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_준비된 대비(1)
교황청의 업무는 끝이 없었다.
대외적인 업무야 교황이 대부분 처리하지만, 그 외에 비공식적인 업무는 모두 자신에게 몰렸다.
“루카스. 왜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지?”
내 말에 응접실 한쪽에서 노트북으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루카스가 피골이 상접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했던 말이 어린아이의 투정같이 느껴졌다.
“네? 성녀님 죄송한데,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냐. 별말 아니야.”
“네. 그럼.”
생각해보니, 루카스도 사흘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여기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루카스.”
“네. 성녀님.”
“급한 일은 대충 다 처리하지 않았어?”
“잠시만요.”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확인해보던 루카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산안 결제가 끝났고, 임무 배치도 끝났네요. 급한 것은 다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 아니 이만 일 하고 좀 자.”
“아닙니다. 아직 거뜬합니다.”
자신이 아직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루카스가 자신의 팔뚝을 들어 보이며 알통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들어 올린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야, 넘치는 신성력으로 일주일을 뜬 눈으로 새워도 무리가 없지만, 루카스의 신성력으로는 무리였다.
누가 봐도 곧장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빨리 들어가. 그러다가 죽겠어.”
“하하. 사실은 졸려서 죽을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들어가서 조금만 쉬었다가 오겠습니다.”
“응. 빨리 들어가.”
“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스가 비척비척 걸어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루카스가 나가고, 새로운 문서를 읽어 나갈 때였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성녀님. 제가 커피를 마셨더니, 다시 힘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루카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진짜 이대로는 일을 처리하기 전에 루카스의 장례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들어가.”
“아닙니다. 아직 일도 남았고.”
“들어가.”
서늘한 내 목소리에 루카스는 힘없이 터덜터덜 사무실을 다시 나섰다.
기감으로 루카스가 떠난 것까지 다시 확인한 후에 새로운 문서에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조심스러우면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어둡고 깊은 신성력이 느껴졌다.
“노인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홍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차가 완성되어서 찻잔에 붓고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허허허. 홍차 향이 교황청에 진동해서 한잔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
“네. 그럴 줄 알고 두 잔 준비해 놨습니다.”
다크 프리스트의 수장인 노인은 이미 준비된 홍차를 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제가 노망이 들었나 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님이 전설이라는 것을 한 번씩 깜박합니다.”
“별말씀을 그리고, 저는 아시다시피…”
“네. 전설이라는 허명보다는 13기동 타격대를 더 좋게 보시죠.”
잠시의 침묵과 함께 서로 홍차를 마셨다.
그렇게 찻잔에 있는 찻물이 절반 정도 사라졌을 때였다.
“제가 여기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녀님께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물이요?”
“네.”
과연 이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일까?
심판자들과 다크 프리스트는 비슷한 일을 하면서 서로 섞일 수 없다.
한쪽은 밝은 곳에서 위엄을 보이고, 다른 한쪽은 어두운 곳에서 공포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곳에 있지만, 공조하는 일도 그렇다고 서로에게 선물 같은 것을 주는 일이 없었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당황스럽네요.”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이아의 뜻입니다.”
노인이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서는 건네줬다.
서류를 꺼내 넘기다 보니,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안드레이 추기경이 말입니까? 한 달 전에 봤을 때도 냄새는 맡지 못했습니다.”
“허허. 저도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꼭 마기를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배덕자가 아니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증거가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는 추기경입니다. 그것도 교황이 아끼는.”
“네. 증거와 증인을 찾아야겠죠. 그런데, 이번에 안드레이 추기경이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유신이한테?”
안드레이 추기경이 왜 갑자기 한국에 갔다 오겠다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보며, 숭배자들이 이번에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되면, 유신이 위험합니다.”
“그건 몰랐을 때의 일이죠. 미리 대비하고, 경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시킬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노인은 유신을 아낀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놓고 이렇게 유신을 이용하겠다는 말을 하는 거지.
“그럼 그동안 노인께서는 주인 없는 집을 조사하고요?”
“허허허. 성녀님. 우리 같은 성직자에게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모두 욕심입니다. 저는 그저 가이아께서 주신 능력으로 추기경이 기거하는 곳에 나쁜 것이 없는지 확인해 볼 뿐입니다.”
물론 작전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끼가 되는 유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결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유신을 소환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성녀. 찬란한 검은 곧 도착할 겁니다.”
“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유신이 빼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신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도 놀랐지만, 유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에 더욱 놀랐다.
“할아버지. 저 부르셨어요? 마리 선배 들어가도 되죠?”
“이미 들어와 놓고서는 그런 말은. 그런데…아니야. 됐다. 빨리 이리 와.”
“넵.”
이제 곧 미끼가 될 수 있는 유신은 방긋방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쿠키를 발견하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하나 집어서 먹었다.
“이거 맛있네요.”
태평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유신에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머뭇거릴 때였다.
홍차를 홀짝이던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교황청의 찬란한 검이여.”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냥 하유신. 또는 편하게 유신이라고 부르세요.”
“허허. 이 늙은이가 어찌 가이아께서 선택한 찬란한 검을 이름으로 부릅니까.”
“여기가 공적인 자리도 아니잖아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아무리 사정을 모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본인을 미끼로 쓰려고 하는 사람한테 저렇게 말을 하는 게 한숨이 나왔다.
“다음에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찬란한 검을 미끼로 좀 쓰려고 합니다.”“네? 저요?”
“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결론부터 꺼내는 노인의 말은 황당했지만, 유신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우선 안드레이 추기경이 지금 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한국이요? 그분이 왜?”
유신은 턱을 쓰다듬으며, 이야기에 경청했다.
“다크 프리스트 형제들이 조사한 결과, 그는 배덕자이더군요. 그래서 한국으로 왜 가는지 확인을 해본 결과 찬란한 검을 만나러 간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교황청에서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데, 굳이 한국으로요?”
“찬란한 검을 납치하기에는 교황청보다 한국이 훨씬 쉬우니까요. 거기다가 한국에는 찬란한 검의 가족들도 있고요.”
순간 유신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주위에서 유신을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할 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를 피어 올리니, 이제는 유신이 완연한 강자가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였다.
“적당히 해.”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내 한마디에 순식간에 살기를 갈무리했다.
“할아버지도 죄송해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이 늙은이가 마저 설명하겠습니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는지, 노인의 작전은 세세한 부분까지 이어졌다.
거기다가 대부분의 변수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작전 설명을 듣고 나자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데, 작전에 오류가 하나 있네요.”
“이 늙은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도 있나 보네요. 찬란한 검께서 이 늙은이를 깨우쳐 주시겠습니까?”
“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우리 집 방어 시설에 꽤 힘을 많이 줬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할아버지 말대로 가족이 인질로 잡힐 수도 있으니,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마련해 놓는 게 좋겠어요.”
“그럼 이 작전을 찬란한 검께서도 찬성하시는 겁니까?”
“네. 당연하죠.”
유신의 수락으로 모든 작전 준비가 끝난 것과 같았다.
“그럼 마저 대화하세요. 전 이만 자러 가봐야겠어요. 작전이 시작되면, 한동안 못 잘 것 같으니까요.”
이제 교황청이 홍역을 겪을 차례였다.
***
[교황청의 안드레이 추기경. 한국 도착.]
교황청에서 마리 선배와 다크 프리스트들의 수장인 할아버지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이 한 줄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거다.
“일단 그와 어울려 주라는 거지?”
“네? 뭐가 말씀이십니까?”
옆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용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그런데, 일전에 제가 말해놨던 것들은 준비가 됐나요?”
“네. 4기동대에 도움을 요청했고, 지(地)에게도 그리고 신평에게도 따로 말해놨습니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도 해도, 이 정도 도움을 받았으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죠?”
“괜찮을 겁니다.”
“괜찮다고요?”
세상은 선의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 기브 앤 테이크가 기본이 되는 관계였다.
개인적인 부탁을 하고, 아무런 것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게 뻔했다.
“네. 실질적으로 하유신님과 계약 후, 처음으로 한 부탁입니다. 거기다가 4기동대에서 가지고 있는 하유신님의 호의는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입니다. 개인적인 부탁으로는 4기동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성과입니다.”
“성과요?”
용호가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커피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4기동대는 개인적인 부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숭배자들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더 사용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이번에 세계대통령을 통해서 권력자들을 솎아낼 때, 4기동대의 위상이 올라가기도 했고요.”
“아니 그건 그냥…”
따뜻한 커피를 내게 내려놓으며, 용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유신님. 4기동대는 반대로 기대도 하고 있답니다. 하유신님과 일하면, 언제나 자신들에게 이득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 생각까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편하다고 그 사람에게 계속 요구하다 보면, 호의가 권리라고 느껴질 수 있었다.
그게 나라고 해서 다를 건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4기동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건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용호씨.”
“네.”
친절하게 웃는 용호씨에게 이런 말 하기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는 얼죽아입니다. 다음에는 따뜻한 것보다, 차가운 커피로 부탁할게요.”
“…아 네.”
“그래서 이 커피는 냉장고에 넣어주세요. 아시다시피 이제 안드레이 추기경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네요. 이 커피가 꽁꽁 얼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스스로 꽤 멋지다고 생각하는 멘트를 날리고, 안드레이 추기경을 마중 나가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