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_인도의 카스트 제도(3)
아이들은 총 서른두 명이었다.
처음에 도망쳤던 그 아이들만 몰랐을 뿐이지,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같은 마을 출신이었고, 부모가 자신들을 팔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가장 키가 큰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이제 저희는 뭘하면 될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저희는 수드라입니다. 평생 여기저기 팔리고, 일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키 큰 아이의 눈빛은 그 나이 또래와 어울리지 않게 메말라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라오입니다.”
“그래. 라오. 카스트 제도는 악습이야. 너희들은 구출됐고, 이제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면 돼.”
자유라고 말했지만, 서른두 명의 아이 중 단 한 명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이들 특유의 시끄러움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서 날 바라만 볼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아이들은 말해. 내가 돌려 보내줄게.”
이 말에 몇몇 아이들이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라오가 손을 들어, 아이들의 길을 막았다.
“라오. 자유야. 네가 여기 큰형인 것 같은데, 아이들의 자유를 막을 권리는 없어.”
“무슨 말씀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닌 눈치였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막은 이유를 설명해 줄래?”
“이 애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죽게 될 겁니다.”
“응? 집에 가는데 왜 죽어?”
“예전에 저희 동네에 노예로 팔려 갔던 옆집 형이 있었습니다. 그 형은 1년 뒤에 어떻게 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이 돌아오고 다음 날 그 형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죽어?”
“네. 주인에게서 벗어난 노예는 죽어 마땅한 게 수드라입니다.”
악습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말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라오의 말대로라면 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간 순간 모두 죽게 되는 거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라오를 바라봤다.
“…그럼 라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지금까지 잘 말해왔던 라오라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라오는 내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는 대답을 했다.
“수드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키는 데로 움직일 뿐이죠.”
라오가 이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이지만,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게 꽤나 잔인했다.
“설마 저희를 구해줬으니 이제 알아서 살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건 구원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 보고 다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습니다.”
솔직히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로 인한 책임까지는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모든 임무를 쉽게 생각하고, 내가 편한 데로 움직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책임이라는 걸 제대로 져야 했다.
“라오. 네가 이 아이들을 대표해서 대답해줘. 내가 너희들을 이끌기 바라니?”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준 기회였고, 어떻게 보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수드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드라. 수드라. 그놈의 수드라 좀 그만해! 넌 노예가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평등한 인간이야. 그리고 난 수드라가 아닌, 인간 라오에게 묻는 거야!”
스스로를 비관하듯 말하는 라오에게 화가 많이 났나 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고, 라오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뒤에 있던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울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울지 않는 건 우는 순간 더 크게 혼이 날까 봐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 보다. 라오. 다시 물을게.”
명령을 받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애들이다.
갑자기 바꾸는 건 쉽지 않았고,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라오. 명령이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해. 너와 다른 아이들 모두 내가 이끌어 주기를 바라니?”
긴장됐는지 라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수드라. 명령만… 듣는…”
“응 그래. 그러니까 내 명령이 너에게 답을 바라는 거잖아.”
“…저는…우리가…”
계속 눈치를 보는 라오를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모시게 해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용기를 내서 대답한 라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위성 전화기를 꺼냈다.
“네. 선배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그게…”
전화로 사정 설명을 끝내고,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교황청과 연결된 게이트가 열렸다.
“애들아. 여기로 들어가면 교황청이 나와. 같이 가고 싶은데, 나는 일이 있어서 그걸 처리해야 하거든.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너희들 먼저 가.”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게이트를 처음 보는지 성큼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라오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게이트 앞에 섰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래. 라오. 게이트로 이동을 하게 되면, 처음엔 어지러울 수 있어. 그런데, 금방 괜찮아지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라오가 게이트로 뛰어들자, 다른 아이들도 라오를 따라서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아이가 게이트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탈출을 시도했던 소년과 소녀가 남았다.
“자, 이제 너희 차례야.”
아이들은 아직도 게이트가 두려운지 마지못해 게이트 앞에 섰다.
“저기, 부탁이 있어요.”
“부탁?”
카스트 제도라는 악습에 갇혀 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자신이 생각을 하고 그걸 입 밖으로 꺼내줄 아는 아이였다.
“네.”
“뭘 부탁하려고?”
“저희가 살던 마을로 한 번만 가주세요.”
“마을로? 왜?”
“우리 부모님은 절대 우리를 팔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러는데, 정말 우리를 팔았는지 알아보고 싶어요.”
“알았어. 내가 꼭 알아봐줄게. 마을 이름이 어떻게 되니?”
내가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말에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로체. 그게 마을 이름이구요. 저는 아방, 제 동생은 알리야입니다.”
“오로체 마을. 그리고 아방과 알리야. 기억했어.”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끝난 아방과 알리야가 게이트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세계 대통령과 조쉬 히라니의 협상이 끝나고, 경호 업무가 마무리 되면, 꼭 오로체 마을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공항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
조쉬 히라니가 있는 인도 마이소르로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서 국내선 방갈로르 공항의 허락하에 전용기를 착륙시켰다.
출국수속을 세계 대통령 권한으로 프리패스하며, 공항을 나섰을 때, 그렇게나 찾았던 하유신이 보였다.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세계 대통령님. 그럼 가실까요?”
“그러지.”
공항 입구로 향하자, 여러 대의 검정색 세단이 보였다.
비서의 안내로 가운데 리무진에 들어가면서 유신에게 말했다.
“자네도 같이 여기 타게.”
“제가 말입니까?”
“그래. 왜인지 자네가 옆에 있으면 더 든든할 것 같아서 그래.”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쉬 히라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차량이 출발했다.
이미 비행기에서 어떻게 설득하고, 무엇을 양보할지 준비가 끝났지만, 답답한 마음에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맞은편의 앉아 있는 유신을 흘끔 바라봤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크흠…”
짧은 헛기침에도 유신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커커험.”
이제는 아주 티를 내며 헛기침하자, 유신이 눈치 채며, 자신을 돌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경호 업무 중이었는데,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네.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 있나?”
내 질문에 유신이 대답할 것처럼 입을 벌리더니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니, 더욱 답답했다.
들고 있던 서류를 정리해서 옆으로 치우며 유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지 말고 편하게 말해도 되네. 혹시 아나? 세계라는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최정상을 찍은 사람의 조언이 도움될 수 있을지.”
지금이야, 모든 상황이 극으로 몰려있었지만, 몇 달 전만해도 유일하게 연임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간단한 상담을 통해, 유신에게 마음의 빚을 쌓아둔다면, 자신에게 이득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유신은 말없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허허. 그래. 그러면 정말 조언이 필요하거나, 말동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고, 차량은 마이소르에 도착했다.
대외적으로 인도를 방문하였기에 보통 이런 경우 조쉬 히라니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마중을 나와야 했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나왔을 뿐이었다.
“당신이 세계 대통령 토마스 피어스야?”
그 사람은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고 오직 이 말을 내뱉고, 무심하게 코를 후볐다.
옆에 있던 보좌관이 예의 없는 그 행동에 나서려고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괜찮아요. 네. 제가 토마스 피어스입니다.”
“따라오슈.”
어떤 식으로든 조쉬 히라니가 기선 제압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수법이라면, 그는 너무나 치졸하고, 옹졸한 인간이었다.
“여기가 바로 우리의 왕이신 조쉬 히라니님이 계신 곳입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세요. 그리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당신과 당신뿐입니다.”
앞에 있는 이 자는 자신이 가리킨 자가 교황청의 검 하유신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그때 하유신이 앞으로 나서며 그자를 바라봤다.
키가 꽤 큰 하유신은 안내인을 아래로 내려 보며 말했다.
“너한테서 아주 불쾌한 냄새가 나.”
“와~ 형씨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니오? 오늘 손님 온다고 아침부터 목욕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냄새난다고 말까지 하다니.”
“나는 교황청의 하유신이다. 세계 규약에 따라서, 교황청에서는 마족과 연계된 사람의 수사권한이 있지.”
하유신이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서인지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가며, 안내인을 압박했다.
그러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도움을 달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무슨 이유로 하유신이 이렇게까지 나서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타이밍을 만들었고, 중재를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허허. 곧 중요한 자리가 열리네. 유신군. 교황청의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잠시 넘어가 주겠나?”
이제 유신은 마지못해 넘어가 줄 것이고, 우리를 무시했던 안내인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게 된다.
물론 이 일을 조쉬 히라니에게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성격상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이다.
“세계 대통령님. 우선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말을 끝낸 유신이 안내인의 목을 꽉 틀어쥐고는 그대로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내인을 조쉬 히라니 앞에 집어 던지면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교황청에서 온 하유신입니다. 오늘은 세계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파견을 나왔는데, 아주 재미있는 놈을 찾아서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조쉬 히라니는 유신의 과격한 행동에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팔걸이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렇게 살벌한 침묵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유신이 기다리기 지쳤는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조쉬 히라니님 앞에 던진 놈에게서 더러운 마족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13인의 전설이시자, 수많은 마족을 도륙하신 인도의 왕 조쉬 히라니님. 어떻게 이런 자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쉬 하라니가 재미난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