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_돌아간 선배들
매 분기 전설들의 정기회의가 진행된다.
대부분 참석하지 않는 이름뿐인 회의였지만, 간혹 대부분 참석하는 날이 있다.
그때는 교황청에서 마나석을 판매할 때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마나석 판매도 없는데, 긴급회의에 대부분의 전설이 참석했다.
“긴급회의에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오늘 회의는 저 벨라가 의장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 남몰래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반 사람들은 전설들이 라이벌 관계이면서 서로 존중한다고 알고 있었다.
속 사정을 파악하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빠인 리암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13명의 전설 중 유일하게 자신만이 뒤처졌다.
“회의에 앞서, 모험왕들은 역시나 참석하지 않으셨군요. 그리고 로저 시거님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흥! 무식한 용병 따위 무시하고 시작하지.”
평소였다면, 인도의 왕. 조쉬 히라니의 발언에 누군가가 태클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런 분위기도 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로저님께는 제가 차후에 내용을 정리해서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긴급 회의를 진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다.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홀로그램에서도 음침한 로브를 쓰고 있는 에반 히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네 맞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 세계 대통령인 토마스 피어스가 골치를 썩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았는데, 경제 컨트롤도 못 하는 건가?”
“히스터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세계 경제를 표적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지?”
에반 히스터의 질문에 정리해둔 홀로그램 자료를 띄웠다.
“보이시는 것과 같이 현재 이 공격은 마족 숭배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마족 숭배자들은 저번에 다 물리친 거 아니었나?”
분명 긴급회의 전에 크리스에게 서류를 보냈지만, 역시 크리스는 읽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티끌만큼의 잔당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가 몇 달간 싸웠던 적들이 반대로 잔당이었습니다.”
“그럼 벨라. 네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왜 갑자기 무력시위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세계헌터협회의 협회장 아스본의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현재 세계 대통령이 자금을 풀어서 무너져 내려가는 경제를 최대한 붙잡고 있지만, 한시적입니다. 그렇게 무너진 경제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여러분께 요청드립니다. 마족 숭배자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힘을 보태주세요.”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요청하는 것은 하나였다.
전설들의 자금력을 풀어서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달라고.
아무리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크리스라도 충분히 알아먹을 말이었지만, 전설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벨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마왕과 싸웠어. 그런데, 이제야 좀 살만하니까, 가지고 있는 재산까지 뱉어내라고?”
“조쉬 히라니. 말조심하지?”
“리암. 내가 틀린 말 했어?”
“흥. 전쟁 이후에 지금까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편한 삶을 살고 있잖아. 솔직히, 인도의 왕이 되어서 호의호식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부정하지 않지. 그런데 말이야. 그게 나만 그래왔어? 다 그래 왔잖아!”
“그래서 이참에 서로…”
리암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자벨 로메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리암의 말을 막았다.
“우리 수호기사단은 지구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꼭 무력적인 부분만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내 사비를 털고, 유럽 연합을 최대한 설득해서 돕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이자벨 로메.”
“곧 지구가 혼란해지고,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니 그것에 대비해야 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
이자벨 로메는 누구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고, 홀로그램을 끄며, 긴급회의를 나갔다.
“벨라. 저번 마족 숭배자들을 호주에서 모두 쫓아냈더니, 이번 경제 공격도 우리 호주는 조금 상황이 나은 것 같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도울 수 있는 걸 도울게.”
“크리스님께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자벨을 시작으로 전설들이 지원을 약속했고, 오직 한 명 조쉬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인도에서도 돕도록 하지. 그럼 이만.”
조쉬를 끝으로 긴급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전설이 돕겠다는 약속하고 회의는 끝났다.
그나마 급한 불을 끈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홀로그램을 끌 때였다.
몇 명 알지 못 하는 자신의 직통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마리 엘렌시아.
“성녀님이셨군요.”
-그래. 단독직입적으로 말하겠다. 현재 교황청에서 마족들의 하수인인 파수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조쉬 히라니를 조심해. 그가 어떻게 해서든 연루된 것 같으니. 특히, 그의 지원을.
“그게 무슨? 설마…”
최악의 가정인 전설의 배반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럼 이만.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고,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
이제 정말로 부두교의 모든 일을 데리우스에게 넘기고, 일루시안으로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바로 떠날 생각은 없었고, 어색하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매일같이 만찬을 즐겼다.
“그래. 다리우스 언제 떠난다고?”
“막시우스 그건 어제도 물었습니다.”
“다리우스야. 어제는 내가 거하게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
“한 달 정도 있다가 떠나야 하니, 아직도 시간은 많습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외로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데리우스가 돌아왔으니까요.”
팜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던 데리우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막시우스. 예전에도 말했지만, 전 다리우스 대신에 부두교를 이을 생각이 없습니다.”
“데리우스 브로~ 그게 무슨 소리야! 나와 했던 내기가 기억나지 않아?”
“기억에 없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부두교의 염원인 부활까지 성공시킨 다리우스 네가 부두교의 족장으로 더 잘 어울리지.”
“이 자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리우스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할 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보기 좋구나. 역시 다리우스와 데리우스는 싸워야지. 그래야 형제고.”
막시우스의 말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부터 데리우스와는 별것도 아닌 일로 자주 싸웠다.
그렇게 싸운 후에는 막시우스 몰래 알콜이 든 팜 와인을 훔쳐 먹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데리우스의 팜 와인을 훔쳤다.
“내 껄. 왜 손대는 거야!”
“브로~ 한국에 이런 말이 있어. 먼저 먹은 사람이 임자라고.”
“이상한 거나 배워가지고!”
그렇게 가족이 오랜만에 화목하게 수십 년 전의 일상을 즐길 때였다.
집 안으로 둥그렇게 생긴 작은 빛이 들어와서는 내 앞에서 반짝였다.
“응? 너는 정령초구나. 무슨 일이지?”
정령초는 그저 새하얀 빛을 번쩍이던, 작은 종이 하나를 소환하고선 그대로 사라졌다.
종이를 받아든 후, 서둘러 펼쳐보자, 무혁 대장의 필체가 보였다.
[바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연락을 받은 즉시, 일루시안으로 복귀하도록.]
짧은 문장이었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버지. 그리고 데리우스 브로~ 회포는 나중에 다시 풀어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당장 일루시안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돌아올 거야?”
무심한 투로 데리우스가 말을 내뱉었고, 다리우스는 그 안에 따뜻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워낙 유능해서. 떠나기 전에 데리우스. 우리 막내 유신을 부탁할게. 아버지도요.”
“걱정하지 말아라. 유신은 너희들과 달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셋째 아들이니.”
“흥. 내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하지. 그리고 남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이거 원 서러워서…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단 떠나기 전, 일루시안에서도 가족의 정취를 느끼고자, 막시우스와 데리우스의 팜 와인을 챙기고는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했다.
목적지는 라스베이거스였다.
***
오늘도 레이지와 함께 쇼핑을 잔뜩 하고선 교황청으로 돌아왔다.
체력이 약한 레이지는 돌아오자마자, 피곤한지 침대에 곯아떨어졌다.
“운동 좀 시켜야 하나? 아냐!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살게 둬야지. 그래도…건강 생각하면 운동 좀…”
레이지를 찾기 전에는 절대 할 수 없는 고민에 행복함을 느꼈다.
이 행복은 한시적이었지만, 차후 일루시안의 일을 처리하고 오면 당연한 일상이 될 것 같았다.
반짝반짝
오늘 따라 레이지가 빛나 보인다고 느꼈는데, 진짜 빛나고 있었다.
“넌 대장의 정령초잖아.”
말을 알아들었는지 정령초가 반짝이며, 다가와 작은 쪽지를 뱉어내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바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연락을 받은 즉시, 일루시안으로 복귀하도록.]
일루시안으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가기 전에 인사는 해야 하기에 곤히 자고 있는 레이지를 깨웠다.
“레이지. 일어나봐.”
“으응? 왜 무슨 일이야?”
“오빠가 이만 일루시안으로 돌아가야 해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가기까지 아직 한 달 정도 남지 않았어?”
레이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애써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그랬는데, 쉐도우 마스터인 이 오라비가 없어서 그런지 13기동 타격대가 영~ 힘을 못 쓰나 봐. 그러니까 멋지고, 잘생겼으며,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이 오빠가 최대한 빨리 마족들에게서 이계와 지구를 지키고 올게. 그러니까…그러니까…….”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 힘들었다.
감정과 육체를 마음대로 조율하는 경지에 들었지만,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막는 게 수천의 마족에게 포위되어서 벗어나는 것보다 힘들었다.
“오빠. 내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와.”
오빠인 내가 먼저 저 말을 내뱉어야 했는데, 레이지가 손까지 잡으며 말했다.
“대신에 이거 하나만 약속해줘.”
“뭔데?”
“아무리 전투가 힘들고, 피곤해도 시간 날 때마다 잘 씻고, 세끼 다 챙겨 먹어. 알았지?”
“내가…애냐?”
“나 의사 면허증이 있는 사람이야. 사람들의 삶에 질을 올려주는 가장 기본은 청결과 균형 잡힌 식사야.”
“알았어. 그만해.”
“응.”
그래도 약간의 잔소리를 듣다 보니, 감정이 추스러졌고, 전부터 주고 싶었던 것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응? 이게 뭔데?”
“통장과 카드야. 마리가 챙겨줄 테지만, 그래도 자기 돈이 있어야 든든하지.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레이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통장과 카드를 받았다.
“그럼 난 이만 갈게. 그리고, 연애는 자유지만 결혼은 이 오빠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알았어. 대신에 빨리 돌아와야 해.”
“응. 걱정하지 말고, 그동안 아프지 말고. 밥 잘 먹어. 한 그릇 먹지 말고, 두 그릇 먹어.”
전하고 싶었던 것은 모두 전하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멋지게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할 때였다.
“오빠. 잠깐만.”
그래도 하나뿐인 이 오빠가 서운한지 레이지가 불러세웠다.
이때 더 멋지게 떠나야 한다.
“이별이 길수록 더 힘들어. 그러니…”
“뭐래? 이거 가져 가라고.”
“응?”
레이지가 건네준 것은 약 1리터 정도의 물병이었다.
“이게 뭐야?”
“내 정화 능력이 담긴 물이야. 한 컵 정도면 마기에 물든 우물 정도는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오빠에게 도움이 될 거야.”
이런 물은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일루시안에 존재하는 성녀가 혼심을 다해 만든 성수가 이것과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만들 줄 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
“마리 언니는 알아.”
“근데, 아무 말도 없었다고?”
“음…한 달에 한두 병 정도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던데.”
“그래… 그나마 욕심을 부리진 않네… 늦었다. 이제 갔다 올게.”
더는 레이지가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 또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교황청의 이동 게이트로 향하자,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고, 마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레이지를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알았어.”
대답을 끝내고 바로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
천지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맡아지는 건 피비린내였다.
그리고, 한쪽에서 백각이 사람의 시체를 쌓아놓고, 무서운 눈빛을 한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