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_백각(2)
사슴 뿔을 단 백호는 헤엄쳐서 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천지를 그러니까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그것도 나긋나긋하게.
유신은 재빨리 호수에서 나온 후 검을 소환했다.
“저게 뭘까요?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에 이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천지에 괴생물이 산다고.”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다가오고 있는 백호는 지구의 토종 몬스터 또는 종족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저 백호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게 더욱 불안감을 조장했다.
“으흠…일단 실버가 레드를 데리고 떠나세요.”
“네?”
“빨리요. 제가 기척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면, 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유신은 검을 더욱 꽉 쥐며 백호를 노려봤고, 실버가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저도 돕겠습니다.”
실버의 말에 유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해만 됩니다.”
“아…”
좀 더 부드럽게 말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한 시간도 여유도 없기에 그저 서두를 뿐이었다.
“빨리요.”
다행히 실버는 유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무기를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백두산 초입에서 다시 만나요.”
“무사 하십시오.”
“뭐 하면 도망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실버는 신평을 짊어지고 빠르게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신은 봉쇄의 목걸이를 풀었다.
솔직히 요즘은 봉쇄의 목걸이를 착용할 필요까지 없었다.
단지, 아직 조금은 미숙한 힘 조절과 13기동 타격대의 소속감 때문에 착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앙
백호의 울음은 소리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바로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그로 인해 유신은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피어였다.
순간적으로 몸속 기운을 돌리자 해방감이 들었다.
“설마…”
유신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실버와 신평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들은 백호의 피어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백호가 그들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재빨리 유신을 처리하고, 그다음 그들을 처리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역시 땅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군.
그런데, 유신은 두 귀를 의심했다.
백호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마.말을 하네?”
-내가 말하는 게 신기한가?
“대화가 되다니… 우와~”
유신은 방금까지 백호를 보고 긴장했다는 것도 잊고는 대화에 집중했다.
-땅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땅의 축복?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유신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더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더니 명치 부근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나온 황금빛은 구슬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백호에게 다가가 몇 바퀴 돌았다.
백호는 황금 구슬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 알겠다.
대화를 끝낸 황금 구슬은 다시 돌아와서는 유신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유신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뭐…뭐지? 방금 꿈이었나?”
-꿈이 아니다. 인간.
“나…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역시 말 그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었군.
유신은 두려웠다.
의식은 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 감각은 정말 무서웠다.
거기다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백호가 자신에게 해코지하려고 했다면, 아까 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 내 질문에 다른 대답하지 말고, 대체 뭐냐니까?”
백호는 그저 사나운 눈빛으로 유신을 바라만 봤다.
여기서 더 지를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까 생각하던 유신은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대답 안 해줄 거야? 아니 대답 안 해주실 건가요?”
-자네는 말이 많군.
자꾸 이상한 말만 하자 백호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말뜻을 이해하기는 한 것 같았다.
“하핫 제가 말이 많기는 해요.”
-내가 알려주는 것보다는 자네 스스로 깨우치는 게 좋을 거네. 그리고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군.
“조언이요?”
조언이라는 말에 유신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사슴뿔이 나 있고, 대화가 통하는 백호라고 하지만, 동물이다.
동물에게 조언을 듣는다는 게 조금은 께름칙했다.
“자네는 겉만 보고 남을 판단하는가?”
“어? 어? 방금까지? 어?”
유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동물이었다. 아니 백호였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에 사슴뿔을 단 인간의 모습을 하고 육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백호가 어디로 가고 앞에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저…방금까지 제 앞에 있었던 그 백호 맞으세요?”
유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슴뿔을 단 인간은 고개를 끄떡였다.
“평소 같았으면 자네를 그냥 내치겠지만, 땅의 부탁도 있어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 전 칼 제라니라고 합니다.”
순간 백호였던 인간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졌다.
“내게 거짓된 이름을 말하는 것이냐!!”
“으윽…”
엄청난 압박감에 유신은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신음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아까와 다르게 몸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최소한 반항이라도 한 번 할 수 있기에 두려움이 가셨다.
“그럼 당신은 누굽니까?”
“흥! 거짓된 이름을 대는 자에게 내 이름을 알려줄 필요까지 없다.”
무릎이 굽혀지려고 했지만, 애써 버텼다.
아무리 압박감이 심해도, 이건 무혁 대장보다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천외천을 느꼈는데, 이 압박감을 이길 수 없지만, 버틸만 했다.
“…좋습니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가 비밀 임무 수행 중이거든요. 제 이름은 하유신입니다.”
유신이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자, 백호의 압박감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눈빛은 변함없이 매서웠다.
“휴우~”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뒤늦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백호가 압박감으로 유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도 천지의 물은 단 한 방울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즉, 압박감을 일으킨 기운이 유신에게만 집중됐던 거다.
“하유신. 그게 네 이름이군.”
“다.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나는 이곳 천지에 살고 있으며, 물과 불의 주인이었고, 현재는 투기의 주인이다.”
“네?”
장엄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천지에 살고 있다는 말 빼고는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네 육체는 축복을 받아들이는데, 최소한 조건을 달성했네.”“그게 무슨 말인가요?”
“역시…정신이 아니 정확히는 이게 부족한가?”
백호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제가 머리가 나쁘다는 말이세요?”
“역시 인간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욕하는 건 쉽게 알아듣는군.”
목까지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그렇다고 욕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예전과 다르게 상대와의 차이를 파악할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지만, 고작 머리 나쁘다고 한 거 가지고 생사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로 내가 자존감이 높은 건 아닌 것 같고. 그래 일단 조언만 듣자. 조언만.’
유신은 화를 가라앉히고, 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응?”
“천지의 사는 분. 투기의 주인. 이런 식으로 부를 순 없잖아요. 이름이요. 또는 본인을 지칭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잖아요.”
“그렇군. 이름을 말해주는 걸 깜박했어. 역시 멍청한 존재와 같이 있으니 나 또한 멍청해지는 것 같군.”
순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
지금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아왔다.
그런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세요? 아니면 이름이 없다거나.”
유신은 본인도 모르게 입을 놀렸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참은 게 용했다.
“버릇이 없는 아해구나.”
백호가 서 있는 호수에서 주먹만 한 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중 단 한 방울이 분리되더니 앞으로 쏘아졌다.
피잉
물방울은 유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륵
그리고 귓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 지금 공격한 겁니까?”
“공격이라? 겨우 그 정도를 공격이라고 말하다니? 쯧쯧. 그저 간단한 무력 시위였네.”
“두 번 무력 시위를 하면 제 목이 날아가겠습니다.”
백호는 아무런 말 없이 유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더는 말씨름하고 싶지 않군.”
“저도 그렇습니다.”
“혓바닥이 무척 길군.”
“이름이나 말씀해 주시죠.”
“흥. 그래. 그게 예의이니 알려주지. 내 이름은 백각이네.”
“백각이요?”
호랑인지 인간인지 모를 존재의 자기소개가 끝나도 유신은 아리송했다.
자신이 아는 존재 그러니까 전설과 영웅 중에서 백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물론 저 모습을 보면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말이다.
“제게 해줄 조언은 뭡니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다.
유신은 계속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를 가진 백각에게 톡톡 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했던 말 그대로네. 자신을 관조하게. 육체는 만들어졌지만, 지식이 부족해.”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렸다.
“자네 음양오행은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노사의 이론 교육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 나왔던 게 음양오행이었다.
“빛과 어둠, 불, 물, 나무, 쇠, 흙 이게 음양오행 아닙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론적으로만 알기보다 그걸 자네가 습득해야 하네. 그리고 지금 자네는 오행 중 토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토요? 흙 말씀이세요?”
백각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뭔가 노사의 설명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공손해지는 말투를 사용했다.
“그래. 인간의 육신이 근간은 토 그러니까 흙이지. 자네가 오행을 다 얻게 된다면, 음양이 뒤따라올 것이야. 그런데, 자네는 벌써 두 번의 탈피를 했군.”
“탈피?”
탈피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탈피가 환골탈태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됐다.
“환골탈태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인간에게는 그렇게 불리기도 하는 것 같더군. 그럼 이것도 알고 있나? 보통 인간은 한가지 기운이 극에 달하면 탈피하게 되지. 그런데 자네는 어떤 기운도 극에 달하지 않고 2번이나 탈피를 하게 됐어.”
설명이 이어질수록 유신은 점점 불안해졌다.
좋은 말인 것 같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반전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일단 땅의 기운을 느끼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그리고 이만 돌아가게.”
“네? 아니 무슨 화장실을 갔다가 제대로 닦지도 못한 사람처럼 말합니까?”
“비유를 해도 참 더럽게 하는군.”
“……”
유신은 한 번 붙어 볼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에 있는 백각은 분명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무리 말이 거칠고, 직설적이어도 그런 존재에게 함부로 싸움을 걸 만큼 막돼먹지는 않았다.
“뭘 말씀하시는지 아직 이해는 못 했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빨리 돌아가게. 그리고 다음에 와서도 오늘처럼 천지의 물을 더럽히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야.”
백각의 말에 유신은 이곳에 오자마자 물장구를 쳤던 걸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죄송합니다.”
“됐네.”
몸을 돌린 백각이 다시 백호로 변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백각을 보며 유신은 말없이 가면을 벗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유신이 고개 숙여 인사를 끝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백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면을 쓴 유신이 천지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그래도 영 예의가 없는 친구는 아니군. 차후에 땅의 기운을 느끼고 완숙해지면 다시 찾아오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백각의 목소리에 유신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백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천지를 떠나면서 유신은 자신의 명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땅의 축복? 일단은 서로 어색하고, 낯가림이 심한 것 같은데, 서로 천천히 알아가자.”
느긋하게 땅의 축복에 대해서 알아가려고 했지만,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