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_용병왕(3)
아스본 레스넌에게 고개를 숙여서 용병들을 다독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그로 인해, 며칠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대충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용병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 말 마세요. 저보다는 부단장님이 고생이 많으셨죠. 그러니까 이만 쉬세요.”
“절 걱정해 주시는 건 역시 용병왕님 뿐입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트레일러를 나가는 아란 칼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저 늙은이한테서 벗어나는구나.”
귀찮은 행정업무라는 걸 대부분 다 처리해주지만, 이런 경우에는 한동안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마검 히페리온을 만지지 못했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서로에게 힘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내가 요즘 신경을 쓰지 못해서 미안해.”
바빠서 며칠 만에 만난 애인을 달래듯, 살짝 떨리는 손으로 마검 히페리온을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히페리온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니까.”
토라진 연인 같은 마검 히페리온의 행동에 가슴이 살짝 답답해졌다.
“그래. 오늘 할 일도 다 끝났는데, 지금부터 데이트를 하러 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마검 히페리온을 허리춤에 패용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트레일러를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했지? 조용히 몇 명만 슥삭하면 돼.”
마을에 들어선 후에 더욱 몸을 조심히 했다.
그때, 골목길에 한 쌍의 연인이 므훗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슬그머니 마검 히페리온을 뽑은 뒤, 집중하고 있는 그들의 뒤에 다가갔다.
이대로 검을 찔러 넣으면, 그들은 꼬치 꿰이듯 가지런히 박혀들 것이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까아아악!”
갑자기 들린 진중한 목소리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고, 남성은 당황해서 그런 여인을 쫓아갔다.
자신의 행사를 방해한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아버지?”
“아직도 그 입에서 아버지라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호주의 거인 크리스만큼 거대한 덩치와 함께 자신의 몸만한 검을 지닌 자.
모든 용병의 아버지 로저 시거가 나타났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래. 나는 무사하지.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는 것 같구나.”
뒤늦게 자신이 마검 히페리온을 뽑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거기다가 방금까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단 걸 들켰다.
“따라와라.”
몸을 돌려서 움직이는 로저 시거의 등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등에 마검 히페리온을 꽂아 넣고 싶었다.
물론 마검도 자신의 귀에 그리하라고 속삭였지만,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한참을 움직여 도착한 곳은 아무 인적도 없는 곳이었다.
“아버지. 제가 아까의 일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설명 말이냐? 그 마검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꼬챙이 꿰듯 꿰버릴려고 했던 행위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마검에 빠져서 한 개의 마을을 몰살한 걸 말하는 것이냐?”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나에 대해서 모든 걸 파악했다.
“좋습니다. 변명 따위는 구차해서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검에 지배당한 게 자랑처럼 보이느냐?”
“지배요? 무슨 그런 소리를. 마검과 저는 서로 동등한 계약 관계입니다.”
“다들 그런 말을 하고선 마검에 지배받았지. 지금의 너를 봐라. 예전과는 다르게 일반인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말을 듣다 보니, 점점 화가 솟구쳤다.
예전이야 아버지이자, 용병왕이기에 존중해왔는데, 지금은 고작 한 팔을 잃은 노인으로밖에 안 보였다.
“예전 당신이 이런 말을 했었죠. 이 세계는 강자존이라고.”
“잘 기억하는구나.”
아버지 로저 시거는 등에 멘 거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지금까지 너무 질질 끌기만 했다.
“지금은 내가 용병왕이야!”
마검 히페리온도 내 의견을 존중하는지 힘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만족감과 함께 넘쳐흐르는 힘.
이 힘만 있으면, 발톱 빠진 호랑이 정도야 문제없었다.
“뒷방 늙은이가 은퇴했으면, 그냥 유유자적하게 쉴 것이지!”
소닉붐
굉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압축 공기가 로저 시거에게 날아갔다.
로저 시거는 거검을 들어서 그대로 내리그었다.
소닉붐이 허무하게 갈라지며, 미풍이 되었다.
아무리 팔 하나를 잃었다고 해도 전설은 전설이었다.
소닉붐 – 다연발
쉴 새 없이 날아가는 압축 공기가 로저 시거의 급소를 노렸다.
로저 시거는 내려던 검을 다시 들어 올렸을 뿐인데, 모든, 소닉붐이 미풍이 되어 사라졌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능력에만 의존하지 말라고.”
“그딴 가르침 필요 없다고!!”
나는 용병왕이다.
지금 이 시대의 용병들을 이끄는 용병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검이 닿지 않는 거지? 그래. 너무나 안일했다.
“히페리온. 이제 진정한 용병왕이 될 차례다.”
마검 히페리온이 내 말에 호응하듯 힘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차근차근 일어나면서 내 몸을 덮어갔다.
“내가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구나. 마검 사용자 중 유일하게 마검에 먹히지 않는 자가 왜 마검에 먹히지 않았는지 아느냐?”
“크크크. 그딴 쓸데없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로저 시거는 양손으로 거검을 잡은 후, 말을 이었다.
“마검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지. 마검을 사용하지 않을 거면서 왜 불길하게 가까이 두냐고? 그래서 그가 뭐라 한지 아느냐?”
“듣기 싫다고!!”
소닉붐에 붉은 기운을 섞어서 뿜어냈다.
지금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에 로저 시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저 시거가 들고 있던 검에 푸른 포스가 뭉치더니, 그대로 휘둘러졌다.
“아…”
자신감 넘치던 공격이 그대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때, 머릿속에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크아아아아악!!!!”
***
쉽지 않는 싸움이었다.
단숨에 목숨을 끊는 거였다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아무리 미워도 자신의 제자이자, 아들이었다.
“아까 했던 말을 마저 하마.”
콜린은 기절한 상태에서도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몸이 움찔 떨렸다.
저게 콜린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마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식이기에 전해야 할 것은 제대로 전해야 했다.
“그는 마검이 다른 검보다 아름다워서 들고 다니는 거라고 하더군. 그가 바로 모든 마검을 수집하는 자. 검귀 이유호다.”
알려줄 것은 다 알려줬지만, 콜린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밟을 수 있는 만큼 밟아놨기에 한동안 깨어날 일은 없을 거다.
“이것도 힘들군. 이제 그만 나와도 되네.”
말이 끝나자, 전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유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네.”
하유신은 콜린 시거에게 다가가더니, 대충 살아 있는 것만 확인하고는 내게 다가와서 포션을 내밀었다.
“괜찮네.”
“많이 다치셨습니다.”
“이 정도는 침만 바르면 낫네.”
“그러시겠죠. 그런데, 침은 더럽잖아요. 드세요.”
비유법을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자가 있다는 게 황당했다.
거기다가 마시지 않으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하유신의 모습에 포션을 받아서, 한 번에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션의 청량한 기운이 몸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치유했다.
“포션이 좋군.”
“최상급 포션이니까요. 그런데, 로저 시거님이 이렇게 고전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네. 마검의 힘이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요.”
하유신은 칠성검을 꺼내서 콜린 시거가 쥐고 있는 마검을 꾹꾹 찔렀다.
마검은 그게 기분이 나쁜지, 붉은 기운이 솟구쳤지만, 숙주였던 콜린 시거의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는 건가?”
“네. 방법은 있어요. 유호 선배가 알려준 방법이라서 신빙성은 없지만요.”
“이유호? 그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지.”
내 말에 하유신이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런가?”“아니. 아닙니다. 그냥 유호 선배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어서 그게 신기해서요.”
“자네는 자네의 선배들인 13기동 타격대를 못 믿는 성향이 있군. 그들은 정말로 강하다네.”
“강하기는 강하죠. 그 외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유신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도 없으니 그냥 하던 일부터 할게요.”
“그러게.”
하유신의 오른손이 포스로 뒤덮이더니, 그대로, 콜린 시거의 마검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그러자, 마검이 기운을 뿜어내며, 하유신과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와~ 반항이 심하네.”
마검을 회수하러 온 하유신이었지만, 그가 마검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검을 꺼내 들어서 언제든 하유신을 벨 준비를 했다.
물론 유신도 그걸 알기에 자신에게 최상급 포션을 공급했을 것이다.
‘제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힘겨루기 막바지에 들어가고 있는지, 이제 유신과 마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만이 이 공간을 뒤덮었다.
그때, 유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유호 선배의 마검이 테이아인데, 테이아가 꼴에 지 남편이라고 부수지는 말라고 했는데, 자꾸 이러면 히페리온. 당신을 조각조각낸 후에 화로에 집어넣어서 개 밥그릇으로 만들 수 있어요.”
너무 작은 소리여서 집중해야 겨우 들릴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검에게 저런 협박을 하다니, 그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협박이…먹혔네?”
마검의 붉은 기운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유신의 포스가 뒤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신의 포스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검은 유신의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자네…괜찮나?”
“네. 꽤 까다로웠지만 괜찮…지금 그 자세는 뭐세요?”
“응? 아! 그게…”
뒤늦게 아직도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재빨리 자세를 푼 후에 거검을 등에 착용했다.
“와! 용병왕님 아니. 이제 용병왕도 아니지. 로저 시거님 그렇게 안 봤는데, 설마 제가 이딴 마검에 먹히면 바로 공격할 생각이셨어요?”
실제로 그럴려고 했기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이게 바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는데, 보따리 내놓으라고 당당히 따지는 상황이구나.”
그 비유를 그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잘못했기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방송에서 용병은 신뢰와 의리라고 하더니.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네요.”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면 뭔데요?”
“네가 마검에 먹히게 되면, 팔을 베어서라도 구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죽이는 건 나쁜 짓이지만, 팔을 베는 것은 괜찮다?”
왜인지 하유신과 계속 말하면 말할수록 말리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꾸나.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냐?”
하유신과 교황청이 시간과 인력을 낭비해서 괜히 자신을 도와준 게 아니었다.
세상은 기브앤 테이크이고,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돌려서 하지 않아서 좋네요. 그럼 말씀드리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교황청에 듣기로 한 가지였는데, 어느새 하나가 더 늘었다.
“하나는 제 목숨값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나는 팔을 베려고 했을 뿐이다.”
“그럼 팔 값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첫 번째로 13기동 타격대에 대한 모든 제재를 풀어주는 것에 동의해주세요.”
예전이라면 생각해볼 문제였지만, 세계의 이면을 파악한 지금이라면 절대로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좋다. 두 번째는 뭐냐?”
“이건 제 사소한 부탁입니다. 이거 받으세요.”
유신이 건네준 것은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투명한 구슬이었다.
“일회용 장거리 텔레포트?”
“네. 거기에 있는 구슬이 붉게 변하면, 그저 팍 부수세요. 그러면 제가 지정한 공간으로 넘어갈 건데요. 일단 넘어가 보시면 대충 아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