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_멕시코 해방군(4)
아주 긴 잠을 자다가 눈을 뜨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셀마? 달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과 가장 듬직한 친구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죽은 건가?”
이곳이 사후 세계라는 걸 깨달았다.
죽었다는 것이 한편으로 씁쓸했지만, 이렇게 보고 싶은 자들을 만나니 그것 또한 좋았다.
그때, 셀마가 내게 안겨 왔다.
순간 고통이 온몸을 자극하면서 몰려왔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론.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야?”
“응? 정신이라니?”
셀마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손을 들 때였다.
짜그락 짜그락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쇠사슬이 쇄골을 꿰뚫고 있었다.
그때, 주마등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게 기억났다.
죽은 게 아니었다. 꿈에서 달란과 셀마가 자신을 구한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거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아무런 능력을 쓰지 못하는 아니, 일반인보다 못난 체력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아…”
이렇게 망가진 육체로 아무런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엘 캄파를 죽이는데, 실패하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이렇게 폐인이 되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 달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씁쓸하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일단 쉬고 있어. 지금 교황청과 협조 중이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널 치료해줄게.”
분명 날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교황청은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성녀가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자신이 삼 천의 영웅이지만, 과연 그 성녀가 움직일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요. 아론. 걱정 말고 쉬어요. 이번 우리 작전을 교황청에서 지원도 해주고 있으니 곧 좋은 답이 올 거예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셀마가 열심히 말했고, 그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짧아진 걸 보게 됐다.
일단, 셀마를 위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긴 머리가 좋다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머리는 다시 자라잖아요.”
“응…”
자신과 약조한 긴 머리카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싫었다.
“셀마. 아론이 힘들 수 있으니, 이만 쉬게 하자.”
달란의 말에 셀마가 자신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론. 쉬고 있어요. 곧 다시 올게요.”
“응.”
셀마와 아론이 밖으로 나가자,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들이 과연 널 치료해줄까? 아냐, 그냥 이제 널 버릴 거야.]
갑자기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누구긴? 바로 너야.]
“나?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바로 너라고. 아론. 일단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린 버림받게 생겼다고, 아까 달란 눈빛 봤어? 어우~ 어떻게 내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지?]
“……”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인도 달란의 눈빛을 봤었다.
[그건 걱정의 눈빛이 아니라, 삼천의 영웅이었던 우리가 폐인이 됐으니 이제 쓸모가 없다는 눈빛이었어. 즉, 효용가치가 없다는 눈빛.]
“아니야. 달란은 그렇지 않아. 그는 정의롭고 올곧은 친구야.”
애써 뒤늦게 부정하고 고개를 저었다.
[친구? 무슨 소리야? 친구는 없어. 그리고 친구는 언제든지 등을 돌리는 게 친구야. 아까도 봐봐. 넌 셀마와 같이 있고 싶은데 그냥 데리고 나갔잖아.]
“그렇지 않아. 날 걱정해서…”
[걱정? 그럼 셀마는?]
“셀마?”
처음에 의심했던 이 목소리에 어느새 휘둘려서는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 셀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긴 머리도 네가 죽었다고 하니까 바로 잘랐어.]
“넌 뭔데 연인과 친구를 나와 이간질시키는 거야!”
[다시 말해줘? 나는 너라니까. 이제 그만 인정해. 그리고 받아들여.]
받아들여. 받아들여.
이 말이 머릿속에서 길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버림받았다.
연인은 마음이 바뀌었고, 하나뿐인 친구는 나를 쓸모없는 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 주위와 모든 걸 그렇게 증오하라고. 그래야. 내가 네가 될 테니.]
분노와 증오 그리고 배신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지옥의 무저갱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땅의 축복이 폭발을 방어하느라, 기운을 다했다.
힘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 중급 마나석 다수를 깨뜨린 후, 이화접목과 포스 호흡으로 흡수하고는 다시 땅의 축복에게 보냈다.
그렇게 홀로 검무를 추고 있을 때, 버키가 발을 동동 굴리며 말했다.
“하유신님.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으세요.”
버키의 재촉을 일축하고, 주위에 흩어진 기운을 모조리 흡수해서 땅의 축복이 흡수할 수 있게 도왔다.
대기에 마나석의 기운이 사라지자, 검무를 멈추고는 땅의 축복에게 말을 걸었다.
“됐어?”
[네. 끝났습니다. 버키라는 자와 같이 이동하실 거면, 상급 마나석 하나가 필요합니다.]
“오케이.”
아공간에서 상급 마나석을 하나 더 꺼내자, 땅의 축복이 날름 마나석을 먹고는 공간이동을 진행했다.
“버키씨. 잡을 때는 없지만, 그냥 본인 손이라도 꽉 잡으세요.”
“네? 잡으라고요?”
땅이 솟구치고, 가라앉았다.
우리가 오기로 했던 비밀기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비밀기지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버키씨. 알아서 숨으세요.”
비밀기지는 반파됐고, 여러 사람들이 쇠사슬을 휘두르는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칠성검을 뽑은 후,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카카캉
칠성검과 마족의 몸에 연결된 사슬이 부딪히며, 불꽃을 토했다.
마족의 사슬을 쳐내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접근을 끝내자, 오러로 마족을 베어내려고 할 때였다.
“안돼요!!”
셀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오러를 휘둘렀다.
잠깐의 멈칫 때문일까?
칠성검은 고작 마족의 사슬만 베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이 없기에 그대로 앞으로 치고 가려 할 때, 옆에서 위협적인 공격이 느껴졌다.
고개를 왼쪽으로 움직여서 손쉽게 피했지만, 그로인해, 공격 리듬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날 공격한 셀마를 노려보자,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론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론 발데스라고요.”
셀마의 외침과 동시에 아론의 사슬 공격이 쏘아졌다.
어렵지 않게 사슬을 쳐내고는 셀마의 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달란을 바라봤다.
“셀마의 말이 사실입니까?”
“네. 안타깝게도 진실입니다. 저 마족은 아론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증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절 공격했다고요?”
내 말에 셀마가 흠칫했지만,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크게 외쳤다.
“당신도 사랑을 해봤을 거 아닙니까? 아무리 모습이 바뀌어도, 달라졌다고 해도, 그 사람이 바뀐 건 아닙니다. 제발…부탁합니다. 당신이라면, 아론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잖아요.”
아론의 사슬을 쳐내고는 수십 개의 검기를 날렸다.
“전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설도 아니고요.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그리고 막말로 제가 왜? 제 목숨을 걸면서 그런 무모한 일을 해야 합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셀마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마족이 된 상황이었다.
“아 진짜!!”
다가오는 사슬을 검기로 모두 쳐냈다.
그렇게 아론의 빈틈을 만든 후, 칠성검을 하늘 위로 높게 던졌다.
뇌전
칠성검에 있는 번개의 힘이 아론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그렇게 경직된 아론에게 다가간 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셀마가 불쌍해서 그런게 아니라, 마왕의 위험으로부터 지구를 구해줬던 아론 당신에 대한 내 호의입니다.’
아론이 정신을 차리라고 주먹으로 정수리를 가격했다.
땅에 대자로 뻗은 아론을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모태솔로라서 연인의 소중함도 사랑도 모른다고! 땅의 축복 붙잡아!’
땅의 축복이 바닥에 박힌 아론의 사슬과 양손 그리고 양발을 구속했다.
구속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아론의 위로 올라탔다.
그 상태에서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면서 아론의 얼굴을 가격했다.
끝도 없이 쉼 없이 휘둘러지는 주먹.
바닥에 반쯤 박혀 있던 아론은 점점 지하 밑으로 들어갔다.
‘연애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남들 연애할 시간에 나는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주위에서 흔하게 하는 소개팅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남들이 새로운 영웅이라, 교황청의 검이라 떠들었지만, 나는 여자에게 인기 없는 그저그런 놈이었다.
“교황청 사람들도 연애해도 되고,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너무 감정적으로 변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더욱 행동이 거칠었다.
방금 한 말을 무마하기 위해, 주먹을 손바닥으로 바꿔서 찰지게 때렸다.
“너는 멕시코의 구심점이라는 놈이 뭔 짓을 했길래. 마족이 되어서 이렇게 골치를 썩이는 거야!”
그때 하늘 위로 던졌던 칠성검이 떨어져서 손 위에 안착했다.
“죽지는 않고 조금 많이 아플 거다.”
빙의 기운을 일으킨 다음에, 그대로 아론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콰득 콰드득.
아론의 몸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기 시작하더니, 조쉬 히라니를 가뒀던 것과 똑같은 얼음 구체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렇게 아론이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고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셀마를 바라봤다.
“안 죽였어요. 그냥 얼린 겁니다.”
셀마와 달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최소한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뒤늦게 셀마가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론은 교황청으로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양보였다.
“아론이 교황청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그건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아…”
마족이 된 아론이 교황청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죽지 않는 걸 후회하는 삶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밀 수는 없었다.
셀마와의 대화를 끝내기 위해 그저 고개를 돌려 빈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던, 달란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하유신님 죄송하지만, 아론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대화요?”
“죄송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지금 얼음이 된 아론에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달란과 셀마가 아론을 풀어주려고 저러나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지만, 혹시나 정말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설마 아론을 풀어주려고 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당신과 아론의 목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마지막 인사일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란이 셀마를 부축한 후, 재빨리 아론 앞에 섰다.
그리고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아론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기의 고약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론은 얼음에 갇혀있어서, 더는 냄새를 풍기지 않았고, 아직 마족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다 흩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진하게 맡아질 줄은 몰랐다.
“모두 경계 태세!”
내 경고에 아론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던 셀마와 달란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무기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