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_전설들의 정기회의
아스본과 유신의 전투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제이미와 소피는 한국 헌터 지부에서 제공해 준 숙소에서 나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가지 못했다.
또, 언제 테러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아스본이 그녀들의 외출을 자제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이미는 침대에 앉아 유신이 선물해 준 실타래 엿을 멍하니 바라봤다.
똑똑
제이미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노크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똑똑
뒤늦게 제이미가 노크 소리를 들었지만,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문을 바라봤다.
“제이미. 일어났어?”
소피의 목소리에 제이미는 그제야 반응했다.
“응.”
“들어갈게.”
아직 제이미가 승낙하지 않았지만, 소피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피가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제이미는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뭐해?”
“생각.”
소피는 잠시 말없이 자신의 벗을 바라봤다.
제이미의 기분을 모르지는 않았다.
유신은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에 벌써 전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털털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까지 랭커라고 콧대가 높았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경우에는 마법사이기에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제이미는 유신과 같은 검사였다.
어제와 다름없이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제이미를 보고 소피는 걱정됐다.
“밥 먹자.”
“…생각할 게 있어서, 먼저 먹어.”
“어제오늘 한 끼도 안 먹은 거 알고 있어? 그러다 몸 상해.”
그제야 제이미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피는 이때라 생각하고는 제이미를 이끌어서 잘 차려진 식탁에 앉혔다.
제이미는 식탁에서도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치미까지 느껴지는 그 모습에 소피는 한숨을 내쉬고는 포크를 들 때였다.
“유신은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제이미의 말에 포크를 들던 소피가 멈칫했다.
어제 분명 아스본에게서 유신이 강한 이유를 같이 들었다.
하지만, 제이미에게는 부족한 설명이었던 것 같았다.
“제이미. 유신은 13기동 타격대의 소속이라잖아. 지구를 수호하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존재들.”
“아무리 아빠가 한 말이라지만, 믿을 수 없는 소리야. 세상에 13기동 타격대라는 명칭도 처음 듣고, 일루시안이라는 이계가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어. 그리고 아무리 13기동 타격대라고 해도, 유신과 우리의 시간 축은 같아. 같은 시간대에 머물면서 그렇게 강하다고?”
조용히 제이미의 말을 경청하던 소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재능의 차이, 능력의 차이겠지.”
“재능과 능력이 모든 걸 뒷받침해줄까?”
“물론 그만큼 노력도 했겠지.”
“그래. 그 정도면 죽을 고비를 수십 수백 번은 넘겼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안가.”
“제이미. 아무리 그래도 설마 수십 수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
소피의 부정에 제이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피. 설마 유신이 포스 능력인 걸 몰랐던 거야?”
“…응? 정말?”
“응. 정말.”
소피는 사실 유신이 포스 능력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이 애써 유신이 노력으로 강해진 것보다는 재능과 능력으로 강해졌다고 위안 삼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미의 말을 듣고, 이내 그 사실을 다시 자각했다.
“후…”
한국에 와서 한숨만 늘었다고 생각한 소피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우선 밥이나 먹자.”
“그런데, 말이야.”
“응? 또 왜?”
“유신은 뭘 좋아할까?”
“응? 그게 왜 궁금한데?”
소피의 물음에 제이미는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냥….”
“그냥?”
“응. 그냥 궁금해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취미가 뭔지.”
“그게 그냥 궁금해할 건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소피의 얼굴을 마주한 제이미는 조심히 포크를 들었다.
“소피. 너니까 말하는 거야. 그냥 하유신이 궁금해.”
말을 끝낸 제이미의 볼에 홍조가 일어났다.
자신의 오랜 벗과 지내오면서 처음 이 모습을 본 소피는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너 하유신 좋아해?”
“……응.”
예상은 했지만, 제이미에게 확답을 듣게 되자, 소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
마리가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거검을 짊어진 아스본이 무작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 마리. 오랜만이군.”
반갑게 인사하는 아스본의 모습에 마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스본은 예전에는 마리의 저 모습을 보면, 당황하거나,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 자신도 세계헌터협회의 협회장으로 꽤 오랜 기간 있었기에,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뭐야? 성녀가 원하는 데로 내가 직접 여기에 왔는데, 하나도 안 반가워?”
“…한국에서는 거하게 일을 저질렀더군.”
“응? 아! 그 애송이 녀석 말이야?”
“애송이라…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나랑 한 판 붙어 보자는 거야?”
“참아줘. 그건 사양할게.”
“아스본 레스넌. 잘 들어. 아무리 부족해도 유신은 13기동 타격대의 대원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래서 죽이지 않았잖아.”
“흥! 죽일 수 없었겠지.”
마리의 비아냥에 아스본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13기동 타격대 너무한 거 아니야? 그렇게 아낀다는 막내한테 그런 쓰레기 같은 무기나 쥐어주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본질을 흐리지 마.”
“본질을 흐리다니, 너무 섭한데.”
아무리 아스본이 다른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해도 마리는 그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눈빛을 견디던 아스본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됐다. 됐어. 내가 미안해. 그리고, 그 녀석 치료비와 정신적 보상까지 확실히 계산해 줄게. 거기다가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은 아니지만, 칠성검의 주인으로 채택시키고 싶어. 어때 이 정도면 됐지?”
하지만, 마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기가 질린 아스본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대체 어디까지 원하는 건데?”
“……”
“말이라도 좀 하지?”
“……”
“후우~ 마지막이다. 원하는 게 뭔데?”
아스본의 재촉에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마리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지지.”
“응?”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까지 후벼 파던 아스본이 다시 마리를 바라보면 되물었다.
“지지?”
“그래. 당신의 지지를 원해. 13기동 타격대가 더욱 원활히 움직일 수 있게.”
자신이 아무리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줄 것 같았지만, 마리의 요구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마리가 의문을 표했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
“쉬운 건 아니지. 그리고 13기동 타격대 막내를 조금 과격하게 교육 시켜준 거 치고는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누가 그냥 해달래?”
마리는 서랍에서 손바닥만 한 함을 꺼내 아스본 앞에 놔뒀다.
“이거면 차고, 넘칠 것 같은데?”
“대체 뭔데 그래?”
“직접 열어봐.”
아스본은 마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한 병의 성수와 한 병의 포션이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아스본은 서둘러 뚜껑을 다시 닫았다.
“이 정도면 정말 차고, 넘치는군.”
“그럼 이번 정기회의 때 부탁해.”
“나도 귀가 있는 사람이야.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알고 있어.”
“그런 사람이…캔 브레이커가 타락할 때까지 가만뒀어?”
“그건 캔의 선택이지. 부하들의 선택까지 일일이 간섭할 생각은 없어.”
“아스본. 잘 들어.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어.”
“그 선택지도 그렇게 나쁘지 않지.”
순간 집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 한 아스본은 마리가 준 상자를 챙겨서는 집무실을 나섰다.
아스본은 문을 나서기 직전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마리. 오해는 하지 마. 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야. 하하하. 회의 때 보자고.”
세계헌터협회장이자, 카피 마스터 아스본의 웃음이 교황청에 울려 퍼졌다.
***
13인의 전설 정기회의.
홀로그램을 통해 지구의 전설들이 속속 도착했다.
교황청의 마리.
세계헌터협회의 아스본 레스넌
중국의 노사.
수호기사단의 이자벨 로메.
미국의 불의 용사 리암, 물의 여신 베라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회의 시간이 다가올 때쯤이었다.
지이이잉
홀로그램이 생성되는 소리와 함께 언제나 음침한 로브를 두르고 있는 다크 연합의 수장 에반 히스터가 나타났다.
“크크크.”
오자마자 듣기 싫은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용병왕 로저 시거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로저는 나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인도의 왕 조쉬 히라니까지 나타났다.
“허허. 모험왕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모인 것은 또 처음이군.”
노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그때 마리의 홀로그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반갑게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자리에 앉은 전설들을 둘러본 마리가 이내 목을 가다듬었다.
“첫 번째 안건은 13기동 타격대의 물자 이송 건과 지구에서의 제재 완화 건이야.”
“지지한다!”
아스본은 마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당하게 지지 선언을 선포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전설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뭐가 잘못됐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지 아스본은 오히려 더 당당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스본. 마리가 뭘 말할 줄 알고 지지한다는 거야?”
“조쉬. 내가 그것까지 궁금해해야 해?”
“네가 천방지축인 로저 시거도 아니면서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는걸?”
인도의 왕, 조쉬 히라니의 말에 용병왕 로저 시거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조쉬 많이 컷군. 내 앞에서 내 욕을 할 줄이야.”
“흥! 용병 나부랭이가 뭐라는 거야?”
조쉬와 로저는 홀로그램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주먹 다툼만 없을 뿐이지,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에게 추앙과 존경을 받는 이들의 또 다른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낸 아스본을 바라봤다.
아스본은 마리와 눈이 마주치자, 모르쇠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회의는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마리의 인내심에 한계가 오려고 할 때였다.
쾅
수호기사단의 단장 이자벨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고, 전설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다들 체면과 위신은 어디다 팔고 어린 학생처럼 구는 겁니까?”
이자벨의 말에 다시 한번 조쉬와 로저가 발끈하려고 할 때였다.
음침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크크크. 누가 우리 보고 마왕과 싸웠던 사람으로 알까?”
“에반. 닥쳐!”
“로저. 난 너에게 볼일 없다. 마리. 아니 성녀에게만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회의에 참석했지. 성녀. 너에게 마나석이 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에반의 목소리에 마리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누구한테 들었지?”
“누구한테 듣긴. 대충 알고 있을 텐데?”
마리는 여기서 마나석에 대해서 잡아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석은 마정석과 다르게 시중에 함부로 풀 수 없기에 조심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맞아. 마나석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마리가 긍정을 표하자마자, 에반이 미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마나석을 넘겨라. 그럼 나 또한 네 의견에 지지해주도록 하지.”
“에반!”
“그게 무슨 소리야?!”
마나석이라는 말에 다른 전설들의 눈에 욕심이 피어올랐다.
마리는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에반을 노려봤다.
그렇게 그들의 대치에 다른 전설들은 마리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입을 여는 순간 마리에게 찍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나석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넘기고 말게 아니야. 교황청에서는 그저 마나석의 대리 판매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좋아. 그 모든 걸 내가 사지.”
“에반!”
“네 녀석 멋대로 마나석을 독점하겠다는 거냐?”
에반이 한마디에 다른 전설들이 들고 일어설 때였다.
느긋한 표정과 음침한 말투를 유지하며 에반이 말을 이었다.
“독점이라니? 난 그저 거래하려고 할 뿐이야. 어떤가 마리. 다크 연합이 지지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군. 하지만, 다크 연합이 지불할 돈은 있을까?”“그게 무슨 소리지?”
“최상급 마나석 1개, 상급 마나석 327개, 중급 마나석 2,082개, 하급 이하는 무게만 1t이 넘게 있어. 전부 구매하려면 다크 연합에서는 허리가 휠텐데?”
교황청이 판매하겠다는 마나석의 규모를 들은 모든 전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양이 너무나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