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_제이미 레스넌(2)
아스본 레스넌.
13인의 전설이자, 세계 헌터 협회 협회장으로, 한 번 본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어서 카피 마스터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 아스본 레스넌에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제이미 레스넌이다.
제이미 레스넌은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어린 나이에 랭커에 오른 존재였다.
특히, 검과 채찍이 합쳐진 사복검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여기가 한국이라고?”
에메랄드색 머리카락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 제이미가 한국 땅을 밟은 첫마디였다.
보통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 입국하게 되면,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하지만, 제이미가 입국한 것은 한국 헌터 협회에서도 최상위층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제이미. 모자 써.”
“소피. 그건 답답해.”
“하지만, 우리는 아스본 레스넌님의 명으로 비밀리에 입국했잖아.”
“지금 나한테 우리 아빠로 협박하는 거야?”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제이미가 소피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소피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떡였다.
“응. 맞아.”
“아~ 소피는 너무 재미없어.”
“여기 모자.”
“쳇~”
야구 모자를 건네받은 제이미가 모자를 썼다.
그러자 놀랍게도 제이미의 머리카락이 짧아졌고, 에메랄드처럼 빛나던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가 됐다.
거기만 변해도 놀라운데, 제이미의 얼굴이 점점 중성적으로 변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이 모습은 싫은데.”
“어쩔 수 없어. 제이미의 얼굴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걸. 그럼 지금 바로 한국 헌터 협회로 이동할게.”
“아니 잠깐만. 그 전에 갈 곳이 있어.”
“응?”
소피는 어렸을 적부터 제이미와 함께 지내왔다.
거기다가 이번 한국행의 비밀 업무도 소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서 살짝 놀랐다.
놀란 소피를 뒤로 하고 제이미가 말을 꺼냈다.
“괜히, 하루 일찍 온 줄 알아? 여기까지 왔는데, 관광해야지.”
제이미의 말에 소피는 기운 빠진 표정을 짓고는 할 수 없이 대답을 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그녀들이 입국장을 막 나설 때였다.
그들 앞으로 유신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유신이라고 합니다.”
유신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제이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예쁜 건 알아가지고, 저흰 그쪽에 관심도 없고, 바빠요.”
“아…그렇군요. 그럼 혹시 제이미씨와 소피씨인가요?”
말이 끝나자, 소피가 제이미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당신 누구지?”
소피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한 번 의심을 시작하자,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입국하는 정보가 어디서 샜지?’
그렇게 소피가 긴장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유신이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소피는 유신이 흉기를 꺼낸다는 생각에 마법을 발동하려고 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흥! 손이나 빼고 말하시지?”
“아주 천천히 뺄게요.”
자신이 말한 그대로 유신은 아주 천천히 코트 안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총이나 검이 아니라, 밀랍으로 봉해진 편지와 신분증이었다.
“받으세요. 읽어보시면 제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유신의 말에도 소피는 경계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미는 소피의 조심성이 답답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제이미는 소피를 피해 유신에게 다가갔다.
“제이미. 조심해!”
“괜찮아. 그렇게 하나하나 의심하는 것도 병이야.”
제이미는 유신에게 편지와 신분증을 빼앗듯 가져간 후, 재빨리 편지를 펼쳐봤다.
순식간에 편지를 읽은 제이미는 신분증과 유신을 비교한 후에, 편지는 소피에게 건네주고, 신분증은 유신에게 돌려줬다.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교황청의 정보력이 예상외로 높네요.”
“정보의 시대잖아요. 교황청이라고 해서 정보에 뒤처지면 안 되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얄밉네요. 그럼 한국에 있는 동안 잘 부탁해요.”
제이미가 악수를 권하자, 유신이 그 손을 맞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관광부터 할까요?”
“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우선 한국의 전통이요.”
***
인사동의 16,384가닥의 실타래 엿은 이백 년 가까이 인사동을 지켜 온 명물이다.
다른 가게가 사라지고 없어질 때도 인사동의 실타래 엿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오~ 이거 너튜브에서 봤었는데, 진짜로 파는 거였네.”
제이미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유신은 그런 제이미를 위해 가게 앞에서 멋지게 카드를 꺼냈다.
“종류별로 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게 직원은 주문받자마자 계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엿을 꺼내 들더니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종업원의 멘트가 끝나자, 두꺼운 엿은 어느새 실타래처럼 얇게 바뀌었고, 먹기 좋게 고치 모양이 됐다.
“와~ 이거 진짜 달다! 소피 너도 하나 먹어봐.”
“괜찮아.”
“왜? 너도 단 거 좋아하잖아.”
거절했던 소피의 눈은 실타래 엿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신은 그런 소피를 위해 옆에서 같이 권했다.
“드셔보세요. 이거 맛있어요.”
“음식에 뭘 넣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뭘 걱정하는지 파악한 유신은 제이미가 들고 있는 실타래 엿 중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이건 용수염 또는 꿀타래, 실타래로 부르기도 하고요. 과거 한국이 조선이라 불리고 왕이 국가를 다스릴 때 왕의 간식이었습니다.”
“와~ 그럼 이거 귀한거였네요.”
리액션이 좋은 제이미의 모습에 유신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돈만 있으면 쉽게 먹을 수 있죠. 그리고 소피씨.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라고. 설마 왕이 먹던 음식에 제가 장난쳤을까 봐요?”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소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타래 엿을 거부했다.
“뭐, 싫다는 사람한테 계속 권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유신은 실타래 엿이 들어 있는 케이스의 뚜껑을 닫고는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소피가 아주 잠깐 아쉬운 눈빛을 보냈지만, 유신은 모르쇠를 연기했다.
“자 그럼. 제이미 또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제이미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긴 어디예요?”
“아. 저긴 조선시대 왕이 기거했던 궁궐로, 이름은 경복궁입니다.”
“혹시 들어갈 수 있나요?”
“가능하죠. 지금은 관광지거든요. 거기다가 저 옆에서는 한복도 빌려주니까 그걸로 갈아입으셔도 좋아요.”
“가봐요. 가봐요.”
“네.”
아이처럼 행복하게 웃으며 재촉하는 제이미의 모습을 보고 유신은 제이미가 언론에 비춰진 모습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언론에서는 제이미가 고압적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오늘 상대해본 제이미는 마냥 모든 게 행복한 해맑은 아이 같았다.
그렇게 그들이 인사동에서 경복궁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소피가 제이미를 붙잡고는 마법을 사용했다.
“실드!”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자마자, 경복궁과 광화문을 잇는 교차로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평일 낮에도 교통이 혼잡한 경복궁 앞 교차로는 폭발로 인해 아비규환이 됐다.
그때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잿빛의 로브를 쓴 인물들이 제이미와 소피에게 다가왔다.
“타켓을 확보하도록.”
로브인들이 제이미와 소피에게 다가갈 때였다.
쇄애애액
푸욱
바람을 가르며 나타난 사복검이 앞에 있던 복면인을 꿰뚫었다.
사복검은 그 상태에서 춤을 추듯 움직여서는 주위에 있던 로브인들을 베어내며 상처 입혔다.
하지만, 로브인들의 경지도 만만치 않아서 이내 사복검을 제지했다.
카캉카앙
검과 창 그리고 마법에 막힌 사복검은 이내 다시 줄어들어 제이미에게 돌아갔다.
그에 맞춰 소피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익스플로전!”
콰콰쾅
폭발 마법이 로브인들의 기세를 꺾고, 그들이 뭉치지 못하게 견제하는 사이 다시 사복검이 늘어났다.
그렇게 소피가 견제와 방어를 담당하고, 제이미가 공격하자, 잿빛의 로브인들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카카캉
사복검을 튕겨낸 건틀릿을 찬 사내가 갑자기 크게 외쳤다.
“다른 팀은 왜 가만히 있어?!”
“그러니까 서둘지 말고 천천히 움직이자니까. 왜 그렇게 서둘러서 피해를 만들어?”
제이미와 소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바라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쌍검을 든 잿빛의 로브인 스무 명이 그들의 뒤에 있었다.
“언제 한국 지부에서 올지 모르니 서둘러 저 두 계집을 제압해야 한다.”
“성동격서 몰라? 그래서 다른 데에 빌런 놈들을 풀었잖아.”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믿는 건 아니겠지?”
“뭐 그건 나도 인정하지만, 우리 마법사한테 시간을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은데? 애들아.”
쌍검을 든 사내의 외침에 뒤에 있던 로브인들이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다.
제이미는 아직 영창이 끝나지 않은 소피를 바라본 후, 사복검을 더욱 길게 풀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채찍처럼 휘둘렀다.
촤아아악
카카캉
푸욱
앞서 달리던 사내가 사복검을 막았지만, 휘어서 들어오는 검 끝에 목이 꿰뚫려서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상대는 동료가 옆에서 죽어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들 뿐이었다.
그 모습에 제이미는 이를 악물며,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짧았던 머리카락은 길어지며, 원래의 제이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몰아치는 벚꽃.”
원상태로 돌아온 제이미가 어깨를 흔들며 외치자, 사복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복검이 원형을 그리며 적들에게 쏘아졌다.
피피핏
한차례 사복검이 적들을 스치고 지나가자, 곧바로 로브인들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어나는 튤립.”
빠르게 회수된 사복검이 이번에는 둥글게 뭉치더니, 활짝 펼쳐지며 적들에게 치명상을 가했다.
그렇게 단 두수 만에 절반 이상이 치명상을 당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때 영창을 끝낸 소피가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다중 체인 라이트닝!”
소피의 전후좌우에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으갸갸갸걋.”
뇌전에 감전된 적들은 이상한 소리를 내뱉더니, 온몸에 연기를 피우며 풀썩 쓰러졌다.
이내 교차로에 서 있는 사람은 제이미와 소피 그리고 건틀릿을 낀 사내와 쌍검의 사내 단 넷뿐이었다.
“고작, 그 실력으로 우리에게 덤비다니.”
제이미의 말에 건틀린 낀 사내가 주먹을 부딪히며 말했다.
쾅쾅
“뭣들 하는 거냐? 일어나라.”
“흥! 시체들에게 일어나라니, 네크로맨서도 아니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상대에게 말하던 제이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쓰러뜨렸던 잿빛의 로브인들의 몸을 삐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작 그딴 공격에 당할 우리 애들이 아니지. 그럼 다시 시작할까?”
다시 살아난 잿빛의 로브인들은 무기를 들고, 다시 제이미와 소피에게 달려들었다.
***
경복궁 앞 교차로의 폭발은 유신도 눈치챘다.
그래서 서둘러 포스 막을 일으키고는 그레이트 실드를 제이미와 소피에게 사용했다.
서둘러 방어했기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움직이고 있어서 그랬는지 폭발의 여파에 멀리 튕겨 나갔다.
그렇게 멀리 날아간 유신은 한 건물의 유리를 깨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를 털어내며 교차로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그레이트 실드’가 그녀들을 덮었고, 소피가 ‘실드’까지 발휘한 것을 보기는 했다.
경호 임무 이전에 사람으로서 그녀들이 걱정됐다.
그래서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위험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위로 검이 지나갔다.
유신이 뒤를 돌아보니 약 스무 명 정도의 잿빛 로브인이 있었다.
“이거 너희가 벌인 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