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_정대원으로 가는 길(2)
처음으로 일루시안으로 통하는 차원의 문에 들어갔는데, 도착한 곳은 어딘가 익숙한 공간이었다.
“응? 여긴?”
“아이야. 잘 지냈느냐?”
“가이아님?”
분명 일루시안으로 가는 차원문이었는데, 가이아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게 자못 이상했다.
“제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됐나요? 설마 죽은 건가요?”
내 말에 가이아가 예의 그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차원의 문을 지나가게 되면 나를 한 번은 만나야 한단다. 내 허락이 없으면 지나가지 못하거든.”
“아…그렇구나.”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구의 신이 가이아가 맞다고 하면 일단 믿기로 생각했다.
그때, 가이아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많이 아프겠구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 신이어서 그런지, 가이아는 쉽게 내 상태를 알아봤다.
아무리 마리 선배가 치료를 해줬어도 신의 힘을 빌려오고 난 후에 후유증은 쉽게 낫지 않았다.
물론 가이아의 말 그대로 아프기도 무진장 아팠지만, 기운을 움직이는 통로가 망가져 포스와 원소력을 쓰지 못하는 게 더욱 힘들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가 조금만 더 힘을 내주렴.”
이해 못 할 말에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구의 마족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운명을 거스르는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거뿐이라서 미안하다.”
말을 마친 가이아가 내 이마를 향해 곧게 편 검지를 닿게 했고, 검지가 이마를 파고들었다.
이대로 죽나라는 생각이 들 때, 이마를 통해서 신성한 기운이 들어왔다.
마리 선배나 스텔라 남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몸을 휘돌았고, 몸에서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우둑 우두둑
벌써 세 번이나 겪었던 환골탈태였다.
단지 다른 점이라고는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환골탈태가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달랐다.
고통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고, 시원한 감각만 들었다.
“이제 고통은 없을 거다.”
가이아의 손이 떨어지고, 몸 근처에 황금색 기운이 떠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색 기운은 내 몸으로 흡수됐고, 헬리오스의 기운에 타버린 혈맥과 기맥을 회복시켰다.
“이…이게…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히 다시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돌아오니 너무나 좋았다.
고통스럽지만, 헬리오스의 기운을 난발하고, 이곳으로 오면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가이아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이야.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단다. 이게 다 너의 노력 덕에 가능한 것이란다.”
“아닙니다. 사실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치료와 동시에 더욱 강하게 해주셨잖아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이아를 보니, 무언가 가슴에 걸렸고, 가이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없구나. 그러니 헬리오스의 기운은 이제 사용하면 안 된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본디 헬리오스의 씨앗을 너에게 심은 건 마왕이 강림하게 되면 상대하기 위해 넣어둔 거란다. 그런데, 네가 운명을 거스르는 아이라는 걸 내가 계산에 넣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계산에 넣었는데, 계획과는 다르게 흘렀지.”
“제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말씀해주시겠어요?”
“한 번 더 헬리오스의 기운을 사용하면 죽게 될 거란다.”
“제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내 말에 가이아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고, 난 그런 가이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구에 마왕이 강림하게 되는군요.”
“……”
“대답해주세요.”
“…그렇단다. 그건 운명이 정한 수순이지. 그래도 네가 있어서 한 번의 강림을 늦출 수 있었단다.”
더는 가이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왕 강림. 지구를 피폐하게 만들고, 인간을 죽이는 그들이 다시 나타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마지막 보류라고 할 수 있는 내가 헬리오스의 기운을 다시 쓰면 죽는다고까지 했다.
그렇다는 건…
“그래도 제가 한 번 더 헬리오스의 기운을 쓸 수 있다는 거네요?”
나는 말이 없는 가이아를 빤히 바라봤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지만, 확답을 듣고 싶었다.
“대답해주세요.”
“후우~ 아이야…”
신도 한숨을 쉰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네 말대로 목숨을 건다면, 헬리오스의 기운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단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널 치유해주지 못한단다. 그렇다고 방금처럼 바디체인지를 해줄 수 없고 말이다. 너무 섭하다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가이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서 내가 뒷말을 이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 이기 때문이죠?”
고개를 끄덕인 가이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단다. 운명을 거스른 순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극히 제한된단다. 내가 널 바디체인지로 치료할 수 있었던 건 네게 헬리오스의 씨앗을 심으면서 한 번은 가능하게 해뒀기 때문이란다.”
쉽게 생각해서 한 번 더 능력을 발현하면, 다시는 치료할 방도가 없다는 거였다.
내가 왜 선택된 것인지에 대해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닙니다. 이것만 해도 어딘데요.”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그래도, 가이아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한 가지는 알게 됐다.
약간이기는 하지만, 가이아가 아직은 내게 무언가를 간섭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밑져야 본전이기에 일단 질러봤다.
“가이아님 혹시 말인데요.”
“응? 왜 그러니 아이야?”
“혹시 그…가능하시면, 마족탐지를 다시 주실 수 있을까요?”
전에도 내게 운명을 거스르는 자라고 하면서 마족탐지 능력을 줬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상과 다르게 가이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나보다 하위 신이라지만, 내가 준 ‘마족탐지’는 헬리오스의 의해 훼손되어서 다시는 줄 수 없단다.”
“그렇구나. 그럼 마족을 구별하는 다른 능력은 없나요?”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뭐 괜찮습니다. 약간 기대했지만,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지만, 못한다고 하니 아깝기는 했다.
“지구의 신으로서 많은 걸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백호가 너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단다.”
“백호요? 아! 백각님? 잘 지내시죠?”
고개를 끄덕이는 가이아를 보고 그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단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 하유신. 네 앞길에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가이아와의 대화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위에서 살기가 끓어 넘쳤다.
“누구냐?”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일단의 사람들이 내게 활과 검을 겨누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연예인 뺨을 그냥 후려칠 것 같이 잘생겼고, 예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귀가…뾰족했다.
“엘프?”
“넌 누군데 지구에서 일루시안으로 이동한 것이냐?”
일루시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소설 속에서 이야기되던 엘프가 눈앞에 있자 신기했다.
“인간! 엘리를 놔줘라.”
“네? 엘리요?”
무슨 소리인가 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내 옆에 여자 엘프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이분이 엘리라는 분인가요?”
엘프들이 말하는 엘리에게 손만 뻗었을 뿐이었는데, 엘프들이 화살을 발사했다.
파팍
서둘러 손을 들어서 화살을 쳐냈지만, 손등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 정체를 밝혀라.”
“네. 저는…”
뭐라고 소개할까 잠시 고민할 때였다.
“이때다. 쏴라.”
빈틈이라고 느꼈는지 엘프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렇게 쏘면 쓰러져 있는 엘리라는 엘프가 위험해 보였다.
호신강기를 일으켜서 화살들을 막았다. 그러자, 몇 명의 엘프가 검을 들고 내게 쏘아졌다.
손에 오러를 일으켜서 뿌리자, 엘프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런 다음, 바닥에 쓰러진 엘리라는 엘프의 상태를 확인했다.
‘휴~ 다행이네. 그냥 기절한 것뿐이야.’
왜? 엘리라는 엘프가 여기 쓰러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의 적개심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는…”
피잉
주르륵
화살 한 대가 호신강기를 뚫고 내 볼에 상처를 냈다.
“어? 피가…”
“지금 정기적으로 물품이 들어오는 날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나서 엘리를 공격하다니. 가만둘 수 없다.”
내가 바닥에 쓰러진 엘리라는 엘프를 공격했다고?
“오해입니다.”
“오해는 무슨!”
호신강기를 꿰뚫은 화살을 쏜 엘프가 내 심장을 향해 화살을 겨눴다.
일단 뒤는 나중에 생각하고, 엘리라는 엘프를 들어서 목에 오러를 겨누며 발악하듯 외쳤다.
“더 다가오면, 이자의 목숨은 없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악당이 되었다.
제발 아는 사람 중에서 지금의 내 모습을 안 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유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마리 선배?”
순간 얼굴이 붉게 변하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지금 그러니까 어…오해입니다.”
“오해? 여자 엘프의 목에 오러를 겨누고 다른 엘프들과 대치하고 있는데?”
“그게 그러니까…”
설명하기 전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엘프들이 마리 선배가 나타난 다음부터 활을 내렸다.
이제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게 그러니까 가이아님을 만나서…….”
설명을 이어가려고 할 때, 내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딱히, 이상한 느낌이 든 게 아니라, 정전기로 인한 현상이었고, 그때 건물 안에 뇌전이 치고 무혁 대장이 나타났다.
“대장!”
“오셨어요?”
무혁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를 바라봤다.
“지금 엘리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화들짝 놀란 나는 아직도 엘리라는 엘프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서둘러 내려놨다.
“아니 그러니까 제 설명을 좀 들어보세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나는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설명을 이어갔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무혁 대장과 마리 선배는 내 이야기를 믿어줬다.
거기다가 엘프들까지 쉽게 믿자, 무언가 허탈한 생각도 들었다.
“근데 제 말을 너무 쉽게 믿네요?”
“그럴 수밖에 정식대원은 아니지만, 너도 13기동 타격대의 대원이니.”
이걸 좋아해야 할까?
방금까지 자신들의 동료를 인질로 잡았는데, 엘프들이 ‘13기동 타격대’라면 그럴 수 있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대체 선배들은 이곳에서 어떤 행각을 벌이고 있기에 이들이 쉽게 수긍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무혁 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유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서며 외쳤다.
“네 대장.”
“일단 네 상태를 확인해도 될까?”
“네. 영광입니다.”
무혁 대장은 내 손목을 잡더니, 기운을 집어넣었다.
그 기운이 온몸을 한 바퀴 휘돌더니, 이내 다시 대장에게 돌아갔다.
“몸 상태가 좋아졌군. 기맥도 더 튼튼해지고.”
“헤헤~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시는 그 기운을 사용하면 안 될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무혁 대장이 말을 이었다.
“가이아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너에게 맞지도 않는 힘을 준지는 모르겠지만, 가이아의 말대로 한 번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다음에는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죽을 거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았잖아요.”
“과연 네 힘으로 살았을까?”
“네?”
무혁 대장이 고개를 돌려서 마리 선배를 바라봤다.
“그 자리에 마리가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야. 아무리 전보다 더욱 튼튼한 육체를 가졌다고 하지만, 신의 힘은 그리 만만하지 않거든.”
“그렇다면, 대장은 어떻게 신의 힘을 견디시나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번개의 힘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쓴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거기다가 신의 힘이라고 말할 때, 대장의 표정이 많이 처량했거든요.”
실없는 미소를 지은 무혁대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비밀이 있기에 저렇게 머뭇거리는 거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혁 대장이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유신아.”
“네. 대장.”
“강한 힘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만이 가능했다.
“대장.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강한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의지는 알겠다. 대신에 이거 하나는 약속해라. 절대 그 힘을 다시 쓰지 않겠다고.”
“…못한다면요?”
내 말에 무혁 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서 맹세한다면, 난 중단전에 있는 그 기운을 없애줄 수 있다. 거기다가 널 13기동 타격대의 정식 대원으로 올려주마.”
위험할 수도 있는 기운을 없애주고, 그렇게 염원하던 정식 대원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단숨에 수락했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조금만 나중으로 미뤄야겠습니다.”
“미뤄?”
“네. 지구에 마왕이 강림한다고 했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버릴 수 없습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대장은 이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각오했습니다.”
“이미 한 번 죽을 뻔도 했고.”
“그래도 살았잖아요. 이렇게 멀쩡하게요.”
“대체 왜? 우리 13기동 타격대의 대원들은 고집쟁이만 있는 거지?”
“어? 그러면 저 이제 정식 대원인가요?”
“아니. 대장인 내 말을 안 듣는데, 넌 아직도 임시다.”
목숨도 아깝지만, 13기동 타격대의 정식대원이 되지 못한 게 참 아까웠다.
“하유신.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약속해주마. 이 전쟁이 모두 끝나고 지구로 돌아갔을 때, 네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다면 널 정식대원으로 인정해주마.”
정식대원이 된다는 게 남들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내게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일단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염원을 발로 뻥 차버렸지만, 미련은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꼭 살아남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