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_대도깨비 아람(1)
유신에게 최상급 마나석을 받은 후, 도깨비 수련방으로 갔다.
이곳은 370년 전 우연히 발견했던 곳으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곳과 다르게 천천히 흐르는 곳이었다.
자신이 가이아와 도깨비들을 배신한 배덕자 도깨비가 되었을 때 이곳을 발견했고, 파괴 욕구에 미친 도깨비가 아닌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수련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대도깨비가 되어야 할텐데…”
유신에게 최상급 도깨비가 되어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마음은 달랐다.
대도깨비일 때는 그렇게 안하무인이었는데, 도깨비의 지휘가 떨어진 후,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최대한 빨리 최상급 마나석을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고 다시 대도깨비가 돼야 했다.
이제 더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우선 이거부터.”
최상급 마나석을 흡수하기 전에 가지고 있는 상급 마나석 중 하나를 꺼냈다.
일에도 순서가 있고, 지금의 몸으로 최상급 마나석을 흡수해봤자, 대부분 소화하지 못하고, 날려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상급 마나석으로 기초를 다져야 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지난 지 모를 정도로 상급 마나석들을 흡수하고, 소화를 끝냈다.
“흡수되는 게 그렇게 많지가 않아…”
이러면 최상급 마나석을 흡수해도 대도깨비가 되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위이이이잉
이곳은 그 누구도 모르는 공간인데, 차원의 틈이 열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차원의 틈이 다 열렸고 그곳에서 나온 존재를 보자마자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람이 최초의 대도깨비인 가람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아람.”
“알겠습니다.”
가람은 예의 그 평안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람. 너의 죄가 끝난 건 아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어서 최상급 마나석을 먹도록 해라. 내가 널 다시 대도깨비의 지휘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우마.”
***
마신석 백 개를 이용해 활성화된 마기를 단 한 호흡에 들이켰다.
주변에 놓여 있던 마신석들이 빛을 잃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웬만한 마족이었다면 이 정도 양에 만족했겠지만, 자신이 누군인가?
마계의 72악마 중 서열 9위의 악마 파이몬이었다.
“부족하고, 지저분해.”
내 혼잣말에 시리 시온이 흠칫하더니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바로 다음 마신석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잠시 혼자 있겠다.”
“알겠습니다.”
시리 시온이 나간 후 방금 들이켠 마기를 확인했다.
일반적인 순수한 마기가 아니라, 사기가 섞인 마기였다.
“쯧. 이걸 다 걸러내야 하다니.”
순수한 마기는 그것 자체가 힘과 함께 고양감을 준다.
그렇지만, 이렇게 불순물이 섞이면 덩치만 클 뿐이지. 같은 양의 순수한 마기와는 힘의 격차가 컸다.
사기를 걸러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약간의 마기를 사용해야 했고, 부족한 마기를 또 이렇게 사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정제 작업을 하고 보니, 실제로 늘어난 마기는 흡수한 마기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크크크.”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악마로서 영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마기가 부족해서 이렇게 쩔쩔맨 적은 처음이었다.
“파이몬님. 시리 시온입니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시리 시온이 문밖에서 자신을 찾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지금 자신의 기분은 꽤나 나빴기에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만큼 벌을 주면 됐다.
“들어와라.”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다름 아니라,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좋다. 대신에 별거 아닌 일이면, 네년의 신체 중 일부를 내가 가져가지.”
마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반마족인 시리 시온은 온몸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파이몬님이 내보낸 마물들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겨우 그딴 말을 하려고 내 휴식을 방해해?”
시리 시온은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마족을 지휘관으로 보낸 다섯 곳 중 세 곳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어느 부위를 가질까 고민할 때, 뜻밖의 말이었다.
마물은 인간들에게 재앙과 다름이 없는데, 한두 마리도 아니라, 수백 마리의 마물이 사라졌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거 아주 흥미롭군.”
턱을 쓰다듬으며,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게슈타인.”
“파이몬님의 충실한 부하이자, 3군단장 게슈타인이 파이몬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일천의 부하를 데리고, 내 애완동물을 죽인 놈을 생포해 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게슈타인이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시리 시온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시리 시온의 마기를 먹어 보고 싶었는데, 아직 쓸모가 많아서 아쉬웠다.
***
몇만 년간 차원의 통로를 지켜왔다.
가이아의 사신수 중 백호로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마신이 이곳으로 넘어오려 했고, 모든 신수가 힘을 합쳐서 마신을 찢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나는 일천 년간 백각으로 지내면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지. 그동안 내 형제인 너희들은 분신으로 내 구역에서 몰려오는 마족들을 처치했고, 그걸로도 모자란 부분은 도깨비가 채워줬지.”
내 말을 자르고 주작이 날개를 펄럭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백호.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
예전부터 느꼈지만, 역시 하늘을 나는 것들과 자신은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들과 나는 형제이자, 같은 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화를 내려고 모은 자리가 아니었다.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주작이 날개를 활짝 펴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선보였다.
역시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주작이었다.
그때, 맏형도 아니면서 청룡이 맏형처럼 말했다.
“형제의 고통을 나누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영역을 지켜야 하는 우리가 너에게 이 당연한 말을 듣기 위해 모인 건 아니겠지?”
위엄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청룡의 모습에 짜증 났지만, 오늘은 부탁할 일이 있기에 그저 꾹 참을 때였다.
언제나 말없이 가만히 있던 현무가 입을 열었다.
“백호. 용건. 간단히. 졸리다.”
다른 사신과 다르게 현무는 저 거대한 몸을 이용해 통로를 가로막고 잠에 빠진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몰려있는 마족들을 잡아먹고, 다시 누구보다 깊게 잠이 든다.
저 게으름뱅이가 깨어 있는 시간은 짧기에 빠르게 말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지구에 마왕이 강림했다. 그래서 지구에 우리의 분신을 보내는 거다.”
“분신?”
현무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거렸고, 주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청룡보다는 나았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선 화를 냈다.
“인간사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맹약한 것을 잊은 것이냐?”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분신을 보내자고? 잠깐 격을 낮추고 지구에 있는 동안 맹약을 잊은 것이냐?”
“맹약은 잊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현신하는 게 아니라 분신을 보내자고 한 것이다.”
청룡이 자신의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고, 현무는 평소와 같은 졸린 눈이었다.
단지 주작이 한쪽 날개를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지만, 저건 누가 봐도 웃고 있는 거였다.
“백호. 아무리 분신이라고 해도 우리의 분신이다. 그리고, 맹약한 이유를 모르는 것이냐? 우리가 지구에 간섭하면 할수록 가이아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걸 잊어버린 것이냐?”
“그래. 인간들에게 자신의 강함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화려하게 싸우다가 대홍수를 일으켜서 인류를 포함해, 대부분을 죽여버렸던 존재가 누구지? 바로 너 청룡이었다.”
“그건 실수였다.”
“그뿐만 아니다.”
고개를 돌려서 현무를 바라봤다.
“바다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이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가이아께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초고대 문명의 대륙을 가라앉힌 현무는?”
“그건. 실수. 반성.”
“백호. 쌓인 게 많았구나. 그러니까 청룡과 현무는 좀 적당히 했어야지.”
갑자기 끼어든 주작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주작. 너도 할 말이 없다. 심심해서 최대 속도로 날아본다고 해서, 지구의 방어막 중 하나인 오존층의 내구력을 대부분 깎아 먹은 게 누군데?”
“……”
대홍수, 아틀란티스의 침몰, 가시광선을 막아주는 두꺼운 오존층 등. 대충 이들이 저지른 일만 해도 다 열거할 수도 없었다.
“백호. 분신. 한다.”
현무가 졸려서 그런지 대답하고는 자신의 얼굴을 등껍질에 대부분 넣었다.
“좋아. 나도 잘못한 것도 있기는 하지. 그렇지만, 저 도도한 청룡의 얼굴을 무너뜨리게 하고, 현무의 승낙도 이끌어 냈으니. 분신을 준비하지.”
“고맙다. 주작. 청룡,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고심하는 표정을 지은 청룡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맏형으로서 분신을 보내도록 하겠다. 하지만, 백호. 아직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격으로 만든 분신은 너도 알다시피 강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을 컨트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전에 일으켰던 그…….”
청룡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어려운지 두 눈을 꼭 감은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리 분신을 약하게 보낸다고 해도 분신은 세상에 혼란을 줄 수 있다. 그게 해결되지 않는 이상 나는 지금처럼 계속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좋은 말이지. 하지만, 백호. 너도 알고 있다시피, 일루시안에 있는 그들이 지구로 넘어가면, 마왕은 해결될 문제다.”
“그렇게 되면 많은 인간이 죽게 된다.”
“…그건 감수해야지.”
말이 통하지 않는 불통 청룡을 내버려 두고 남은 사신수끼리 분신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할 때였다.
“청룡이 하지 않겠다면, 못하는 거지.”
“청룡. 안됨. 허락.”
분신을 만들겠다는 주작과 현무까지 반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형제들은 지구에 마왕이 강림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힘을 쓰는 건 재앙이지만, 마왕 또한 재앙이다.
그리고, 우리야 가끔 과격하지만, 인류를 몰살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왕은 달랐다.
“시간 낭비였군. 너희들이 보내지 않겠다면, 나 홀로 보내겠다.”
“아니. 백호 너도 마찬가지다. 지금 빨리 돌아가서 네 자리를 지켜라.”
“청룡.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 오랜만에 한 판 붙어보자는 거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일초즉발의 상황까지 일어났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가이아도 이 상황을 보고 있겠지만, 우리의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때, 이 공간에 불청객이 난입했다.
“이런이런 분위기가 좋지 못합니다.”
“배덕자 대도깨비 아람?”
“주작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람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우리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배덕자라는 타이틀이 사라진 대도깨비 아람입니다.”
“무슨 일이지?”
주작은 아람이 허튼짓을 하면 금방이라도 그를 태워버릴 듯 불꽃을 끌어올렸다.
“제가 사신수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의 고민?”
“네. 지구에 분신을 보내서 마왕을 퇴치하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대도깨비여도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건데, 불쾌하군.”
날개에 불꽃이 피어오른 주작을 서둘러 말렸다.
“주작.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백호. 도깨비와 거래하겠다는 거냐?”
“저 녀석은 일반 대도깨비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유신이라는 인간과 주종 관계을 맺은 도깨비다.”
“주종 계약? 이제 도깨비가 인간을 노예로 부리기까지 해?”
“그 반대다.”
내 말에 주작과 청룡은 놀라고, 대화가 길어져서 잠들려고 하던 현무가 두 눈을 반쯤이나 떴다.
“아람. 그래. 네가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지?”
“간단합니다. 제게 여러분의 분신을 맡기시면 되고, 저는 내기로 여러분의 분신을 지구에 잠깐 소환하면 되는 거죠.”
“넌 한때 배덕자였다. 그런데 뭘 믿고?”
“이제 배덕자가 아니라는 건 다른 누구보다 백호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그리고 이 차원의 수호자인 사신수님께서 설마 저 같은 도깨비의 술수에 놀아나시겠어요?”
사신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고, 이곳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청룡에게 향한 말이기도 했다.
대도깨비 아람의 작전은 먹혔고, 청룡이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일단 계획을 한 번 들어볼까? 대신에 우리에게 장난질을 하는 순간! 너는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 것이다.”
“제가 마스터를 잘 만난 이후로 장난질을 많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절 소멸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