알기로 사춘기병에 걸린다면 평소 어떠한 모습에도 보인다.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듯한 괴상한 모습이 말이다.
하지만 야율민은 달랐다.
적어도 수련하는 도중에는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유화의 말대로 사춘기병을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 왜?”
허면 왜?
왜 그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야율민은 오대마가인 야율창가의 후계자이다.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연기를 한단 말인가?
그때, 나의 머릿속으로 퍼뜩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야율민의 여동생, 야율령이 집안의 수치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런 여동생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자신이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모든 이목은 야율민에게 집중될 것이고 세가의 사람들은 야율민을 욕하며,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그렇게 야율민이 얻는 것은?
“시간.”
시간을 얻는 것이다.
야율민이 강해져서 당당한 무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야율령은 더 이상 집안의 수치가 아닐 것이다.
당당한 무인인 야율민이 그녀를 보호할 테니 말이다.
이거…… 너무 이야기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야율민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놈일지도 몰랐다.
벌떡.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교주님을 뵈어야겠다.”
“왜 그러십니까?”
나의 입에서 천마를 만나겠다는 나온 말이 의외였을까?
유화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야율창가에 가 보려고.”
“……그냥 가셔도 됩니다.”
“……?”
나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문 유화.
그녀가 곧이어 나를 향해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마신교의 본전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천마궁.
그곳에 기거하고 있는 나였기에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에는 교주의 허락이 필요하다.
헌데 그냥 가도 된다니?
“마님께서 천마궁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받으시면서 공자님의 외출 또한 함께 허가받았습니다.”
“뭐?”
그 인간이 왜?
“마님을 만나러 갈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교주님이 내리신 명이랍니다.”
“…….”
어디 아픈 건가?
아니면 벌써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악마 같은 천마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그런 명령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 따뜻한 아버지가 내리는 것 아닌가?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유화의 설명에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나갈 채비를 해.”
“네.”
일단 야율창가에 먼저 가 봐야겠다.
그리고 알아야겠다.
야율민의 진심을.
* * *
“좋군.”
천마신교의 본전, 지마궁 地魔宮 에 위치한 천소화의 거처.
수많은 방 중 유일하게 천소화가 침실로 사용하는 방에 들어와 차를 한 모금 마신 천마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찌 이곳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직 깊은 밤도 아닌 애매한 시각.
처음으로 이 시간에 찾아온 자신의 낭군, 천마를 보며 천소화가 조금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천마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소화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부인과 차를 마시러 왔지.”
웃음으로 인해 살짝 접히는 천마의 눈꼬리.
너무나도 매력적인 눈웃음이었지만 천소화의 눈에는 아니었다.
장난스레 대답하는 천마를 보며 천소화는 주전자를 들어 비어 버린 천마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르.
가만히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는 천소화를 바라보는 천마.
천소화는 천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따랐다.
그렇게 찻잔을 채운 천소화가 다시 탁자 위에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드십시오.”
“벌써 열 잔째인데.”
천소화의 말에 천마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자신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하는 천마의 모습에 천소화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하나?”
천소화의 물음에 인상을 살짝 찌푸린 천마.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천소화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욕정을 풀러 오신 것입니까?”
“뭐라?”
천소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천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짜증 섞인 천마의 되물음에 체념한 표정을 지은 천소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잇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서 끝내십시오.”
“…….”
그런 천소화의 행동에 천마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이유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나?”
“이때까지 저를 두 번 찾아오셨고, 두 번 다 이 이유 아니었습니까?”
싸늘한 천마의 물음에 천소화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소화의 도발이었다.
그에 천마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소화의 옆에 앉았다.
“내가 우습나?”
“어느 누가 천마가 우습겠습니까?”
천마의 물음에 천소화가 짧게 대답했다.
그에 천마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천소화의 턱을 잡았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