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_천지의 세례(1)
피에 젖은 백각과 그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인간의 사체.
그 정도만 해도 경각심이 극에 달하게 만드는데, 백각의 눈을 바라보자, 손이 벌벌 떨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입 밖으로 이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백각의 존재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설마 자네도 이들과 한패인가?”
백각의 말이 떨어지자, 지금까지의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경계심을 낮추지는 않았다.
“전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렇군. 그런데 여기 나타난 시간이 너무나 적절하다고 느껴지지 않나?”
“우연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인간 세상에 이런 말이 있더군. 처음에는 우연일 수 있지만, 그게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는 말.”
지금 백각은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억울하게 오해받을 수는 없었다.
“전 방금까지 백각님이 주신 임무를 처리하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벌써 그 해괴한 것들을 다 물리치고 온 건가?”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될 겁니다.”
난 진실을 말했지만, 백각은 그저 나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땅의 축복 주인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인간은 그놈의 욕심이 문제야. 임무를 해결하면, 물의 정수를 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말을 끝낸 백각에게서 폭발적인 힘이 뿜어져 나왔다.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무릎이 서서히 굽혀졌다.
상대가 스스로 무릎 꿇게 하는 기세.
예전에 겪은 무혁 대장의 기운과 닮았다는 걸 느끼게 되자,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 호흡법을 운용하며, 굽혀져 가는 무릎을 다시 펴고는 백각을 노려봤다.
“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내 말이 고까웠는지, 백각에게서 더욱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칠성검을 꺼낸 후 휘둘렀다.
비기-절단검
오해이기에 백각을 벨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주위에 있는 이 기운을 베어낸다는 생각으로 휘둘렀고, 기운이 갈라지며,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백각이 칠성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세대의 칠성검 주인이었군. 내가 자네를 얕잡아 봤어. 그럼 어디 이것도.”
백각이 주먹을 움켜쥐자, 주위에 있던 기운이 주먹으로 뭉치더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언제 뻗어올지 모르는 권격을 막기 위해 칠성검을 막 들어 올릴 때였다.
땅의 축복이 나와 백각 사이에 나타났다.
[람이시여. 그리고 백각님. 멈추십시오.]
갑작스러운 땅의 축복에 난입이었지만, 칠성검을 중단세로 들어 올리고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게 준비했다.
물론, 백각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기운을 거두지 않았다.
“땅의 축복. 너에게 실망이다. 어찌 저런 자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냐.”
[아닙니다. 지금 백각님께서 오해하고 계시는 겁니다.]
“뭐가 오해라는 거지? 이 신성한 백두산 천지에 저런 더러운 것들을 데려왔는데?”
지금 백각은 고집불통이 되어서 귀를 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로 백각과 싸울 수도 없으니 나 또한 열심히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백각님 아까도 말했지만, 전 인간들을 여기로 데리고 온 적도 없고, 여기에 백각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그럼 내가 저들을 다 죽이자마자 나타난 것이냐?”
“그냥 타이밍이 맞았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백각이 의심의 눈초리로 날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땅의 축복에게 말을 건넸다.
“땅의 축복. 너에게 묻겠다. 저 말이 사실이냐?”
[네 람의 말은 사실입니다. 람께서는 지금까지 백각님이 주신 임무인 일본 규슈지방 요괴들을 처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땅의 축복이 하는 말에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렇게 오해가 풀릴 것 같아서 칠성검을 내려놓을 때였다.
“그래 좋다. 그럼 넌 계속 저 하유신과 있었느냐?”
[아닙니다. 약 3주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땅의 축복아. 떨어져 있는 동안 저 인간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어떻게 보장하지?”
[람은… 다른 인간들과 다릅니다.]
“인간은 언제나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천지의 세례를 요청 드립니다.]
응? 천지의 세례? 들어보기에는 거창해 보이는 그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하는 말이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람을 믿습니다.]
“네 주인이 백치가 될 수도 있다.”
[람을 믿습니다.]
나와 관련된 것인데, 나 빼고 이야기하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고, 백각에게 물어봤자, 대답도 하지 않을 것 같아, 땅의 축복에게 말을 건넸다.
“대체 천지의 세례가 뭔데? 그리고 백치가 된다니?”
[땅의 축복은 람을 믿습니다. 천지의 세례를 훌륭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잖아! 대체 천치의 세례가 뭐냐고!”
[말 그대로입니다. 백두산 천지의 기운으로 몸에 있는 삿된 것들을 씻어 내는 겁니다. 참고로 악인은 세례를 받다가 머릿속의 악한 생각까지 사라져서 백치가 됩니다.]
“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너무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백각이 말을 끊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여기서 죽을 것이냐? 아님, 땅의 축복 말대로 천지의 세례를 치룰 것이냐?”
죽고 싶지도 않고, 세례라는 걸 받고 싶지도 않았다.
“삿된 기운이라는 게 뭔데?”
[악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친구랑 싸우거나, 미워했던 것도?”
[저도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아니. 땅의 축복. 너도 잘 모르면서 나한테 받으라고 하는 거야?”
[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봐온 그 어떤 주인보다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시니까요.]
땅의 축복이 날 믿는 이유는 분명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상한 천지의 세례를 받는 것은 또 달랐다.
“아니야. 그건 땅의 축복. 네가 잘못 본 거야. 나 나빠. 예전에 PC방 가고 싶어서, 엄마 지갑에 손댄 적도 있어. 뭐 걸려서 뒤지게 맞고 다시는 안 그러지만.”
[람이시여. 천지의 세례는 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몸속의 삿대 기운이 사라지고, 선인일수록 더욱 강한 힘이 그 빈자리를 채워줍니다.]
역시 난 세속적인 놈이었다.
아니 강함에 미친놈이라고 봐야겠다.
지금까지 거부하기만 했던 것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설득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쉽게 받아들이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지금까지 참고 있던 백각이 주먹에 모아놨던 기운을 하늘을 향해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앙
천지가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출렁였고, 도도하게 흐르던 구름들이 찢겨나갔다.
오직 한 번의 주먹질로 인해 생겨난 파괴력이었다.
‘내가 저 권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로 저 권격을 막는 방법을 시뮬레이션 돌려봤다.
‘비기-절단검’만이 겨우 열합 정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저기 옆에 쌓여 있는 시체도 되지 못하고,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할 게 뻔했다.
“하겠습니다. 그냥 할게요. 땅의 축복을 믿어야줘.”
이게 바로 격의 차이일까?
반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금 내 주먹질을 보고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고?”
“뭐…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세례라는 걸 진행하기 전에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백각은 말하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전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끝까지 날 믿지 않는 백각을 아주 찰나의 가까운 시간 노려봤다.
그리고는 백각을 스쳐 지나간 후, 죽은 사람들을 살펴봤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익숙한 로브들을 걸치고 있었다.
“마족 숭배자들인 것 같네요.”
“이름부터 불쾌하군.”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 그럼 이제 제가 뭘하면 될까요?”
“모든 옷과 물건을 벗으면 되네.”
“네?!”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니, 대체 천치의 세례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지?
다행히 이번에는 백각이 옷을 벗어야 하는 것에 대해 부연설명 해줬다.
“생명체가 막 태어난 상태. 그 상태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부…부끄럽게 받는 거네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에게만 있는 감정이지.”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내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옷과 장비를 땅의 축복에게 부탁해 보관하게 하고선 백각 앞에 마주 섰다.
“준비됐습니다.”
“진실을 파악할 시간이군.”
백각이 핑거스냅을 하자, 천지의 중심에서 빛이 솟아오르더니 하늘까지 닿았다.
빛에서 강한 인력이 발생했고, 내 몸은 천지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
왕좌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바로 앞에서 진행되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검을 든 사내가, 쌍검을 든 사내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쌍검의 사내는 계속 밀려나다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검을 대검의 사내에게 집어 던졌다.
갑자기 날아온 검에 대검을 든 사내가 급히 검을 쳐냈지만, 어느새 다가온 쌍검의 사내의 검에 복부가 뚫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쌍검의 사내는 그 말을 내뱉은 후, 검을 비틀어서 대검의 사내의 복부를 길게 찢어놨다.
그렇게 대검의 사내가 죽자, 그제야 쌍검의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승자! 아드리안.”
누군가의 외침에 드디어, 아드리안은 떨어진 다른 쌍검을 집어 들었다.
“아드리안은 왕께 무릎을 꿇고, 기어가도록.”
승자에 대한 예후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아드리안은 군말하지 않고 그대로 기어서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자신과 아드리안의 거리가 3m 안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죽엇!!”
아드리안이 쌍검을 빼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지만, 아드리안의 검은 내게 닿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있던 호위병들에 의해 제압된 채 바닥에 엎어졌다.
“승자는 분명 나 조쉬 히라니의 이름으로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왜? 이런 짓을 했지?”
“흥! 더러운 배반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멍청한 거.”
오른손을 뾰족하게 만든 후, 그대로 아드리안의 허벅지에 박아넣었다.
그 상태에서 아드리안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쌍검의 검투사 아드리안은 미라가 되었다.
“그닥 영양가가 있는 놈은 아니었군.”
자신의 한마디에 옆에 있던 신하가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입맛에 맞는 놈으로 고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질 좋은 놈으로 부탁해. 안 그러면 다음 식사는 네가 될 거니까.”
신하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힘들게 대답했다.
“아.알겠습니다.”
다시 왕좌에 앉아 있을 때, 연회실의 문이 열리고는 루이스가 들어왔다.
“조쉬. 잘 지냈나?”
“따분할 뿐이야.”
“그렇군. 그래서 말이야…”
루이스는 곧바로 말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마신 숭배자의 장로들끼리만 하고자 하는 말인걸, 파악하고는 손을 흔들어서 주위를 물렸다.
호위병들과 신하들이 서둘러 연회장 밖으로 나가고, 단둘이 되자,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우리의 때가 오는 건 알고 있지?”
“그때라는 게 대체 언제 오는 건데? 아무리 홀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전설들과 얼굴 마주치는 게 치가 떨리도록 싫어. 거기다가 세계 경제 파탄은 실패했고.”
“걱정하지 말게. 그게 모두 다 시작일 뿐이니. 이제 혼란을 주고자 하는데 말이야. 이참에 인도가 독립하는 건 어떤가?”
“독립?”
구미가 당기기는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독립을 하는 순간 세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앤드류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어. 곧 마왕의 강림이 왔다는 거지. 그런데, 세계가 안정이 되어가서 그러는데, 자네가 인도의 독립으로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주게.”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거군. 내가 그 의견을 들어줄 것 같나?”
“하유신을 자네에게 주겠네.”
13기동 타격대의 정대원은 아니지만, 그들이 아끼는 막내의 기운은 어떤 맛일까 상상하자,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어디 한 번 들어볼까? 독립이라는 걸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