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_릴라와 도미니크(1)
설원의 오크들이 새빨개진 눈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전투에 미친 평범한 오크들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입에서는 개거품을 물고 동공은 풀려 있었다.
“오크들이 단체로 미친 게 아니면…”
다가오는 오크들을 피해 뒤로 한참을 물러났다.
“세뇌라는 건데…”
세뇌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놈들이 생각났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반마족 릴라였다.
마리 선배와 다리우스 선배의 말로는 청염은 마속성에게 상극인 기술이라고 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청염에 당한 상처를 치료하고, 벌써 활동한다?’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 숭배자들이 어떤 요상한 수법을 썼을 수도 있기에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오크들에게 걸린 세뇌부터 깨야 할 때였다.
“후읍~ 크아아아아앙!”
사자후가 산맥을 뒤흔들었다.
콰콰콰쾅
눈사태가 일어나서는 설원의 오크들을 덮쳤다.
그렇게 심한 눈사태가 아니라서 오크들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뇌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크들은 어리둥절했고, 그동안 후미에 있던 오크들이 눈사태에 휘말렸다.
살아남은 오크들은 분노했고, 곧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남은 녀석들은 어쩔 수 없네.”
칠성검을 소환한 후에 검을 움켜잡고는 휘둘렀다.
블레이드 샷!
콰콰콰쾅
포스의 위력에 오크들이 폭발했고, 그렇게 몇 차례 진행하자, 살아남은 오크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오크를 처리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세뇌에 걸렸다. 이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마족 숭배자. 그들이군.”
서둘러 위성전화기를 꺼내 마리 선배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통신음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리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왜? 이번에는 무슨 일인데?]
“제가 무슨 일 있어야 연락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그냥 전화했다는 거야?]
“아니요. 마족 숭배자의 흔적을 찾은 것 같아서요.”
[응?]
나는 아주 자세히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예전에 말했던 릴라의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유신이 네 말은 저번에 본 릴라라는 그 반마족이 러시아에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네. 맞아요.”
[일단 복귀해.]
“아뇨. 오크들의 상태를 보니,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뒤쫓으려고요.”
[너 혼자서? 안 돼. 그건 위험해.]
“제 임무 중에서 언제 안 위험했던 게 있나요?”
[하유신!]
“죄송해요 선배. 이번만 말 좀 안 들을게요.”
[휴우~]
전화기 넘어로 마리 선배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선배는 화가 나지만, 꾹 참을 때 저렇게 한숨을 내뱉고는 했다.
순간 선배가 데리우스를 후려 패던 모습이 생각났다.
오소소 소름이 돌았다.
혹시 나도 말을 안 듣는다고 때릴까? 그렇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살짝 겁이 나기는 했다.
그렇게 이성은 마리 선배의 말을 들으라고 했지만, 본능은 빨리 적들을 뒤쫓으라고 외쳤다.
[알았어. 그럼 적임자를 붙여줄 테니까. 한 시간만 기다려.]
마리 선배로서는 최상의 조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기에 내 의견을 피력했다.
“놓칠 수도 있어요. 일단 GPS를 켜놓을 테니 잘 쫓아와달라고 해주세요.”
[야! 하유신!!]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렸지만, 전화를 끊었다.
마리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아공간에 위성 전화를 집어넣었다.
“죄송합니다. 선배.”
아주 짧게 들리지도 않는 사과를 내뱉고, 아공간에서 GPS 신호장치를 꺼내서 켠 후, 주머니에 넣었다.
“땅의 축복. 나와볼래?”
내 명령에 땅의 축복이 가슴에서 튀어나왔다.
[네. 람이시여.]
“혹시 저번에 봤던 릴라. 그 반마족 기억해?”
[기억합니다. 람께 더러운 저주를 불어넣은…]
“그래. 아주 잘 기억하네. 혹시 여기에 릴라가 있었을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땅의 축복이 바닥에 쌓여 있던 눈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솟아올랐다.
[방금까지 있었습니다.]
“그래? 뒤쫓을 수 있어?”
[옅지만, 대지에서 마족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어서 가능합니다.]
“이동시켜줘.”
[죄송합니다. 어디로 이동했는지 방향은 특정 지을 수 있지만, 정확한 장소는 알지 못합니다.]
“알았어. 이동 방향이라도 알려줘.”
[네. 람이시여.]
땅의 축복은 주위를 뱅글뱅글 돌더니, 이내 몸을 화살표로 바꿨다.
나는 그렇게 땅의 축복이 향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드미트리 예닌은 러시아의 자랑인 얼음술사 부대의 3대대 대장이면서 가장 젊은 나이 축에 속했다.
그래서 다른 대대에서 귀찮해하는 몬스터 이상 현상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건 우리 대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통신병!”
“네. 대장님.”
“아직도 본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나?”
“계속 시도하고는 있지만…”
“제길!!”
최악의 상황이었다.
현재 자신의 대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있었고, 몬스터들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대장님. 대원들이 지쳐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군. 다들 모여라.”
“알겠습니다.”
부관은 자신이 뭘할지 이해했는지 곧바로 명령을 하달했다.
순식간에 모인 대원들을 바라본 후, 오른손을 말아쥐고는 그대로 땅을 내리쳤다.
쿠쿠쿠쿵
자신들이 서 있던 곳에 평평한 얼음이 솟아올랐다.
대원들은 얼음 절벽 끝에 서서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효과만 낼 뿐이었다.
“지친 대원들과 뒤에 있는 대원들이 자리를 바꿔라. 거기 너! 무리하지 말고 빨리 교대해.”
“아.알겠습니다.”
이대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계산해봤다.
아무리 길게 잡고 자신이 최대한의 힘을 쓴다고 해도, 고작 하루 이틀이 최선이었다.
“안 되겠군. 후읍~”
길게 숨을 들이마신 하늘을 향해 냉기 브레스를 발사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얼음 알갱이들이 주위에 휘날리다가 불투명한 반구형의 얼음막을 생성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막았다.
“앞으로 특이사항이 없으면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다. 그동안 식사와 볼일을 최대한 빨리 마치고, 휴식을 취하도록.”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우렁차게 외친 후, 자리에 앉아 배낭에서 식량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때 부관이 조심히 다가와서는 귀엣말을 속삭였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이냐?”
“대장님의 이 기술. 원소력의 절반을 한 번에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차후에 걱정할 일이다. 기운 빠질 소리 할 거면, 너도 빨리 쉬어라.”
부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얼음 벽이 사라지며, 대원들이 잠시 분전해도, 고작 한 번 정도 더 쓸 원소력 밖에 없었다.
그 안에 어떻게 해서든 지원이 와야 했다.
‘나도 이럴 때가 아니지.’
식량 주머니를 열어서 육포를 꺼내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지금은 씹을 힘도 아껴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명상이라도 해서 원소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은 덧없이 지났고,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평소보다 더욱 짧게 느껴졌다.
“모두 전투 준비!”
휴식을 취하거나, 명상하던 대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불투명한 얼음벽이 위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하자,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에에에액!!”
몬스터들이 흥분한 건지, 겁에 질린 건지 모를 소리에 대원들은 모두 긴장했다.
나 또한, 약간은 두렵다 느꼈지만, 대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얼만큼 몬스터들이 몰려있을 줄 모르기에 여차하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서 다시 한번 얼음벽을 생성하려고 준비했다.
“하아, 하악…”
갑자기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멈추고, 누군가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얼음벽이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자, 예상 외의 풍경이 펼쳐졌다.
모든 몬스터가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그 앞에 젊은 동양인 한 명이 숨을 고르고 있었고, 주위로는 강철 인형 9개체가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후읍~ 저요? 전 하유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부터 밝혀야 하지 않나요?”
하유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얼음술사 제 3대대를 맡고 있는 드미트리 예닌입니다. 그런데 어디 소속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저도 실례를 했네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교황청 소속의 하유신입니다.”
그때 부관이 조심히 내 옆으로 와서는 귓속말로 저 청년의 정체를 알려줬다.
“마족 숭배자들을 처리할 때 최선두에 있었던 젊은 영웅이자, 교황청의 검입니다.”
부관의 말에서야 제대로 기억났다.
“이곳에서 교황청의 검을 보게 되다니…”
“교황청의 검이라뇨. 그런 거창한 것은 부담됩니다. 그냥 하유신이라고 불러주세요.”
“생명의 은인에게 그렇게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하유신과 9대의 강철 인형만 있고, 그 외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몬스터들의 사체에서도 다른 인간의 사체는 없었다.
“그런데 혹시 뭐요?”
“아! 혹시 여기에 있는 몬스터를 교황청의 검께서 다 처리하신 겁니까?”
“아휴~ 그런 표현은 부담된다니까요. 뭐 일단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빠서, 먼저 가봐도 될까요?”
“네.네? 어디 가시려는지?”
하유신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그럼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봐요.”
유신은 그 말을 남기고, 북동쪽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사라졌다.
“부관.”
“네. 드미트리 대장님.”
“나는 지금 하유신이라는 사내를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원들의 상태는 어떤가?”
“대장님 덕분에 최상입니다.”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떡인 후, 부대원들을 둘러봤다.
“부대원들은 들어라!”
“네.”
대원들이 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우리의 조국은 누구의 손으로 지켜야 하는가?”
아무리 세계가 대통합을 이루었지만, 우리의 고향과 조국은 러시아였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부대원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입니다!!”
“그럼. 교황청에 조국의 문제를 다 넘길 것이냐? 아니면 직접 해결할 것이냐?”
“직접 해결해야 합니다.”
“죽을 수도 있는데, 따르겠느냐?”
“따르겠습니다.”
단 한 명도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거기다가 모두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자! 러시아의 용사들이여!”
***
러시아의 얼음술사 부대를 구출하고 움직일 때였다.
땅의 축복이 안내하는 곳곳마다 몬스터들이 세뇌에 빠져 있었다.
그냥 지나치거나 세뇌만 풀어도 되지만, 차후에 무슨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에 최대한 빠르게 몬스터들을 물리쳤다.
[람이시여. 근처에 있습니다.]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고 우뚝 멈춰 섰다.
“어디야?”[북동쪽 방향으로 2km정도 가면 나옵니다.]
“길만 알려주고 돌아와 줘.”
[알겠습니다.]
땅의 축복이 방향을 알려준 후, 가슴에 파고들었다.
우선 지금의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새로운 전투 슈트.
부러지지 않는 칠성검.
그레이트 실드를 3번 쓸 수 있는 팔찌
강철 인형을 소환할 수 있는 시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 제약이 있지만, 버프를 줄 수 있는 땅의 축복.
“아람!”
퍼엉
“이 추운 곳으로 날 왜 불렀냐?”
아람까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최근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복수 좀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