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_마족 숭배자(4)
유신이 가리킨 사체가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지하에 있던 모든 피가 사체에 몰려들었다.
휘이이잉
회오리치며 모여든 피들은 이내, 노인에서 붉은 머리의 건장한 청년이 됐다.
변신을 끝낸 청년이 눈을 뜨고는, 유신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청년의 눈앞에 오러가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청년은 최대한 뒤로 물러나며 회피를 시도했지만, 베이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촤아아악
“크아아악!! 이 비겁한 놈!!”
“비겁은 무슨? 상대가 앞에 있는데, 기다려주는 놈이 어디 있냐?”
상대가 상처 입었을 때, 제대로 치명타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 유신은 쉬지 않고, 공격을 시도했다.
청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상처가 이내 아물었다.
“크아아아악!!”
“재생력은 트롤을 월등히 넘어서지만, 고통까지는 어떻게 못 하는구나.”
“크아아악 죽인다!!”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청년은 분노했지만, 그게 다였다.
“넌 좀 아파야 해.”
유신은 청년을 끝장낼 방법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반인들을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죽인 놈이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너무나 사치스러웠다.
-치칙…치칙…하유신님. 성의 상층부에서 이곳을 통째로 날릴 폭발 마법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 인질을 구출해서 나와야 합니다.
유신은 언제까지라도 청년을 상처 입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화를 가라앉히고, 최대한 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불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검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기회를 노리던 청년은 유신이 검이 느려지자,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툭.
분명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거리를 벌리는 대신에 오른팔을 잃었다.
“넌 대체 뭐냐 말이야!!”
청년의 피어가 터져 나왔지만, 유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다시 한번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다.
스으으윽
천천히 내려간 검은 거리도 거리였지만, 아무런 기운이 맺혀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리쳐진 두 번째 일격이 청년의 가슴과 복부를 길게 찢어놨다.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뭐…뭐야? 왜 회복이…회복이 안 되는 거야!?”
청년의 발악을 유신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검을 눕히고는 천천히 휘둘렀다.
사아아아악
떨어진 목에서는 분수처럼 쉬지 않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유신은 그대로 검을 털어내고는 착검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순간 핑~ 하는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크…”
싸울 때는 몰랐지만, 전투가 끝나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세상이 핑핑 돌고, 온몸이 축축 처졌다.
몸속에 있는 포스를 다 사용해서 탈력감이 드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건 포스의 부족이 아니라, 정신력 소모의 문제였다.
“크…”
유신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잘린 청년의 얼굴을 유신이 보게 됐다.
얼굴만 남은 청년은 아직 죽지 않았고, 유신에게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아직 끝나지 않았지.”
다시 한번 검에 기운을 집중한 유신이 청년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쩌억 갈라진 얼굴에서 수십 명분의 피가 쏟아졌다.
“크….”
검을 휘두르고 나자,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유신은 어지러움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두통이 약간 가시게 됐고, 유신은 눈을 떴다.
“아직 이 검은 완벽하지가 않네. 정신력 소모가 너무 커.”
그때, 귓속에 들어가 있는 무전기에서 말을 걸어왔다.
-치칙…하유신님 납치된 사람들은 찾으셨습니까?
유신은 왼쪽 귀를 살짝 누르며 대답했다.
“모두…죽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폭발까지 한 시간 남았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신을 끝낸 유신은 눈을 감고, 재빨리 귀에 포스를 집중해서 청력을 강화했다.
혹시나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숨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지만, 그 흔한 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뜬 유신은 주위를 둘러봤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모두 지워 버리자.’
칠성검을 꺼내 기운을 집중한 유신이 이곳저곳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실험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있을 때였다.
오러가 책상을 가격하자, 책상 안에 있던 수많은 종이가 나풀거리며 휘날렸다.
저렇게 종이가 많다면, 저 중 하나에는 무언가 정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신은 오러를 거두고는 종이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인체 해부도와 어떤 실험을 했는지, 낙서하듯이 적혀 있었다.
“고블린보다 못난 새끼. 퉤!”
유신은 이미 죽은 청년의 얼굴의 침을 뱉었다.
그리고, 양손에 기운을 집중해 종이를 태워버렸다.
활활 타고 있는 종이 가운데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응?”
불쑥 뜨거운 불을 향해 손을 집어넣어 반짝이는 것을 꺼내려고 했다.
의외로 무게가 나가서 멈칫했지만, 들지 못할 무게도 아니기에 힘을 줘서 들어 올렸다.
그렇게 건진 것은 작은 금고였다.
금고의 한쪽 면에는 ‘블러드’라고 적혀 있었다.
유일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에 일단 아공간에 집어넣고,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치칙…하유신님.
“네.“
-앞으로 30분 후에 폭발 마법이 발동되니, 이만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신은 통신을 끊고는 불타는 연구실을 잠시 바라본 후, 그대로 빠져나왔다.
내려올 때와 다르게 올라갈 때는 유신을 막는 존재가 없어서 손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성에서 나오자, 수백 명의 시체가 있었고, 그들 위에 크리스가 앉아 있었다.
“여~ 유신 늦었어.”
느긋하게 손까지 흔드는 크리스를 보고, 유신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지하에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생존자가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씁쓸함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응. 보고 받았어. 지상도 확인했지만, 문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군. 그럼 폭발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 볼까?”
“네.”
“위험하니 뒤로 빠져 있어.”
“알겠습니다.”
유신은 성문을 밟고 밖으로 나갔다.
안전한 장소에 도착한 후에 성을 바라봤다.
거대화한 크리스가 높게 점프한 후 오른발만 거대하게 만들어서 그대로 성을 짓밟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 소리와 함께 성은 폭삭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 폭발에서 당당히 걸어 나왔다.
보통은 정말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에 크리스는 몸만 멀쩡하고, 옷은 넝마가 되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
“크리스님.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하하하. 나도 나지만 유신이 자네가 더 시급한 것 같은데?”
“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돌아갈 건가?”
그제야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유신이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까부터 씻고 싶기는 했습니다.”
“하하하.”
크리스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작전은 마무리되었다.
유신은 이곳을 떠나기 전, 잠시 무너져서 활활 타는 성을 바라보며 짧게 묵념했다.
‘죄 없는 영혼들이여. 이제라도 편안히 쉬시길.’
***
도미니크.
그는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마족 숭배자들의 중간 연락책이자, 책사였다.
지금까지 그의 작전은 언제나 통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 해방단에서 너무나 일을 크게 벌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너무 심각해.”
도미니크는 솔직하게 세계와 크게 한판 붙고 싶었다.
이기고 지는 건 그에게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혼란.
그게 도미니크가 원하는 결과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오우거의 입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끼이이익
도미니크가 있는 서재의 문이 열렸다.
부하들이 자신의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도미니크는 기가 차고, 화가 났다.
고개를 돌려 들어온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무릎부터 꿇었다.
“릴라님을 뵙습니다.”
도미니크의 상사이자, 구원자.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릴라의 모습이 익숙했다.
“칼 제라니는 어떠셨습니까?”
그렇다.
짐, 맥켈리와 함께 유신에게 목숨을 구함받은, 캐나다의 루키 릴라였다.
“유쾌한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야.”
“알겠습니다. 곧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칼 제라니를 처리하겠다는 말에 릴라는 그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푹신함을 넘어서 안락함까지 안겨주는 도미니크의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도미니크?”
“네. 릴라님.”
“지금 상황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도미니크의 모습은 오늘로써 사라지는 거였다.
예전이라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을 거다.
최근 도미니크는 너무나 많은 작전을 실패해서 릴라에게 실망감만 안겨줬다.
그래서 이건 질문이나, 의견이라기보다는 시험이었다.
도미니크는 일단 속으로 침을 삼킨 후 대답했다.
“우선 능력 해방단의 단장을 버리려고 합니다.”
“마인드 컨트롤은 아까운 능력인데? 뭐…좋아. 네가 하는 말이니. 그래서?”
“허락해 주신다면, 그를 마신 숭배자의 간택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간택자.
마족들에게 몸을 빙의시켜서 대단한 힘을 얻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누구나 간택자가 될 수는 없다.
“그 녀석의 몸으로는 아무리 잘해봐야. 하급 마족이 한계인데? 그걸로 어떻게 막겠다는 거지?”
“그걸 노리려는 겁니다. 하급 마족 빙의로 끝이 나면 얼마 못 가 전설이나 영웅들에게 찢겨나갈 겁니다. 그렇게 적들에게 우리가 약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군주님들이 움직이기 편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릴라가 인상을 찡그렸고, 도미니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솟아났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가 저들에게 한 번 져줘야 한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이건 모두 대의를 위한 겁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방심을 얻으면서 시간까지 벌 수 있습니다.”
“알아. 이 모든 게, 안드로말리우스님의 간택을 받은 놈이 일만 똑바로 했다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텐데… 좋아. 진행해.”
허락이 떨어지자, 도미니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릴라의 허락을 구해야 할 게 남았다.
“릴라님. 제이미 레스넌을 죽이는 데 방해한 하유신이라는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하유신이라는 말에 릴라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긴. 칼 제라니를 죽이기로 했으니, 그가 원래 하기로 했던 대역을 하유신에게 맡겨야지. 그를 영웅으로 만드렴. 그리고 무르익었을 때 제물로 바치는 거야.”
도미니크의 입장에서는 작전을 방해하는 칼 제라니와 하유신을 같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흥분하면서까지 말하는 릴라의 모습을 보니, 칼 제라니를 장난감으로 쓰기도 전에 하유신으로 바뀐 걸 확신했다.
그녀의 장난감은 절대 건들면 안 되기에 도미니크는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차크라 능력자인 도미니크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릴라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미니크. 블러드에게서 아직 연락이 없니?”
“네. 크리스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흠…크리스에게? 분명 블러드와 크리스는 상극일 텐데?”
“무언가 수를 썼던가, 같이 움직인 하유신이 변수로 활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유신…점점 마음에 들어.”
몽환적인 표정이 된 릴라가 갑자기 매서운 눈매로 도미니크를 불렀다.
“도미니크.”
“네. 릴라님.”
“이번에는 아끼지 말고, 네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작전을 성공시켜야 할 거야.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알지? 난 언제까지 네 실패를 감싸줄 수 없다는 걸 기억해.”
“…알겠습니다.”
“그럼.”
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미니크의 서재를 나섰다.
도미니크는 자신의 작전을 방해한 하유신도 칼 제라니도 증오스러웠고, 그들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
하지만, 하유신은 릴라가 찍은 장난감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화를 꾹꾹 눌어서 칼 제라니에게 쏟아내려고, 마음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단 한 번의 핑거스냅으로 대부분의 통신구에 불이 들어왔고, 도미니크가 짜증을 참아내며 명령을 내렸다.
“모든 인원은 지금 당장 칼 제라니를 죽여라. 그가 다친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수단과 방법 그 어떤 것도 가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