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_초월자(6)
미르가 날 삼키고 눈을 뜬 곳은 은은하게 황금빛을 뿜어내는 곳이었다.
“미르 뱃속인가?”
실없는 말을 내뱉은 후, 그 자리에 대자로 누웠다.
마족이 될 바에 스스로 죽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됐는데, 짧은 인생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엄마, 아빠한테 특히 미안하네.”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떠난 게 죄송스러웠다.
마족들을 제대로 막지 못해서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마족은 모두가 다 함께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은 사람들이 잘 처리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우시겠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중에서 울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보고 싶다…”
여러 지인이 머릿속을 지나쳤고, 마지막으로 제이미 레스넌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이들보다 가족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은은하게 황금빛을 뿜어내는 이곳이 습한지 눈에 습기가 찼다.
그렇게 방울진 습기가 관자놀이를 거쳐서 떨어졌다.
“최소한 가족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마족 숭배자 놈들을 다 없앴어야 하는 건데…”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지.”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타오르는 머리카락을 소유한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하유신. 자네가 울기도 하는군.”
소매로 흘러내렸던 눈물을 닦은 다음 앞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누구시죠?”
“내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헬리오스라네. 사람들이 태양신이라고 불렀지.”
“태양신 헬리오스요?”
“그렇다네.”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폴론 전의 태양신이 헬리오스였다는 걸 말이다.
“헬리오스님도 미르한테 먹혔어요?”
태양신 헬리오스는 내 말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네. 자네가 이름 지은 미르는 내 분신이네.”
“분신이요?”
“그렇다네. 가이아께서 내 분신을 받아 가서 자네에게 심었지.”
예전에 가이아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때 내게 준 기술은 ‘마족탐지’였다.
그리고 미르는 수련 도중 생겨났었다.
“간단히 설명해 주겠네.”
“아…네…”
아직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헬리오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자네에게 심은 것은 내 분신의 씨앗이었지. 그걸 개화하고 못 하는 건 자네에게 달렸는데, 자네는 훌륭하게 내 분신을 개화했고, 분신에게 미르라는 이름까지 만들어줬더군. 한국말로 용이라는 뜻이라서 나쁘지는 않았네.”
“가…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제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네. 자네가 미르를 개화했다는 게 중요하지.”
미르가 헬리오스의 분신이라… 그런데, 왜 고위 마족에게는 제대로 힘도 쓰지 못했을까?
사소한 궁금증이 몰려왔지만, 애써 표현하지는 않았다.
“미르에게 먹힌 자네는 이제 죽을 거네.”
“죽어요? 어? 헬리오스님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절 살려주기 위해서 아닌가요?”
날 살려주지도 않고 겨우 쓸데없는 의문만 풀어주려고 헬리오스가 여기에 왔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당연하지. 운명을 바꾸는 자. 하유신. 자네를 살리기 위해서 왔지. 아니 살리는 것 이상으로 힘을 주기 위해서 왔다네.”
“그렇다면…!”
간절한 눈빛으로 헬리오스를 바라봤다.
살려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인데, 힘까지 준다니 당장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네.”
“문제요?”
“우선 자네와 나는 상성이 맞지 않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네는 그 어떤 것과도 상성이 맞지 않지.”
“무슨 말씀이신가요?”
헬리오스는 입을 달싹이며, 말을 머뭇거렸다.
“대충 각오하고 있기는 합니다. 말씀해주세요.”
길게 한숨을 내뱉은 헬리오스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네. 내가 자네에게 힘을 주면, 그 어떤 존재도 자네를 해하지 못할 거네. 그렇지만, 신체는 점점 망가질 거야. 나는 태양신 헬리오스네. 내 불꽃은 저기 밖에 있는 불의 용사 리암도 버티지 못하지.”
“…그래도 확실히 마족을 죽일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네. 물론, 수명도 짧아지고, 몸도 많이 망가질 거야.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고”
강한 힘에는 강한 대가가 따른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없는 무능력자 ‘노오력가’가 이 자리에 올라선 것도 대단했다.
거기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냥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그게 끝이 아니네.”
“네?”
나도 모르게 헬리오스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여러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살아서 부모님을 만나고, 마족들을 쳐 죽이기만 하면 됐다.
“또 뭐가 필요하나요?”
“내 힘을 열 대가가 필요하다네.”
“그 대가는 뭔가요?”
“바로 자네의 능력 중 하나이네.”
“제 능력이요?”
“자네의 능력 중 하나를 대가로 바쳐서 내 힘을 사용하는 거네.”
[노오력가], [포스], [마족탐지] 겨우 이 세 가지 능력만 있는데, 그걸 빼앗아 간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제 능력을 하나 사용해서 헬리오스 님의 힘을 사용할 열쇠가 되고, 사용하는 중에 계속 수명이 줄어든다는 거네요?”
“그렇다네.”
이미 생각 정리를 끝냈기에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능력은 제가 선택할 수 있나요?”
“가능하네.”
“그렇다면, [노오력가]를 사용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된다네.”
“네?”
“그건 자네의 원천이네. 그걸 쓴다는 것은 죽음과 동일하다고 보면 되네.”
참 까다로웠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신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면, 언젠가 꼭 따지고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족탐지]로 하겠습니다.”
“알겠네. 자네에게 언제나 무훈이 따르기를 바라네. 그리고 가이아를 포함해 모든 신이 자네를 응원하고 있네. 마지막으로 달의 여신 셀레나의 분신인 어둠의 정령 루나를 부탁하네.”
말과 동시에 잔잔한 황금빛을 내는 이 공간이 내게 몰아치듯 들어왔다.
그리고, 온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이 몰려왔다.
“크아아아아악!!!”
***
눈을 뜨니 방금까지 느껴지던 고통은 사라졌고, 루나가 내 입에 구슬을 넣기 직전이었다.
그저 몸에 힘을 주는 것으로 뱀을 끊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마족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한 구슬을 집어 들어서는 가루로 만들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 다 알면서 왜 그래?”
앞에 있는 어둠의 정령 루나는 달의 여신 셀레나의 분신이었다.
“날 마족으로 만들려고 했던 벌을 받아볼까?”
이제 제대로 힘을 쓸 차례였다.
온몸으로 태양의 황금빛을 뿜어내며 루나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는 내 수명을 대가로 싸우는 거였다.
“속전속결!”
칠성검을 휘두르자, 금빛 검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 루나의 몸에 피해를 줬고, 그렇게 루나와의 격돌이 시작됐다.
유성 찌르기
루나를 지나쳐가자, 소리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검이 움직이는 대로 루나의 몸은 잘려나가고 마기는 태워졌다.
‘이게 바로 초월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이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과 흐름이 느껴졌다.
이 감각에 풍덩 빠져들고 싶었지만, 헬리오스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수명은 빠르게 줄어들고, 몸은 망가지고 있을 거다.
우선, 내 기운으로 루나와 부딪혔다.
그렇게 몇 번의 격돌이 끝나자, 루나는 상체만 남기고 바닥에 쓰러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이아를 배신하고, 그쪽에 붙었으면, 이런 결말은 예상했어야지.”
내 말에 루나는 그저 두 눈을 꾸욱 감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돌아가면 셀레나에게 사죄해.”
미르를 꺼내 루나를 집어삼켰다.
일단 가장 급한 일은 끝냈고, 도망간 시리 시온과 앤드류를 쫓으려고 할 때였다.
초월자의 감각에 전설들이 고전을 겪고 있다는 신호가 느껴졌다.
게이트가 열렸던 곳을 바라보며 곱씹듯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놓치지 않겠어.”
우선 이 건물 안에 있는 로저 시거의 기감을 찾아서 움직였다.
순식간에 도착한 곳에는 로저 시거가 수많은 상처를 안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됐나?”
“그건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지친 로저 시거를 어깨에 걸치고 천장을 향해 기운을 발사했다.
뻥 뚫린 하늘이 보이자, 발사되는 로켓처럼 건물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하늘 위에서 전설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마족들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너희들이었구나.”
최상급 마족 여러 개체가 전설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일단, 크리스와 벨라 그리고 리암이 상대하는 최상급 마족에게 다가가서 그대로 목을 날려 버렸다.
“어?”
자신들을 괴롭히던 최상급 마족이 단숨에 죽게 되자, 그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저 시거를 내려놓고 전설들에게 외쳤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다음으로 훈련생들을 보호하며 세 개체의 최상급 마족과 싸우는 마리 선배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세로 베기
단 일수에 최상급 마족 한 개체가 반으로 나뉘었고, 다른 마족에게 뛰어들어서는 정수리에 칠성검을 꽂아 넣었다.
그사이 살아남은 다른 최상급 마족이 내게 치켜들었다.
기간틱 블레이드
거대 오러로 칠성검에 박혀 있는 최상급 마족의 몸을 분쇄해버리고, 다가오는 마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로 베기
마족은 자신의 몸이 너무 손쉽게 나뉘었다는 것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 표정이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앞으로 달려들어서는 순식간에 수십 수백 번을 마족의 상체에 찔러 넣었다.
곧, 검에 의해, 벌집이 된 최상급 마족이 바닥에 떨어졌고, 다른 이들이 막고 있는 최상급 마족을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다.
검기 감옥
일점에서 피어난 검기가 최상급 마족의 몸에 상처를 줬다.
그사이에 검기 감옥으로 뛰어들어 그대로 최상급 마족의 목을 자르고는 빠져나왔다.
내 등장에 몇몇 최상급 마족들이 도망치려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뭉치려는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모여 있으면 땡큐지!”
오비탈 블레이드 – 탄
길게 뻗어 나간 오러에 최상급 마족들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때, 검을 휘둘렀던 오른쪽 어깨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났다.
“조금만 더.”
몸이 망가지고 있다고 연신 비명을 질렀다.
일단, 아직 살아있는 최상급 마족을 향해 무차별로 오러를 날려서 몸을 조각냈다.
“마무리를 부탁합니다.”
내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스본 레스넌이 전설들을 진두지휘해서 반항하지 못하는 최상급 마족을 처리했다.
그 사이 아공간에서 흑색창을 꺼내 들었다.
헬리오스의 기운과 함께 흑색창을 마족 숭배자들의 건물을 향해 던졌다.
포스 미사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창에서 시선을 떼고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두 모여주세요.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뒤늦게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내 권역에 들어왔을 때, 건물에 던진 포스 미사일이 대단위 폭발을 일으켰다.
“땅의 축복.”
[람이시여 대지의 마나가 흔들려서…]
“내가 도울게! 어서 준비해.”
[아…알겠습니다.]
내 권역 안에 있는 마나를 느꼈다.
마나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늦는다.
그래서 강제로 마나의 목줄을 잡고는 일정하게 흐르게 하고, 그 타이밍에 맞게 땅의 축복이 우리를 이동시켰다.
후두두둑
땅이 가라앉자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교황청의 훈련장이었다.
그때, 전설들이 내게 다가왔다.
“하유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아스본 레스넌의 말에 에반 히스터가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오면 말했다.
“그 마법들은 뭐였냐?”
“나중에 할게요.”
“나중? 지금 장난해? 마법사의 지적 호기심을 건드려 놓고 나중?”
아스본 레스넌과 에반 히스터를 짧게 바라본 후, 마리 선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리 선배. 뒤처리를 부탁할게요.”
더 이상은 한계여서 강림을 해제했다.
지금까지 느껴지던 초월자들의 감각이 사라지자, 탈력감과 우울감이 솟구쳤다.
그렇지만, 그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르륵
내 몸에서 인체발화가 일어났고, 그 고통에 그대로 기절했다.
기절 직전 놀란 전설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는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