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_신비석(2)
용병왕 사살에 실패한 후, 곧바로 루이스에게 돌아와, 무릎을 꿇고 얼굴을 조아렸다.
“미천한 앤드류가, 존귀하신 루이스님을 뵙습니다.”
루이스에게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로저를 사살하기 위해 마신 숭배자들도 많은 걸 지원했었다.
“그래. 실패했다고?”
‘실패’라는 단어가 나오자, 몸이 움찔거렸다.
예전 하찮은 용병일 때부터 저 단어가 너무나 거슬렸다.
그렇지만,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아니다. 처음부터 예상하기는 했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들려지려는 것을 인내심을 발휘해 막았다.
그렇다고 의문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미천한 하인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다. 넌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너무나 성급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제 부탁을 들어주신 겁니까?”
“부탁? 설마 용병왕의 친위대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로저 혼자 있게 만든 걸 말한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루이스가 옆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들어서는 그대로 땅에 찍었다.
“우리를 뭐라고 보는 것이냐? 네가 보기에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냐? 우리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아서?”
갑작스러운 화에 앤드류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썩은 눈이 모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껏 조아려서 그럴까? 루이스는 그제야 약간 화가 풀린 투로 입을 열었다.
“알면 됐다. 다시는 우리를 의심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이제 너도 확실히 세계의 미움을 받겠구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용병왕을 처리하고 앞에서는 새로운 용병왕으로 취임한 후, 뒤로는 루이스님을 따르려고 했다.
그렇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듯이 작전은 실패했다.
용병왕이 갑자기 비명횡사하지 않은 이상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용병왕이 교황청으로 들어갔다고?”
“네. 하지만 치료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기가 장기까지 침투한 걸 확인했었습니다.”
“앤드류. 우리의 대업에서 누가 가장 걸림돌인 줄 아느냐?”
당연히 전설들이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루이스님은 그런 흔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대화의 문맥상 지금 나와야 하는 답은 이거였다.
“성녀입니다.”
“성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는 교황청이다. 그들은 우리와 상반되는 힘을 사용하고, 대전쟁 당시 성녀의 힘 때문에 마왕님께서 당하셨지.”
“교황청에서 마기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군요.”
“그렇다. 그러니 더는 용병왕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도록 해라.”
곧바로 답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의 목표는 언제나 용병왕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뜻이 무엇이고,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지만, 기다려라.”
지금까지 참고 기다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이내 가라앉혔다.
“알겠습니다.”
“대신에 그동안 네가 해줄 일이 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대답이 끝나자, 루이스의 그림자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오더니, 자신에게 다가와서는 작은 서류를 내밀었다.
최대한 공손히 그 서류를 받아들자, 루이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거기에 적혀 있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해. 하유신의 목을 가져와라.”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기대하마.”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뒬걸음질 치며 루이스의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나온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곧바로, 서류를 꺼내 읽어 봤다.
“일본 규슈지방? 여기도 우리의 세력권이었다고?”
서류를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마신 숭배자들의 영향력에 놀랐다.
자금력도 자금력이지만, 지구상에 몬스터화된 곳의 대부분이 알고 보면 마신 숭배자의 권역이었다.
“전설들이 왜 몬스터화된 곳을 인류화 시키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예전부터 들었던 의문을 해결하고는 발걸음을 서둘러, 공간이동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이미 준비가 끝났는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만 되시면 바로 출발하실 수 있습니다.”
“준비는 필요 없다. 바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왜? 하유신이 홀로 이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인류의 희망을 짓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뜨며, 게이트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어둡고, 피비린내가 심하게 올라오는 어느 연구실이었다.
연구실의 한쪽 벽면에는 몬스터와 인간의 장기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불쾌한 곳이군.”
“세상을 너무 깨끗하게만 보는군.”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초로의 노인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루이스님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하유신은 어디에 있지?”
노인은 그제야, 하던 작업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그는 피 묻은 장갑을 벗은 후, 내게 악수를 권했다.
“난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이시이 히로다.”
“이시이 히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이름의 주인이 떠올랐다.
“미친 과학자 이시이 히로? 인체실험을 하다가 자신의 실험체에게 죽었다고 들었는데?”
“크크크. 사람들은 그렇게 알지. 그냥 실험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몸을 숨겼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좋아하더군.”
“여기서 그 더러운 짓을 계속하고 있었군.”
“더럽다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을 뿐이야.”
이시이 히로는 무언가 더 설명하려고 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욕지꺼리가 올라 올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난 잡담을 위해 온 게 아니라, 임무 때문에 왔다. 다시 한번 묻겠다. 하유신은 어디에 있지?”
“성질도 급하군. 일단 기다리게. 곧 실험이 완성되니. 실험체들과 함께 가면 될 거야.”
자연스레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무리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하유신을 높게 평가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하유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유신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빨리 그놈이 있는 곳이나 말해라.”
“착각하지 말아라. 이번 임무는 루이스님이 주관하는 것이고, 넌 루이스님이 준비한 여러 개의 검 중 하나일 뿐이다.”
이딴 미친 과학자까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자, 불쾌감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손을 써서 이 자의 살려달라는 비굴한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임무가 끝나면,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해주지.”
“크크크큭. 마음대로 하던가. 일단 일주일만 기다리도록.”
***
불장난하면 밤에 실수한다.
불낸 놈이 성낸다.
옛 어른들은 별의별 이유와 함께 불장난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오늘 해보니 확실히 알게 됐다.
“이렇게 재밌으니까 하지 말라고 했던 거네!”
아람의 도움으로 청염을 가지고 언데드를 태울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재미였다.
언제 이런 불량한 일을 대놓고 할 수 있겠는가?
주변에 있는 모든 나무와 풀을 태우면서 전진하다 보니,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이럴 때는.”
붉은 뿔을 집어넣고, 푸른 뿔을 꺼내서는 냉기를 주변에 뿌렸다.
수증기가 가득 피어올랐을 때, 푸른 뿔에서 칠성검으로 스왑하고는 검을 휘둘러 검풍으로 모든 연기를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자! 그럼 연기도 날아가겠다. 계속해 볼까?”
붉은 뿔로 바꾼 후, 다시 식물을 태워나갔다.
편하기는 했지만, 태우고, 끄고를 반복하는 건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몇 구역만 불태우고 싶었지만, 불이라는 게 내가 원하는 만큼, 딱 지정된 구역만 태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거의 힘 안 들이고 이러는 게 어디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불길한 감각이 뒷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서늘한 감각이어서 재빨리 칠성검을 꺼내서는 사방을 경계할 때였다.
번쩍.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갑자기 내리친 벼락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감전의 고통이 감각을 마비해서일까? 주위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무방비하게 계속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포스를 운용하려고 할 때였다.
포스가 평소보다 움직임이 더뎠다.
‘그실.’
급하게 그레이트 실드를 몸에 두를 때였다.
번쩍.
콰자창!
다시 내리친 뇌전에 그레이트 실드가 허무하게 깨져나갔다.
그나마 약해진 뇌전이 몸을 한 차례 더 공격했지만, 약간의 짜릿함이 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삐이이이이-
그리고, 주위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알게 됐다.
일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움직일 때였다.
소리에 가까워질수록 포스 컨트롤이 점점 힘들어졌다.
정확히는 포스가 잠에 취한 것 같았다.
번쩍. 번쩍.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레이트 실드를 전부 사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앞에는 피리를 불고 있는 붉은 얼굴에 코가 긴 몬스터가 서 있었다.
“저거… 텐구라고 했던가?”
일본 애니멘이션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요괴 텐구.
하지만, 몬스터 대백과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저 몬스터는 인간의 실험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이만 끝내자.”
잠에 취해있는 포스를 일깨워 검기를 만들어서 날렸다.
텐구는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검기에 온몸이 양분될 상황에 처할 때였다.
콰아앙
날카롭게 벼린 수십 개의 에너지체가 내가 날린 검기와 부딪혀서 사라졌다.
에너지체를 날린 곳을 바라보니, 사람만 한 자루를 등에 지고 있는 오니가 내려오고 있었다.
“풍신을 따라 했어. 그럼 번개를 날린 것은 뇌신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쪽에서 북채를 쥐고 있는 뇌신이 나타났다.
그때, 텐구의 피리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겨우 깨어나던 포스가 다시 잠이 들려 했다.
포스를 깨워야 해서, 어금니로 볼살 안을 강하게 깨물었다.
약간의 고통과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고, 상처 때문일까? 잠들려던 포스가 화들짝 놀라며 성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하나는 확실하네. 너희를 만든 놈이 일본 고전을 좋아하는 미X놈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말을 끝내자마자 텐구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저 소리부터 어떻게 해야지 이 전투에서 유리할 것만 같았다.
텐구의 옆에 있던 풍신이 보자기를 열었다.
그러자, 거기서 날카롭게 벼린 바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풍신의 검풍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렇게 재빠르게 텐구의 앞에 도달해서는 검을 휘두를 때였다.
번쩍!
뒤에 있던 뇌신이 어느새 북채를 잡고는 번개를 떨어뜨렸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역시 번개였다.
그나마 포스막으로 전류를 흘러내렸지만, 짧은 시간 몸이 경직됐고, 텐구가 뒤로 몸을 피했다.
“귀찮게 됐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텐구와 뇌신 그리고 풍신의 연계가 좋았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이곳에 심력을 좀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콰차장
하늘에서 세 개의 공간이동 게이트가 열리더니, 마물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마물을 보며 칠성검을 움켜쥐었다.
“이곳이 마족 숭배자 놈들이랑 연관이 있었던 거네. 역시 돌+아이들은 끼리끼리 노는 거였어.”
“그 말은 좀 기분이 나쁘군.”
몬스터와 마물 그리고 요괴가 넘치는 이곳에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들린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리 적이라도 조금은 반가웠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그는 공중형 마물을 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앤드류 시거?”
“시거라는 성은 빼지. 이제 그 성은 버렸으니까.”
“그래? 잘됐네. 널 죽였다고 로저 시거가 슬퍼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거야. 쳐다보니 목 아프니까 이만 내려와. 아니면 내가 직접 내려오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