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먼치킨-210화 (210/300)

210화_백각의 부탁

곧바로 백각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누구인지 기억났다.

“그… 백두산에서 본 사슴뿔을 단 백호?”

[람이시여. 그 뿔은 용각입니다. 그리고 백각님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언제나 내게 극존칭으로 대하는 땅의 축복이 백각을 더 높게 보는 것 같자, 궁금증이 치솟았다.

“백각이라는 호…아니지. 그분은 어떤 분이셔?”

[백각님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땅의 축복에게서 밝은 빛이 솟구치더니, 이내 의사전달을 마무리 지었다.

“위대한 수호자이자, 신이십니다.”

솔직히 땅의 축복이 백각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에 떨떠름했고, 마냥 기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구의 근원이자, 세상을 이루는 원소 중 하나인 땅의 축복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백각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거세졌다.

“좋아. 지금 만나러 가자.”

[람이시여.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중급 마나석 3개를 주시면 바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땅의 축복은 효율이 극악이었다.

***

땅의 축복을 통해 단번에 백두산 천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다시 도착한 천지를 바라보니, 대자연의 풍경에 흠뻑 젖으며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았다.

“와… 좋다…”

“괜히, 옛적 사람들이 이곳을 신성시 여겼던 것이 아니다.”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백각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땅의 축복에 당부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백각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건넸는데도, 백각은 그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눈빛에 마치 내가 벌겨벗겨진 것 같았다.

그렇게 민망한 상황에서 한참 날 바라보던 백각이 한 손을 내밀었다.

‘뭐지? 뭘 달라는 건가? 나한테 맡겨둔 거라도 있나?’

백각은 말없이 계속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람이시여. 백각님께서 손을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손?”

그냥 내 손을 만지기 위해, 달라는 것은 아닐터였다.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백각이 내민 오른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게 뭔가?”

“네? 악수인데요? 이걸 원하시는 아니었나요?”

“크흠…”

백각은 헛기침을 하며 악수를 풀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자네에게 피해는 가지 않을 거니, 잠깐만 참게.”

“네?”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손목을 통해 차가우면서, 따뜻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백각의 손과 내 손목이 하나인 것처럼 달라 붙어버렸다.

당황스러워서 백각을 바라봤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게 됐다.

아름다운 청록색의 눈동자에 정신을 잃었다.

콰콰콰콰콱

얌전히 있던 포스가 빠르게 움직이며, 백각에게 잡혔던 오른손을 통해 쏟아지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알게 됐다.

천지 한가운데에서, 백각의 청록색 기운과 내 포스가 힘겨루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끄응…”

이제 그만 멈추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신음만이 뱉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던 순간.

오른팔에서 고통이 몰려왔다.

포스가 백각의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더욱 발악하면서 오른손이 버티지 못하기 시작했다.

바드드득.

13기동 타격대의 붉은 포션을 먹을 때보다 더 강한 고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위기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백각의 기운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단은 사는 게 먼저야. 어쩔 수 없나?’

흘끔 오른손을 바라봤다.

다행히, 강철인형 수리를 위해, 교황청에 시계를 맡겨놔서 다행이었다.

이제, 오른팔을 자른 후,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교황청으로 돌아가야 한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포스를 거둬라. 그러면 이 고통은 끝날 것이다.”

입 밖으로 신음도 제대로 뱉지 못하는 나와 달리, 백각은 여유가 있는지 말까지 건넸다.

하지만, 그의 요청을 들을 수 없었다.

포스를 거두는 순간,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거둔단 말인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의외로 오른손을 포기한다고 마음 먹자, 머릿속이 한결 차분해졌다.

‘팔꿈치까지 기운이 밀리면, 순간 포스를 폭발시켜서 오른팔과 함께, 저놈에게 타격을 가한 후, 도망치자. 이곳으로 날 인도한 땅의 축복… 저놈도 믿을 수 없어.’

빠르게 생각 정리를 끝내고, 포스를 천천히 팔꿈치로 모으며 기운에 밀리는 척했다.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백각의 비웃음이 눈에 걸렸다.

“자네의 손등을 보게.”

적의 말에 눈을 돌리는 것은 멍청한 방법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갔다.

손등과 손목이 아기 피부처럼 깨끗했다.

반대로 포스와 청록색의 기운이 부딪히는 팔뚝은 피부가 갈라져서 붉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네의 몸은 자네의 기운 때문에 다치고 있을 뿐이야.”

눈으로 확인했지만, 백각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각은 불신 가득한 내 눈빛을 확인했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이었다.

“잠깐 아플 거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청록색의 기운이 재빨리 몸을 덮쳤다.

팔꿈치에 모아놨던, 포스의 기운은 폭발을 일으키기도 전에 흩어졌고, 청록색의 기운은 내 몸을 다 뒤덮었다.

머릿속으로는 고통과 죽음이 떠올랐는데, 몸은 반대로 편안했다.

“어? 사.살아있네…”

“역시 인간은 쉽게 무언가를 믿지 못하는군.”

방금까지 오른팔을 폭발시켜서 도망칠 궁리만 했는데, 그게 무색하게 모든 게 조용히 끝났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땅의 축복이 내게 다가왔다.

[람이시여. 몸은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다가와서 날 걱정하는 땅의 축복을 한 번 째려본 후에 백각을 바라봤다.

“제게 뭘 하신 겁니까?”

“자네의 기운을 확인한 것뿐이네.”

백각의 말만 들어보면,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의 얼굴만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각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얼굴만 내비친 게 아니라, 숟가락이 몇 개고, 밥그릇이 몇 개인지 사람을 낱낱이 확인한 거와 다름없어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다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네요.”

“내가 인간의 기분 하나하나를 맞춰줄 필요는 없다고 보네.”

강자의 여유로운 말이 꽤나 익숙하면서 거슬렸다.

꼭…13기동 타격대의 선배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선배들과 백각이 다른 점이 있었다.

“강하다고 해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마음대로 하면 안 되죠.”

“물론 내가 자네보다 강한 것은 인정하네. 그런데, 자네 또한, 인간 중에서 꽤 강한 편에 속하지 않나?”

“아직 부족할 뿐입니다.”

백각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는 욕심이 많군.”

“욕심은 인간의 본성이죠. 욕심 때문에 이 세계를 주도하는 자가 인간 아니겠습니까?”

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 단어들을 왜 뱉어내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이 감정은 앞에 있는 백각에게 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 욕심 때문에 가이아께 가장 늦게 능력을 얻었으면서 말은 좋군.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자네는 인간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나?”

“네? 아니 그게…”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역시나 백각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리가 없었다.

천지의 물이 우리를 덮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물 속이었다.

사방이 물로 가득한 곳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공기였다.

“끄르륵…”

약간의 물을 들이마셨지만, 최대한 빨리 호흡을 멈추고는 이곳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백각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만 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작은 공기 방울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집채만 해졌다.

거대해진 공기 방울은 위로 떠 오르지 않고, 나를 덮쳤다.

포옹

그리고,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푸하~ 갑자기 이런 곳으로 이동하면 어떻게 합니까?”

“반만 년간 혼자 살다 보니, 인간은 수중 호흡을 못 한다는 걸, 깜박했군.”

“깜박할 게 따로 있으시지. 물귀신이 될 뻔했습니다.”

“엄살이 심하군.”

엄살이라는 말에 발끈하기는 했지만, 더는 화를 내지 못했다.

어느새 눈에 들어온 이 공간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잔잔하게 들어오는 햇빛과 그 빛을 반사시키며 헤엄치는 산천어의 모습에 어느 순간 매혹되었다.

그렇게 한참 이곳을 구경하고 있을 때, 백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정신이 산만하군.”

확실히,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강자는 상대의 속을 벅벅 긁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속을 긁는 존재에게 나 또한 말이 좋게 나가지는 못했다.

“왜 또 시비세요?”

“시비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인간과 다르게 비아냥거리는 걸 하지 못하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무슨 말을 더 해봤자, 내가 손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유신. 앞에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야.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아.’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후, 눈을 떴다.

“땅의 축복에게 간단히 들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고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알고 있네.”

아무리 앞에 있는 존재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감정 소모만 할 수 없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절 다시 보자고 한 이유부터 알 수 있을까요?”

“자네가 인간들을 대표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데, 내 긴히 할 말이 있네.”

“아니, 저 그게 제가 대표라고 하기에는 좀…”

“그럼 인간들을 대표하는 자가 누군가?”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세계대통령. 하지만, 그는 그저 대외적일 뿐이었다.

다음으로는 전설들. 그런데 마리 선배를 제외하고는 대표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13기동 타격대의 선배들과 무혁 대장.

강함으로 따지면 맞지만, 그게 인간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인간들의 대표는 특정 지을 수 없습니다.”

“역시 인간들은 보다 복잡하군.”

갑자기, 자존감이 솟구치면서, 꿀리기 싫어졌다.

치기 어린 마음과 함께 어린아이의 승부욕이 자극됐다.

“하지만, 땅의 축복의 주인이자, 거인들을 대표하는 자라면 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군. 인간이면서 거인들을 대표하는 자. 이해했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인간들의 대표에 준하는 존재에게 전해 주면 되네. 뭐 거인들의 대표인 자네가 직접 처리해도 되고.”

백각은 ‘직접 처리해도 되고’라는 부분에서 날 유심히 바라봤다.

일단 어떤 말을 듣더라도, 마리 선배에게 그대로 전하려고 했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뭘 전하면 될까요?”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더럽혀진 곳을 인간들의 대표가 깨끗하게 치워야 하지 않겠나? 뭐 자네들의 말을 빗대서 말하면 결자해지라고 하던가?”

“그게 무슨 소리세요?”

“말 그대로네. 인간들이 싼 똥을 인간들이 치우라는 소리네.”

“어?”

지금까지 속았다.

인간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처럼 말했으면서 저 표현, 똥에 비유한 저 표현을 알고 있다는 건 현대 인간상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보지 말게. 반만 년간 이곳에서 수련만 하지는 않았다네. 심심하면, 나가서 세상도 둘러봤지.”

속았다는 생각에 화까지 나려고 했지만, 화를 내는 순간 여기에 더 오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일분일초라도 빠르게 이곳을 나가기 위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뱉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세요.”

“속았다고 생각하는군.”

“솔직히, 그 생각이 강합니다.”

“알겠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일본의 규슈 지방이 있네. 그곳을 깨끗이 청소해주게.”

“네? 거긴 몬스터화 된 곳인데요?”

“정확히는 인간이 만든 몬스터들로 인해 문제가 많은 곳이지.”

내가 알던 정보와 많이 다르다는 것에 놀라면서, 귀가 기울어졌다.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네. 그곳은 인간들이 욕심으로 인해, 타차원의 몬스터도 아니라, 지구에서 새롭게 만든 몬스터들이 있는 곳이지. 그런 이질적인 것은 지구를 좀 먹고 있지. 그러니 자네가 인간의 대표로 할 수 있는 자에게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해 달라고 전달해주게.”

“알겠습니다.”

이 사실을 마리 선배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빨리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백각이 품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인간은 희생을 통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네. 이건 물의 정수라는 것으로 땅의 축복과는 다르게 치유의 힘이 강하게 깃들었네. 이걸 인간의 대표가 처리해준다면, 내 기꺼이 내놓는다고 말도 전해주고.”

백각은 확실히 인간을 잘 알았다.

거기다가 내 마음까지 확실히 사로잡았다.

“그 일. 거인들의 대표이자, 인간이기도 한 저 하유신이 대신하겠습니다.”

나는 백각의 양손을 꼬옥 붙잡으며 미소를 지은 채, 욕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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