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_던지기(1)
유신의 어머니 박희선 여사가 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의 권태로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직장인으로서,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바쁘게 지내왔었다.
하지만, 유신의 권유로 20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쉬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곤혹스러웠다.
“하~”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긴 장면이 나왔지만, 희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 집의 대소사를 봐주는 최실장이 다가왔다.
“사모님.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아니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때 불러주세요.”
“네.”
최실장이 집에 들어온 것은 유신의 추천이었다.
솔직히 희선은 본인이 이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싶었지만, 최실장은 너무나 유능했다.
청소면 청소, 요리면 요리. 그러면서 가족들과는 언제나 적정선을 유지했다.
희선은 사실 최실장과의 적정선을 없애고,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다.
최소한 이 넓은 집에서 말동무라도 되고 싶었지만, 최실장은 언제나 일정 거리에서 다가오지 않아, 그게 서운했다.
띵동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희선이 나가려고 했지만, 언제 인터폰으로 갔는지 최실장이 버튼을 누른 후, 희선을 바라봤다.
“첫째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유신이가 이렇게 빨리요?”
“네. 그런데…”
최실장이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나요?”
“그게 어떤 여성분과 함께 왔습니다.”
“여자요?”
“네.”
“그냥 지나가는 여자가 인터폰에 같이 찍힌 게 아니라요?”
“네. 아닙니다.”
“우리 아들 유신이가 여자를 데려왔다고요? 정말요?”
“네 맞습니다. 사모님. 여성을 데려왔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온 적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유신의 동생 유민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하면 충분히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신은 엄마인 자신이 봐도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아는 여자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유신이 어둠의 성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별일 없었죠?”
유신이 인사하며 희선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이때쯤 희선이 유신을 반갑게 안아줬을 거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다가오는 유신을 희선이 밀쳐내며, 어둠의 성녀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잡았다.
“어서 와요. 아가씨. 우리 유신이랑 어떤 사이에요?”
***
어둠의 성녀는 희선의 스킨십에 놀랐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타락한 권력자들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그들은 정화해주는 자신을 언제나 경멸하듯 쳐다봤다.
희선은 눈빛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달랐다.
하지만, 어둠의 성녀는 희선의 행동에 딱히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좀 특이한 권력자구나.’
이게 어둠의 성녀가 생각하는 전부였다.
그렇게 대답 없이 가만히 있을 때였다.
희선이 어둠의 성녀에 손을 잡고는 이끌었다.
‘이제 곧 마약 중독자들에게 날 데리고 가겠지.’
이끌려서 도착한 곳은 음침한 지하실도 마약 중독자들이 몰려 있는 곳도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거실 소파였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돼?”
어둠의 성녀는 살면서 한국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외국인이었고, 영어야 모국어이기 때문에 능통하지만, 한국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희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희선과 대화하는 유신의 말은 영어로 들려왔다.
“엄마. 적당히 해.”
‘엄마? 부모님이었어?’
“내가 뭘? 근데 둘이 어떤 사이야? 우리 아들 유명해지니까, 국제적으로 아가씨를 만나는구나.”
“그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무슨 사인데?”
“…비즈니스?”
어둠의 성녀 오해는 유신의 비즈니스라는 말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
‘비즈니스. 마약을 사업이라고 생각하다니. 역시 최악이야.’
그렇게 어둠의 성녀가 유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냉랭해졌다.
“에휴~”
희선이 비즈니스라는 말에 아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의 성녀는 희선이 왜 한숨을 내쉬었는지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십 년이 넘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알게 된 게 있었다.
함부로 질문도 하지 말고, 대답도 하지 말 것.
그저, 조용히 있는 게 이 최악의 삶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오빠가 구하러 나타날 것이다.
꼬르륵
어둠의 성녀 배에서 밥 달라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내가 눈치가 없었네. 손님이 오셨는데, 식사 대접도 안 하고. 잠깐만 기다려요. 곧 밥 차려 드릴게요.”
“엄마. 잠깐만.”
희선이 부엌으로 향하려고 하자, 유신이 잠시 불러 세웠다.
“내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신세 좀 질게. 그리고 난 이만 나가봐야 해서요. 최실장님도 잘 부탁해요.”
유신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희선과 최실장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어둠의 성녀는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유신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지금뿐이었다.
‘조금만…아주 조금만 소파의 푹신함을 더 느끼고 싶어.’
어둠의 성녀는 애써 부정했지만, 짧은 시간 이 집의 편안함에 빠져들었다.
***
수십 개의 모니터 앞에서 안경을 쓴 남성이 인상을 팍 쓰며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 쪽에 고이 모셔져 있던 통신구에서 불이 들어왔다.
남성은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나탁스가 도미니크님께 인사드립니다.”-그래. 아나탁스. 잘 지냈느냐?
마족 숭배자들의 중간책이자, 연락책이며, 책사인 도미니크가 아나탁스에게 평범하게 안부를 물었다.
갑자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은 아나탁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이 모든 게 도미니크님 덕분입니다.”
아나탁스의 끝없는 찬사에도 도미니크는 냉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다. 조직의 자금을 책임지는 네가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작전으로 본부의 자금력이 20% 정도 떨어졌다. 아나탁스. 네가 무리를 좀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무리한 요구에도 아나탁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곧바로 대답했다.
그 대답이 대견스러웠는지 도미니크는 아나탁스에게 조금 유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 일 처리하는데, 아무 문제는 없고?
보통 상사가 이렇게 물으면, 부하 직원의 입장에서는 허세를 부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나탁스는 곧바로 현재 생긴 문제에 대해서 도미니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은 어둠의 성녀가 납치되어서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좋다. 내가 바로 인원을 파견해줄 테니, 어둠의 성녀를 회수하도록.
“정말 감사합니다. 도미니크님.”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통신구의 불이 꺼진 것으로 연락은 끊겼다.
어렵지는 않지만,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서 손쉽게 해결을 본 아나탁스의 표정은 약간이지만 풀려 있었다.
그리고, 이내 도미니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만든 인물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한국의 양현도. 그 녀석이 감히 어둠의 성녀를 잃어버리다니,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아나탁스가 책상 위에 있는 호출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열리고 부하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어둠의 성녀를 잃어버린 양현도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내라. 이틀 안에 찾지 못하면, 모든 걸 끝장내 버릴 거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여유 자금은 얼마나 되지?”
아나탁스의 물음에 부하는 아주 잠깐 생각에 빠진 후, 대답했다.
“바로 유동 가능한 금액은 5천만 달러 정도 됩니다.”
“겨우 그 정도? 최소 1억 달러는 필요한데…”
“아시아권과 호주의 사업이 모두 철수 되어서 그렇습니다.”
“호주는 이번에 모든 지부가 날아갔으니 한동안 들어가기 힘들겠어…그래 당장 호주에 있는 현물과 부동산을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아시아는 어떻게 할까요?”
“흠…그곳을 포기하기에는 아까운데…”
부하의 물음에 아나탁스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아시아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곳만큼 쉽게 돈을 벌기가 좋은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지부의 영웅 하유신 때문에 쉽게 생각할 곳이 아니었다.
“아시아는 일단 보류한다.”
“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명령을 전달받은 부하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아나탁스가 안경을 치켜세우며, 다시 불러세웠다.
“그런데, 멕시코는 아직이냐?”
“네. 저희쪽에서 파벌 싸움을 도와주고 있지만, 상대가 경찰과 손을 잡은 후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어쩔 수 없습니다. 상대는 이를 갈던 3천의 영웅입니다.”
“3천의 영웅을 치워 버려야겠어. 본단에서 지원이 오면 절반 정도 멕시코로 보내서 안정화시켜라.”
“감사합니다.”
부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간 후에도 아나탁스의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자금을 한 번에 당기는 방법이 없을까?”
지금이야, 호주에 위치한 지부들을 팔아서 금액을 충당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이었다.
자금은 언제나 부족했고, 최근 여러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자금처를 마련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때였다.
도미니크와 연락한 통신구와 달리, 먼지를 뒤집어쓴 통신구에 불이 들어왔다.
아나탁스는 통신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크크 좋아. 그렇게 수그리라고.”
상대의 말투에 아나탁스의 표정은 구겨졌지만, 말투는 정중함을 유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크크. 요즘 자금이 딸리지?”
“왕이 되셨어도 예전처럼 그런 싼 티 나는 말투를 버리지 못하셨군요.”
“감히 마신 숭배자의 장로인 내게 훈계질이야? 뭐 돈벌레인 너라면 그럴 수도 있지. 크크.”
상대가 계속 귀에 거슬리는 웃음만 짓자, 아나탁스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더이상의 용건이 없으면 끊겠습니다.”
“성질도 급하군. 다시 한번 묻겠네. 정말 자금이 부족하지 않나?”
“괜찮습니다.”
“내가 최소 5억 달러 이상 되는 정보를 주려고 했는데, 아쉽군.”
아나탁스는 상대의 말을 평소라면 허세라 생각하고 무시했을 거였다.
하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도미니크가 친히 자금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급함을 느낀 아나탁스가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돈은 많을수록 좋죠. 어떤 일입니까?”
“크크. 그래. 그래야 돈벌레 아나탁스지.”
“조쉬님. 본론만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쉬.
13인의 전설 중의 한 명이자, 현 인도의 왕이었다.
그가 지금 마족 숭배자들과 연락을 하고 있는 거였다.
“크크. 좋아 원래 정보만 줄 생각이었으니까. 별건 아니고, 이번에 교황청에서 마나석으로 돈 좀 번 것 같더군.”
“이만 끊겠습니다.”
아나탁스는 말을 끝내자마자 통신구의 전원을 꺼버렸다.
조쉬가 알려준 정보는 역시나 필요 없는 정보였다.
다른 곳도 아니라 교황청이었다.
자신들이 가장 위험하다고 느끼는 곳 중 하나였다.
차라리 세계정부를 건들면 건들었지, 교황청은 건들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아나탁스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황청이 마나석을 가지고 있다? 이건 좋은 정보군.’
***
어둠의 성녀를 집에 두고 온 유신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 신평과 용호와 함께 양현도의 집에서 나온 서류를 분류했다.
신평의 눈 밑에 다크써클이 진하게 내려왔을 때쯤 분류를 끝낸 서류를 라이징 길드의 비리 장부와 대조했다.
“이 모든 자료가 모두 사실이라는 거죠?”
유신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용호였다.
“모든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우선 여기 사진 자료를 보시면 국내에서 제조하고 있는 마약 공장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부 다른 곳에 있군요.”
“네. 위성으로 확인해 본 결과 각기 다른 세 곳이었습니다. 여기를 특정 지어서 찾아보면 더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이곳은 4기동대에 넘기도록 하세요.”
“직접 하시는 게 아니고요?”
용호의 물음에 유신이 고개를 끄떡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작 셋뿐이고, 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 없으니까요.”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떠십니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이미 거기에 부탁할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유신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양현도가 다시는 한국에 발붙일 수 없도록 던지기를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