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_저녁 식사 후
박희선은 오늘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꼭 그런 일이 있지 않나? 평소와 똑같이 일어났는데, 괜시리 기분이 좋고, 기대되는 하루.
물론 사랑스러운 남편의 자는 모습을 보고, 살짝 인상이 찡그려지기는 했다.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네.”
평소처럼 최실장과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과 유민을 깨워 밥을 먹였다.
남편이야 30년 가까이 일했던 직장으로 출근했고, 유민은 다시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장을 차려입고 나왔다.
“어디 가니?”
“아! 오늘부터 저 출근해요?”
“출근? 이렇게 갑자기?”
“네. 아는 선배가 절 스카우트 했어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대학 다닐 때 공부는 하지도 않고, 매번 술만 먹고 다녀서 취업도 못 할 줄 알았던 둘째의 첫 출근일이었다.
부모로서 무심했던 게 반성이 되면서 지금이라도 뭘 해줘야 했다.
일단 지갑에 있는 현금을 몽땅 건네줬다.
“이거 가져가라.”
“응? 웬 돈?”
“남자는 지갑에 현금도 두둑이 있어야 해. 그래야 든든해서 일도 잘하고.”
“오~ 역시 울 엄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찍 와~ 저녁에 취업 축하 파티하게~”
“네~”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던 것은 둘째의 취업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최실장님~”
“네. 사모님.”
“제발 사모님 말고,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
“나이도 고작 15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말을 꺼내놓고선, 참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편합니다.”
“아이고~ 답답해.”
최실장은 언제쯤 우리 가족과 편히 지낼지 고민을 하면서 평소의 루틴대로 약간의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 점심은 밖에서 외식할까요?”
“그럼 다녀오십시오.”
“전 혼자 가서 먹으면 미슐랭 별 3개도 맛없는데…”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최실장과 함께 집 근처 고급 중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그래서 유신이가 어렸을 때…”
“저기 사모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전화가 울립니다.”“응? 우리 첫째 아들이네. 유신이가 웬일이지? 전화를 다 하고?”
역시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이유가 다 있었다.
방금까지 수다를 떨어서 살짝 막힌 목을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응 그래. 네 엄마다. 공무로 인해 바쁘신 중에 어인 일로 전화신가?”
[헤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사 시간 때쯤에 집에 가려고요.]
“그럼.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거니?”
[네~]
“정말 잘됐다. 오늘 네 동생. 출근 첫날이라서, 취업 축하 파티할 건데.”
[잘됐네요. 그런데…]
유신이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부탁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뭔데? 편하게 말해.”
[헤헤~ 엄마 레이지씨 기억하시죠?]
“넌 엄마의 기억력을 어떻게 보는 거니? 레이지는 잘 지내?”
[네. 잘 지내요. 그래서 레이지씨랑 그 오빠이자, 제 선배인 라이언씨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하는데…괜찮을까요?]
언제나 스스로 해나갔던 첫째의 부탁이라고 해서 무언가 거창한 건 줄 알았는데, 고작 손님 초대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높게 평가했지만, 역시나 아직도 아기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
“그래. 파티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그러지 말고 저번에 우리 도와주신…그래 그러니까 이름이 아! 마리라고 했나? 그분도 불러.”
[마리 선배도요? 바쁘실 텐데.]
“유신아 내가 널 그리 키웠니? 못 오더라도, 아무 말도 안 하면 그게 그렇게 서운하다.”
[네. 박희선 여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 좀 거하게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렴.”
전화를 끊자마자, 약간 불어 버린 짜장면이 보였다.
“최실장님. 오늘 유신이가 아는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하네요. 레이지씨와 라이언이라고 그 오빠분이랑요. 아 그리고 유신이한테 마리씨도 초대하라고 했어요.”
“딸꾹.”
“물 좀 드세요. 그리고 바로 장 보러 가요.”
“…알겠습니다.”
평소에 철두철미한 최실장이 왜 갑자기 딸꾹질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인다고 하니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
저녁 식사 시간은 완벽에 가까웠다.
바빠서 거절할 줄 알았던 마리 선배까지 와서 모두가 즐거운 표정으로 식사를 즐겼다.
하지만, 평소에 넉살이 좋은 유민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회사는 어때?”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뭐가 문제가 있는지 유민이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하유민!”
“으응? 불렀어?”
“무슨 일 있어?”
“아냐. 근데 뭐라고 했어?”
“회사 어떠냐고?”
“아! 괜찮아. 좋아. 사람들도 잘해주고.”
무언가 수상한 것 같았지만,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생각했다.
여기서 유민을 더 추궁하면, 즐거운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았다.
“자주 놀러 와요~”
계속될 것 같았던 즐거운 저녁 시간은 어느새 끝이 났다.
“네. 다음에도 초대해 주세요~”
마리 선배의 인사말과 함께 모두 집을 나섰다.
“엄마~ 저는 배웅하고 올게요~”
“그래. 늦지 마.”
“네.”
최실장이 미리 준비해둔 차량에 탑승해서 기동대 훈련장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며칠 휴가 줄 테니까. 쉬었다가 와.”
“어? 세계정부에서 업무 협조 들어왔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미뤄 놓을 테니까. 어머니께 음식 맛있게 잘 먹었다고 전해주고.”
“네. 들어가세요.”
“그래.”
그렇게 마리 선배와 레이지가 공간이동 게이트에 들어가자, 갑자기 게이트가 닫혔다.
“어? 아직 라이언 선배 안 들어갔는데?”
서둘러 전화기를 꺼내 교황청에 연락하려고 할 때, 라이언 선배가 그걸 제지했다.
“내가 닫아 달라고 했어.”
“네? 그게 무슨?”
“너한테 할 말이 있거든.”
평소 중2병스러운 라이언 선배가 무게를 잡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리 선배에게 듣기로는 동생인 레이지를 찾은 후로 그런 말투가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니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뭔데요? 선배?”
“그게…”
라이언 선배가 뭘 말할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본인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찾지 못했던 레이지를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게 뻔했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조금은 창피하다고 느껴지기도 했기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선배. 괜찮아요.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응?”
“레이지씨를 찾은 건 저도 우연이었을 뿐이에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평소의 선배와 다르게 쑥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라이언 선배의 가슴에 있던 무거움을 조금은 덜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함을 느꼈다.
“유신아. 물론 레이지를 구해준 건 고마운데, 내가 지금 할 말은 그게 아니었어.”
“네?”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대체 왜? 그렇게 강해지려고 하냐는 거야?”
제대로 헛다리를 짚었지만, 부끄러움도 잠시였다.
왜 강해지고 싶냐? 너무나 단순하면서 이미 준비된 답변이 있는 질문이었다.
“강해지면, 저도 정식으로 13기동 타격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간혹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강함에 집착하는 것일까?
여러 답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저 이유였다.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욕망.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사람치고 네 목숨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라이언 선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설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라도 쫓기 위해서는 지금도 부족했다.
더 많은 경험과 생사를 오가는 수라장을 거치며, 나를 단련해야 할 때였다.
“마리에게 듣기로는 백만 오크에게 혼자 달려들었고, 스스로가 미끼가 되기도 했다며.”
“아니. 그게 어쩌다 보니…”
“거기다가, 최상급 마정석을 터트려서 죽을 뻔하기까지 했고.”
“헤헤~ 저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런 바보스러운 거짓 웃음은 집어치워.”
속내를 들킨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유신아. 하유신!”
“네…”
“네 목숨을 소중히 해. 네 부모님. 동생 모두 좋은 사람들이잖아. 그들이 슬픔의 젖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보다 미소를 짓게 만들어. 그게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야.”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죽음에게 달려든 이유.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13기동 타격대의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남들은 내가 [노오력가]라는 능력 부여받자, 모두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선배들만이 날 유일하게 믿어주고, 훈련 시켜줬으며, 언제나 당당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선배. 전 말이죠.”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
“전 누가 뭐라고 해도 꼭 선배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가 함께하지 말라고 했어? 넌 우리 13기동 타격대의 막내야.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는 거지.”
“선배…”
막내라는 말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직 무혁 대장에게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마리 선배, 다리우스 선배. 그리고 라이언 선배에게 인정받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감사해요 선배.”
“감사는 무슨.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
“네?”
“잘 들어. 피와 땀과 뼈가 되는 조언이니까.”
가슴 속 깊이 우러나오던 감동이 갑자기 식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움직여. 남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야. 우리가 왜 마왕이랑 싸웠을 것 같아? 희생을 통해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개뿔! 그냥 우리가 살려고 하는 거야. 아 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나네. 야 유신아. 내가 말이야 그때 진짜 다른 이유 아니었다. 막타 치는데, 도움 주고, 좀 빨리 쉬고 싶었다. 그런데, 재수 없게 일루시안으로 끌려가서는 수십 년간 갖은 고생을… 아! 알랑가 모르겠지만, 일루시안과 여기는 시간의 축이 달라. 시간의 축이 뭐냐면…”
감동 뭐지? 먹는 건가?
냠냠. 맛없다.
그래도 새로운 사실은 하나 알았다.
“라이언 선배. 진짜 말 많으시네요.”
“그래서…뭐?”
실수였다.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아니. 저 선배 그게 아니라요.”
“오호~ 우리 유신이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간도 많이 커졌나 봐? 그래.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훈련 좀 할까? 훈련명은 대련.”
“…선배. 라이언 선배. 정말 괜찮아요. 저 저녁 진짜 많이 먹어서 아직도 소화가 안 돼서 움직이면 토할 수도 있어서요. 맛있는 음식 먹고 토하면 아깝잖아요.”
“그렇네.”
“그렇죠? 헤헤~”
평소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내가 라이언 선배의 염원인 여동생 레이지를 찾아준 것 때문에 쉽게 넘어가 주는 것 같았다.
“근데, 유신아.”
“네.”
“난 토할 일 없어. 해도 네가 하는 거지.”
“그…그래도 아깝잖아요.”
“뭔 상관?”
하~ 몇 년 만에 본 선배들을 내가 너무나 띄엄띄엄 봤던 것 같다.
“선배 살려주세요.”
“누가 죽인데? 훈련이야. 훈련.”
***
정말 오랜만에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늘씬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언 선배의 옷깃 하나 건들지 못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안 된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몸은 개운했다.
“끄으응.”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아프지?”
“아닙니다.”
“거짓말 마. 아플 거야. 내가 신무가 아니라서 기혈을 제대로 풀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을 거야.”
“네? 기혈이요?”
몸에 혈액이 제대로 돌지 못하여 뭉친 것을 어혈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혈이 뭉쳤다? 몸 안에 에너지가 뭉쳤다는 뜻인가?
“그러니까 유신이 네 경우에는 포스가 뭉쳤어. 그걸 풀어준 거야.”
“아… 그걸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요.”
“그렇겠지. 몸과 정신을 계속 혹사했을 테니까.”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니긴. 저번에 보니까 무형의 검술을 사용하던데 그건 뭐야?”
무형의 검술?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 비기인 절단검이에요.”
“그래? 근데, 그 기술을 쓰고 나면 머리가 너무 아프지 않아?”
“어떻게 아셨어요? 딱히 선배한테는 아픈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당연하죠.”
“좋아. 그럼 지금부터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