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_신평의 사정
정제된 오러가 찰스의 목젖을 금방이라도 갈라버릴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죠?”
“그렇군. 내가 졌네.”
순순히 항복한 찰스가 마나검 소환을 해제하며 말했다.
“이게 바로 자네가 말한 노력의 결과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거인의 세계에서 기연이 있었습니다.”
“기연은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네.”
“사실 방금 전투에서 운도 따랐고요.”
“됐네. 더 말해봤자 나만 비참하네.”
찰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죽을 둥 살 둥 싸웠던 유신이 맞는지 헷갈렸다.
6개월간 바라봤지만, 유신은 평소에 한없이 가벼웠다.
행실도, 말하는 것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자신이 마음먹은 일에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눈빛, 행동 그리고 기세가 바뀌었다.
그 압박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지금까지 자네와 싸웠던 몬스터들의 심정이 이랬군.”
“네?”
“아니야. 혼잣말이었네. 그럼 게이트를 열지. 그러니 오러 좀 치우게.”
“앗 죄송해요.”
의기발현.
의지로 기를 다스리는 경지.
유신의 경지는 거의 그 단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목젖을 겨냥했던 오러가 사라졌다.
찰스는 아직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었다.
“이제 갈까요?”
유신은 아무렇지 않게 찰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묻지 않았다.
왜 싸움을 걸었는지.
그게 유신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찰스는 오히려 그게 더 불편했다.
“찰스 아저씨 뭐해요? 집에 가야죠.”
“혼자 가게.”
“네?”
“난 바로 돌아가야 하네.”
“에엑? 송별회도 없었는데 이대로 간다고요?”
“그렇게 됐네.”
“쩝. 그럼 다음에 밥이나 먹어요.”
찰스는 알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다음에 밥이나 먹어요는 인사치레 같은 말이라는 걸.
“유신.”
막 게이트에 들어가려고 하는 유신을 찰스가 불러세웠다.
“네?”
“난 아직 서른넷밖에 안 됐네. 그러니 다음에 볼 때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 부르게.”
벙찐 표정을 짓던 유신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말투부터 고치세요. 할아버지 같은 말투예요.”
“그러지.”
사람의 말투는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방금도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또 그런다.”
“아. 알았다.”
“네. 찰스형~ 그럼 다음에 봐요.”
그리고 유신은 게이트로 들어갔다.
찰스는 유신이 들어간 후 한동안 빤히 게이트를 바라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게이트가 사라졌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후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연예인 뺨 때릴 정도로 잘 생겼다.
“그래 유신아…”
***
닷새.
장기전을 준비하려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을 수도 있는 기간이다.
유신은 가족과 시간을 보낸 후, 임무 때문에 몇 달간 집에 오지 못한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반대하거나 혼날 줄 알았는데, 부모님은 그저 묵묵히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닷새는 빠르게 지났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홀로 집합 장소인 파주에 도착했다.
“와~ 사람 많네~.”
세계 국가와 한국 지부에서 이번 작전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수많은 헌터와 기동대 인원이 파주에 모였다.
“그런데 왜 다 날 쳐다보지?”
평범하게 걸어왔는데, 갑자기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유신의 복장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검은 타이즈에 계절과 맞지 않는 검은 롱코트.
거기다가 얼굴은 두 눈만 뚫려 있는 흑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을 때였다.
“신평! 신평!!”
아카데미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 들려왔다.
“네 여깄습니다.”
한쪽에서 낡은 전투복을 입고, 등에 창을 맨 신평이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됐다.
이태원 클럽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반가워서 한걸음에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아…아닙니다.”
“딱 보니까. 농땡이 피우고 있었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하~ 일단 따라와.”
“네 알겠습니다.”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신평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혹시나, 싶어서 신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교황청 소속의 칼님 맞으십니까?”
은빛가면을 쓴 4기동대원이 유신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한국 지부에서 4기동대는 같은 기동대나 헌터들에게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네 맞습니다.”
칼은 내가 이번 작전을 수행하면서 사용하기로 한 가명이었다.
영어로도 발음하기 쉽고, 한국 고유 단어이기도 했기에 칼로 선택하기는 했다.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평에게 가서 오지랖을 떨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신분을 밝힐 수 없어서 가명을 쓰고 있었다.
거기다가 가면까지 쓴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렇게 유신은 4기동대원을 따라 고위직들만 들어갈 수 있는 건물에 들어가게 됐다.
“여기서 쉬시고 계시면 작전 회의 시간에 찾아오겠습니다.”
“네.”
4기동 대원은 꾸벅 인사하고선 나갔다.
방은 단출했고, 창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니 기동대와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평을 찾아보기 위해 세세히 살펴보다 보니 한쪽 구석에서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저기 있네.”
휴대폰을 꺼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신평에게 전화해도 되나?
‘그래 내가 언제부터 생각만 했다고, 일단 저지르자.’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음이 울린 후 신평이 전화를 받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살아있었냐?”
몇 년 만에 건 전화였지만, 신평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여보세요? 야 하유신!”
“아 미안미안. 잠깐 뭐 좀 하느라.”
“이 새끼는 지가 전화해놓고선.”
“잘 지내지?”
“…야 형님이 이번에 뛰어난 능력으로 인류화 작전에 투입되잖아.”
잘 지내냐는 질문에 신평이 멈칫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지만, 창문으로 바라본 신평은 잠시지만 표정을 찡그렸다.
“오~ 관통이 이제 무르익었나 봐?”
“당연하지. 이 형님의 관통은 뭐든지 다 뚫어버리잖아.”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확실한데, 신평은 말을 하지 않았고, 유신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모른 척하며 추억을 회상하는 통화를 이어갈 때였다.
통화하고 있는 신평 근처로 아까 그놈이 다가갔다.
“유신아 미안. 내가 다음에 전화할게. 지금 좀 바쁘네. 한국에 돌아오면 연락할게.”
“어. 그…그래.”
유신이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바라본 광경에서 신평은 그자에게 혼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애써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놈이 신평의 정강이를 전투화로 찼다.
은어적인 표현으로 쪼인트를 깐 것이다.
똑똑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칼님. 제대로 쉬시지도 못했지만, 회의 시간입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잠깐만 이리 와보세요.”
유신의 말에 4기동 대원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창가로 다가왔다.
“저기 저 사람들 보이죠?”
“…네.”
솔직히 4기동 대원은 황당했다.
손으로 가리킨 곳은 너무나 멀어서 대충 윤곽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출발인데 군기를 잡고 있네요. 저 사람들 누굽니까?”
4기동 대원은 유신이 가리킨 곳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내공까지 사용해 안력을 높였다.
그러자 겨우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지부 10대 길드 말석에 있는 라이징 길드입니다. 바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조치요?”
“일단 저 행위를 멈추게 한 다음. 경고를 주려고 합니다.”
4기동 대원이 다가가서 경고를 주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오늘 신평은 평소보다 더 심한 괴롭힘을 당할 거다.
아무리 4기동대가 뛰어나도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 그거요? 됐어요. 그러지 마요.”
“알겠습니다.”
하지 말라고, 바로 알겠다는 대답에 4기동 대원도 귀찮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그런데 궁금하네요. 다 같이 목숨을 거는 작전을 진행해야 하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그냥 이유만 좀 알고 싶네요. 아무도 모르게 이유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체 위에서 무슨 명령이 내려왔는지 4기동 대원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대화를 통한 부탁을 끝내고 4기동 대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교황청에서 이렇게 직접 관심을 가져주시고 반갑습니다. 저는 캔 브레이커입니다.”
캔은 유신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몰랐기에 반갑게 악수를 권했다.
유신은 그런 캔의 악수를 무시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거 부끄러움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크게 웃어 보여도 유신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얼마 지나지 않아 뻘쭘한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다 모인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로 회의는 시작했다.
유신은 슬쩍 캔 브레이커를 바라봤다.
강철의 기사이자, 유신과 악연인 지미 브레이커의 아버지.
자신을 협박하고, 치사하게 사인도 해주지 않은 인물.
대외적으로는 인자하고, 광명정대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마왕과의 대전쟁 당시 숨거나 도망만 다닌 겁쟁이.
“다음 안건입니다……”
회의는 길고 지겨웠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서로가 더 이득을 봐야겠다.
그렇게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오전에 시작한 회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휴~ 지겹다. 그냥 출발 전에 올걸.”
침대에 누워 정신적 피로를 풀고 있을 때였다.
똑똑.
“칼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잠시만요.”
유신은 서둘러 가면을 다시 쓰고는 문을 열어줬다.
4기동 대원이 고급 도시락을 내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부탁하신 겁니다.”
아까 조사해 달라고 했던 부탁을 문서로 정리했는지, 얇은 서류를 내밀었다.
“이렇게 신경도 써주시고…그럼.”
도시락과 서류를 받은 후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4기동 대원이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저 그러니까…”
대외적인 이미지가 살벌하고 냉정한 4기동 대원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네 뭐 물어보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그게…”
피곤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빨리 밥 먹고 쉬고 싶은데, 머뭇거리자 짜증이 살짝 났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준 게 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친절하게 말했다.
“편히 말하세요.”
“저 사실은… 캔 브레이커께서 잠깐 보자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군요.”
서로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4기동 대원이 당황하는 건 알겠다.
“언제부터 헌터가 기동대 그것도 4기동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죠?”
“아. 아니 오해입니다. 그저 저는 영웅이라서 존경심에 부탁을…”
순간적으로 아무런 죄가 없는 4기동대원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한 적은 없었다.
거기다가 사소한 부탁까지 이렇게 들어줬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너그럽게 쓰기로 했다.
“장소는 어디인가요?”
“아… 30분 뒤에 1층 로비로 오시면 됩니다.”
“한 시간 뒤에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30분 뒤에…”
“한 시간 뒤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선 문을 닫았다.
솔직히, 남들은 내로남불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캔 브레이커였다.
그 사람에게는 왜인지 맞는 말도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에효~ 하유신. 너 진짜 소심하구나.”
스스로 아주 잠깐 자책하고는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의 내용품은 다양하고, 맛있어 보였다.
기분 좋게 식사를 시작하며, 서류를 읽어 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이딴 새끼들이 다 있어!!”