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_인도의 카스트 제도(1)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거검을 들고 검을 휘두르자, 평소보다 땀이 배는 넘게 흘렀다.
“로저. 내가 분명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거검을 계속 휘둘렀다.
“계속 그렇게 말을 듣지 않으면, 널 제압해서라도 오른손을 재생시킬 수 있어.”
앤드류 때문에 스스로 자른 오른손은 방심의 대가였고, 복수를 향한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난 마리를 이길 상태가 아니었다.
“이건 원. 성녀가 무서워서 몸도 못 풀겠군.”
“체력도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그렇게 혹사하면 치료 기간만 더 늘어나.”
“나는 그런 약골들과 달리 이렇게 몸을 움직여야 빨리 나아.”
당연히 이런 변명은 마리에게 먹히지 않았다.
마리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는 말없이 옷소매를 걷었다.
“하하하핫. 교황청에 왔으니 성녀의 말을 들어야겠지.”
거검을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피로가 몰려왔다.
역시 마리의 말대로 무리했나 보다.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거검을 휘두르는 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런데, 웬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평소에는 잘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이거 봐봐.”
마리는 바닥에 내려놨던 태블릿을 다시 주워서 내게 건넸다.
태블릿에는 기사가 하나 떠 있었다.
[용병왕 로저 시거. 실종?
용병왕이 기거했던 곳에는 처참한 싸움의 흔적만 있고… 용병왕의 자식들은 2대 용병왕이 되기 위해서, 서로 이를 드러내고 있다. 과연 용병왕 로저 시거는 어디로 간 것일까?]
“곧 그 날인가?”
용병왕은 무기직이 아니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용병왕 선발대회에서 우승해야 했고, 자신이 용병왕으로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도전자는 없었다.
“용병들의 축제?”
“축제가 아니다. 그저 내가 계속 용병왕으로 있었기에 도전자가 없어서 그렇게 변질이 되었을 뿐이지.”
“그게 그거지 뭐. 앞으로 세달 남았나?”
“그렇지. 그때까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새로운 용병왕을 선출하겠지.”
“괜찮겠어?”
마리의 시선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내 오른손을 바라봤다.
물론 왼손으로 거검을 휘두르려면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 왼손 하나로 앤드류와 마물들에게서 벗어난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충분하다. 나는 그날 앤드류가 나타나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길게 한숨을 내쉰 마리는 아공간에서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의수를 꺼냈다.
“이게 뭐냐?”
“끼워봐.”
솔직히 일반적인 의수는 내 포스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받아들자, 일반적인 금속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다만티움?”
“응. 그 정도는 돼야. 용병왕의 포스를 견딜 테니까.”
“고맙군.”
의수를 오른손에 장착했다.
그러자, 의수와 맞닿은 부분이 잠깐 따끔하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의수가 아니라, 새로운 손을 끼운 것 같군.”
“교황청 기술의 총화가 들어갔으니까.”
신기했다. 처음부터 오른손이 잘린 것 같지 않았다.
손가락까지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다.
“옹고집처럼 오른손 재생은 절대 싫다고 하니, 그걸 준비했어. 의수를 보면서 그 잘난 복수심을 잘 키워봐.”
비난하듯 말했지만, 저게 마리의 말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공짜 아니야. 알지 내가 나중에 뭘 원할지?”
물론 나중에 마리가 내가 뭘 부탁할지 알고 있었다.
“그래.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크리스와 아스본처럼 널 적극지지하지.”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응?”
“13기동 타격대를 적극 지지해줘.”
역시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이 질긴 목숨도 연명하게 해줬고, 이렇게 좋은 선물도 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지금까지 왜 그렇게 13기동 타격대를 견제하고, 몹쓸 짓을 많이 해왔는지 모르겠다.
한때 전우였고, 지금도 남 모르게 지구를 수호하고 있는 녀석들인데.
“혹시, 모든 일이 끝나면, 나도 일루시안으로 가봐도 되겠나?”
마리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다 부질없다는 걸 느낀 것뿐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내 고향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하고 싶군.”
마리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지.”
“그래. 나도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루카스가 황급히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녀님. 용병왕님. 지금 세계 뉴스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무슨 일이지?”
“인도의 왕. 조쉬 히라니까, 세계정부 탈퇴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
백각이 떠난 천지에서 홀로 새롭게 바뀐 칠성검을 휘둘렀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불, 물, 뇌전, 독, 바람, 얼음이 같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걸 생각하면서 휘두르면 된다는 거네.”
능력마다 사용법은 달랐다.
불과 뇌전의 경우에는 공격용으로 사용하기 좋았다.
얼음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용이했다.
독은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인 저항력을 올려줬고, 바람은 공격보다 내가 움직이기 편하게 해줬다.
물의 기운을 사용하면, 지친 몸과 다친 상처를 치유했다.
마지막으로 백호의 발톱이 들어간 쇠의 기운은 칠성검을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최고의 무기가 만들어졌네.”
백각의 선물은 과분할 정도였지만, 마족 숭배자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최강의 무기를 얻으면 뭐 하나? 그걸 다루는 자신이 아직 미흡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들으면,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보고 말았다.
“차원의 틈에서 벌어지는 대단위 전투. 그런 전투에서 난 한낱 병정일 뿐이야.”
가이아에게 너무 큰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라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게 맞았다.
“그럼 규슈 지방부터 빠르게 정리해볼까?”
거인들에게 청소를 맡겼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 벌여놨던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가이아가 준 임무인 마족 숭배자들과 마족을 찾아서 처단하는 게 먼저였다.
“땅의 축복. 날 규슈 지방으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람이시여.]
땅이 솟구치고, 가라앉았을 때, 내 앞에 수백의 거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날 발견하자마자, 편하게 늘어져 있던 자세에서 급하게 일어나더니, 다 같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람을 뵙습니다.”
우렁찬 함성이 꼭 내가 사자후를 내뱉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때 프란시스코와 타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람이시여, 주신 임무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응? 프란시스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요괴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 처리했습니다.”
“벌써?”
“크하하핫. 람이시여 우리 거인들을 뭐로 보시는 겁니까? 람이 임무를 주신 후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일주일?”
나는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땅의 축복을 바라봤고, 요즘 눈치가 좋아진 땅의 축복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람께서는 천지의 세례를 받기 위해 천지에 들어가신 후,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가이아와의 만남이 아주 짧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 있었다.
“그.그래. 수고가 많았어. 땅의 축복. 일단 모두 우리의 땅으로 돌아갈까?”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이미 모두 한곳에 모였다.
땅의 축복은 거인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급 마나석을 소비하게 해서 거인들의 땅으로 우리를 이동시켰다.
“람이시여. 다음 우리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거인들의 땅에 돌아오자마자, 프란시스코와 타르는 열정 가득한 모습으로 임무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딱히, 무언가를 시킬 게 없었다.
마족과 마족 숭배자들과의 싸움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몰랐다.
“일단, 다음 임무가 생길 때까지 모두 훈련하도록 해. 이제 곧 위험한 전쟁이 시작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뵙겠습니다.”
떠나기 전 상급 이상의 마나석이 보관된 창고로 향했다.
저번에 가지고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최상급 마나석 2개와 상급 마나석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다 챙기고는 프란시스코와 타르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마족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다.
언제나 답은 하나였다.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강한 무력과 정보를 갖춘 곳.
교황청.
“마리 선배는 알려줄까? 에이~ 뭐하면 가이아님의 이름을 팔아야지.”
그렇게 마리 선배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교황청의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저기 한 쪽에서 마리 선배의 보좌관이자, 교황청의 살림꾼 루카스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루카스씨 오랜만입니다.”
나를 발견한 루카스는 지금도 뛰고 있는데, 전력 질주로 내게 뛰어왔다.
“아니! 유신씨 어디 있다가 지금 오시는 겁니까?”
“아. 제가 통신이 잘 안 터지는 데 있었어요.”
규슈 지방은 무슨 일인지 정말로 통신이 잘 터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진실은 그 외에는 내가 위성 전화기를 아공간에서 뺀 적이 없었다.
“일단 가시죠.”
“네? 어디로요?”
“성녀님께서 찾으십니다.”
루카스와 함께 교황청의 복도를 뛰다시피 해서 마리 선배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나는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남몰래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후, 문을 열었다.
“선배. 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집무실에는 마리 선배와 함께 거대한 덩치의 누군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내 그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용병왕 로저 시거님이세요?”
“맞네. 자네가 그 유명한 교황청의 검이자, 13기동 타격대의 마지막 대원인 하유신이군.”
감동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교황청의 검이라는 표현보다, 전설에게 13기동 타격대의 대원이라는 소리가 더욱 듣기 좋았다.
그렇지만, 기분 좋은 것도 한순간이었다.
“넌! 대체 뭘 하다가 이제 온 거야!!”
마리 선배의 외침에 자라처럼 목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됐다. 일단 빨리 인도로 가봐.”
“인도요?”
“그래. 세계대통령이 인도로 가면서 경호를 부탁했어. 솔직하게 말하면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지만, 지금 조쉬 히라니가 수상해. 그에게서 대응하려면 네가 제격이거든.”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데, 세계 대통령은 왜 갑자기 인도로 가는 거예요?”
마리 선배의 한숨과 로저 시거의 웃음. 그리고 루카스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며 내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내 궁금증도 해결해주고, 마리 선배의 화를 더 이상 돋구지 않기 위해, 루카스가 재빨리 현 상황을 설명했다.
“독립이요? 이상하기는 한데… 뭐가 수상하다는 거죠?”
“전설 중에서 가장 기회주의자가 조쉬 히라니야. 그런데, 갑자기 독립 선언을 했지. 기회주의자 치고는 타이밍이 좋지 않아. 그리고, 유신이 넌 세계 대통령을 경호하면서 인도에 대해서 알아봐.”
“뭘 알아보면 되죠?”
“최근 인도로 향했던, 교황청의 비밀 요원들이 모두 연락이 끊겼어. 그들이 마지막으로 했던 연락들은 모두 동일해. 마족 숭배자들의 꼬리를 밟았다. 이게 다 무슨 뜻인지 알아?”
당연히 모를 수 없었다.
거기다가 마리 선배가 가지 말라고 말리더라도, 나는 가야 할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항시 GPS 켜두고, 위성 전화기는 아공간에 넣어놓으라고 준 게 아니야. 그리고 공간이동 게이트를 타기 전에 루카스가 보급해줄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루카스에게 따로 말하고. 마지막으로 몸조심해. 여차하면 너라도 피하고.”
나는 마리 선배의 걱정을 날리버리도록 최대한 웃으며, 과장되게 경례를 올렸다.
“13기동 타격대의 막내 하유신. 몸 조심히. 임무를 완수하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내가 말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에 로저 시거가 있다는 건 비밀이야. 알았어?”
“넵.”
마지막 대답을 끝낸 후 루카스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문밖을 나선 순간, 장난끼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앞을 바라봤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리 선배의 정보에 따르며, 이제부터 마족 숭배자들을 처리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